자연은 인간에게 생명을 주었고, 더불어 살라는 가르침을 주었으며, 조화(調和)를 이루며 살라는 정신(精神)을 주었다. 사람들의 삶터에는 위계(位階)라는 정신세계가 있다. 생업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의 자리 · 정치(政治)의 자리가 있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정치의 지배를 받게 되어 있다. 정치는 사람들의 위임을 받아 국가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며 행사하는 활동을 한다. 그래서 너도나도 정치를 하고 싶다고 뛰어들고 있다. 그렇다면 정치가 제일일까? 아니다. 정치는 의(義)의 지배를 받게 되어 있다. 아무리 정치가 사람들을 지배한다고 해도 의롭지 못하면 안 된다. 민심이 천심이라는 말처럼 민심이 떠난 정치는 정치가 아니다. 그러나 의롭다고 모든 것이 다 되는 것이 아니다. 의(義)는 덕(德)의 지배를 받게 되어 있다. 바르게 한다고 잘 되는 것이 아니다. 덕을 쌓아야 한다. 덕을 쌓는다는 것은 선(善)을 쌓는 것이다. 덕을 쌓으면 반듯이 경사가 뒤따른다. 보이지 않는 마음의 자리에서 덕의 자리는 그만큼 소중한 자리이다. 아무리 덕망이 높은 사람도 도(道)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도(道)의 자리는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자리이다. 인간을 가리켜 만
태초에는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현상을 바라보고 무엇이라고 했을까? 선조들은 보이는 모습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모습도 꿰뚫어 보고 모든 현상을 가리켜 자연이라고 했다. 우주에서 저절로 이루어지는 모든 존재나 상태를 ‘자연’이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자연(自然) 그 자체를 도(道)라고 하였다. 자연의 섭리(攝理)와 이치(理致)를 철학적인 용어로 도(道)라고 표현한 것이다. 자연의 섭리(攝理)와 자연의 이치(理致)를 떠나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라는 뜻이 되기도 한다. 자연은 수시로 형상과 성질 등이 달라진다. 변화되지 않는 것들이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연이 만들어내는 모습을 조화(造化)라고 한다. 서양과 동양에서 말하는 자연의 뜻은 서로 다르다. 서양에서는 인공(人工)의 반대 개념으로서의 순수한 자연을 말하지만, 동양에서는 ‘스스로 그러하다’라는 철학적 개념이 담겨있다. 자연은 스스로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한다. 이러한 이치를 깨닫는 순간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되는 순간이다. 인간에게 도(道)란 무엇일까? 우주가 스스로 다스리고 있는 원칙(原則)이 있다면 그것은 균형(均衡)과 조화(造化)다. 우주 안에 있는 모든 물체가 균형과 조화(調和)라는 잣대
인체 환경 변화 연구 결과가 1992년 발표되었다. 현대 과학자들은 1938년생에 비해 1990년생에게는 정자 수가 절반으로 줄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연구의 결과는 음식물과 공장폐수와 화학제품을 무절제하게 사용한 환경 호르몬이 인체에 스며들어 생식기관, 신장, 뇌하수체 등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인은 음식에서 찾을 수 있다. 젊은이들이 편리함만을 선호하다 보니 캔 음료 같은 가공식품을 찾게 되어 있는 분위기이다. 가공식품을 만들 때 장기 보관하기 위해서 · 좋은 빛깔을 내기 위해서 화학 물질을 넣는 경우가 있다. 특히 라면에는 나트륨이 1개당 1,800~1,900mg 정도로 매우 높은 편이다. 또한 주거환경에서 찾을 수 있다. 선조들이 집을 지을 때 흙과 나무를 사용했다. 흙은 지구의 표면을 덮고 있는 바위가 부스러져 생긴 무기물과 동식물에서 생긴 유기물이 섞여 만들어진 활기(活氣)를, 나무는 잎과 줄기를 통해 하늘과 땅에서 얻은 생기(生氣)를 우리에게 준다. 현대의학에서는 사람은 영혼과 육체로 구성되었다는 가설에 따라 연구 과정의 데이터가 쌓이고 있다. 여기에서 윤리적인 문제로 인간을 실험대상으로 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과학이 생
자연적으로 생성되거나 갖추어진 지구상의 환경을 자연환경이라고 한다. 이 자연환경을 인간 중심으로 볼 때, 지구 표면의 생김새에 따라 기온 · 비 · 눈 · 바람 따위의 기체층 영향으로 각기 다른 식물의 집단이 형성된다. 이런 자연환경에 의해 인간의 생활은 그 지역의 특성에 따라 서로 다른 문화가 형성되게 된다. 선조들은 직관(直觀)을 통해 자연의 실상을 보고 관념(觀念)을 만들어 냈다. 이렇게 새로운 상황이 전개되면 그에 맞는 이름을 붙인다. 그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에 합당한 의미를 지니게 되고 새로운 개념(槪念)을 지닌 낱말로 서전에 기록된다. 그래서 직관이 현재 진행형이라면 개념은 과거 완료형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자연의 실상(實像)을 냉정히 응시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만의 견해나 관점을 싣지 않고 보아야 한다. 물이 흐르면 흐르는 대로 보이는 그대로를 보아야 한다. 물의 흐름을 간섭하거나 관여할 때 자연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없게 된다. 세상의 이치를 깨우칠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이다. 자연은 정복(征服)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공존(共存)의 대상이다. 자연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자연이 스스로 그러하도록 다
홍익인간 사상은 한민족 고유의 교육이념이며 정치이념이다. 홍익인간 정신을 펴기 위해서는 먼저 개인적으로 독립적 존재로서의 완성을 이룰 수 있도록 한 후, 사회적으로는 하나로 어우러지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 이 홍익인간 사상은 개인이나 어느 단체 또는 국가를 중심으로 삼지 않고, 홍익 이념을 중심으로 삼을 때 진정한 가치를 드러낼 수 있다고 한 것이다. 하늘 · 땅 · 인간의 창조 정신과 목적이 담긴 염표문(念標文)은 환국의 국통(國統)을 이어받은 배달국 1세 환웅 거발환(居發桓)이 환국 시대 국시인 홍익인간의 대도 이념[일신강충(一神降衷) · 성통광명(性通光明) · 재세이화(在世理化) · 홍익인간(弘益人間)]을 열여섯 자로 정리해 준 것이다. 고조선 11세 도해(道奚) 단군은 이 염표문을 하늘 · 땅 · 인간, 삼위일체(三位一體)의 도(道)로써 완성하였다. 조선 시대 초기에 역성혁명으로 정통성 시비에 시달려 오던 왕[조선 3대 · 7대 · 8대 · 9대]들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반대 세력에 있는 유생들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유교 사상을 내세우면서 고조선 비사(古朝鮮 祕史) 같은 천문지리와 관련된 서적들을 수거 · 소각하였다. 그러나 남사고 저
인간에게는 몸에 대한 생명과 영혼에 대한 생명이 존재하며, 부모를 통해 몸을 받아 한 생명체로 탄생한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생명을 자신의 육체와 동일시하는 견해가 일반적이었다. 그래서 생명을 몸에 있는 심장의 수명으로 보고 심장박동이 멈추면 생명은 끝나는 것이라고 봐 왔지만, 이것은 몸에 대한 생명일 뿐, 영혼에 대한 생명은 생각하지 못한 견해이다. 선조들은 인간의 실체를 살펴볼 때 육체[身]와 마음[心] 그리고 이 둘을 연결하는 기(氣)로 구분하여 보면서, 육체와 마음 가운데 기(氣)가 있어, 세 가지 기능을 하나로 연결하여 조화를 이룬다.라고 밝힌 것이다. 마음[心]에 따라 힘[에너지(Energy)]이 생기고, 분위기에 따라 마음이 생긴다. 그래서 마음과 기운과 육체의 균형과 조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인체에는 기운이 합성(合成)되고 저장되는 곳이 있다. 이곳을 단전(丹田)이라고 한다. 인체에는 내단전(內丹田)과 외단전(外丹田)으로 나눌 수 있다. 내단전은 하단전(下丹田) · 중단전(中丹田) · 상단전(上丹田)이 있고, 외단전은 양 손바닥에 있는 장심(掌心)과 양 발바닥에 있는 용천(湧泉)이 있다. 단전은 혈 자리처럼 어느 한 지점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삶의 지혜가 담긴 천부경 · 삼일신고 · 참전계경은 한민족의 3대 경서(經書)이다. 천부경에는 인간을 중심으로 설명된 자연의 섭리와 이치가 담겨 있고, 삼일신고에는 우아일체(宇我一體)의 깨달음을 얻고 나서, 널리 이롭게 하려는 사람이 넘쳐나는 세상을 만드는 원리가 담겨 있고, 참전계경은 배달 시대의 오사(五事)와 팔훈(八訓)을 중심으로 제시한, 인간이 지켜야 할 삶의 지혜가 담겨 있다.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자연을 다스리는 기본원리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까? 그것은 음·양(陰·陽)의 균형(均衡)과 조화(調和)라고 할 수 있다. 균형은 상대적이고 정적(靜的)이라면 조화는 ‘동적(動的)’이다. ‘정(靜)’에서 ‘동(動)’으로 움직여야 한다. 하나를 지향해 움직일 때 조화가 생긴다. 조화가 깨지면 균형도 깨지고 균형이 깨지면 조화도 깨지기 때문이다. 이 균형과 조화를 받치는 힘은 원심력(遠心力)과 구심력(求心力)이다. 선조들은 원심력과 구심력의 작용으로 우주가 지탱되고, 그 속에서 세상만사가 이루어진다.라고 본 것이다. 자연의 섭리와 이치는 보이는 현상만 있는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 천부경은 중앙아시아의 천산(天山)에서 살았던 환국…
사람들이 느끼는 ‘생사(生死)’는 변화무쌍한 우주 현상의 하나일 뿐이다. 꽃들이 피고 지는 과정을 반복하듯이, 수많은 생명체가 세상에 나와 성장하고 죽지만, 죽음 자체로 ‘생명이 끝났다’라고 볼 수 없다. 사람이 ‘죽었다’라고 할 때 그 의미는 육체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다. 선조들은 이 생명체를 ‘몸에 대한 생명’과 ‘영혼에 대한 생명’으로 구분하여 설명하였다. 그런데 우리는 육체가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심장의 박동이 멈추는 순간 ‘생명은 끝났다.’라고 보아왔지만, 이러한 생각은 몸에 대한 생명일 뿐 영혼에 대한 생명을 생각하지 못한 견해이다. 인간은 육체(肉體)와 기체(氣體)와 영체(靈體)로 이루어져 있다. 육체는 머리에서 손과 발까지 거기에 딸린 모든 것이라고 한다. 육체는 크게 보이는 질서와 보이지 않는 질서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보이는 질서는 골격 · 근육 · 피부를 근본 구조로 하고, 현관과 신경망들을 통해 연결되는 혈액과 산소를 유통하는 체계로 이루고 있다. 보이지 않는 질서는 경혈과 경락을 통한 기적(氣的) 시스템으로 기운과 정서적 정보가 유통되는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 선조들은 육체의 가치는 영혼의 완성을 위한 쓰임에 있다며, 삶의 가치와
얼굴 한가운데 오뚝 솟은 코는 냄새를 맡는 후각기관이자, 몸에서 공기가 드나들 수 있는 입구이다. 크게 바깥 코와 안쪽 코로 구분되며, 안쪽 코 좌우 공간으로 나누어져 있으면서, 콧구멍 안쪽을 덮고 있는 점막에서 점액을 분비하기 때문에, 점막의 표면은 항상 끈끈하고 미끄러운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코와 관련한 속담이 ‘입 아래 코 · 내 코가 석 자 · 손 안 대고 코 풀기 · 곁방살이 코 곤다 · 넘어지면 코 닿을 데 · 다 된 죽에 코 빠졌다 · 코에서 단내가 난다 · 얼굴보다 코가 더 크다 · 눈을 떠도 코 베어 간다 · 코딱지 두면 살이 되랴.’ 등등 이렇게 많다는 것은, 코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거라고 본다. 코의 역할은 공기가 드나드는 과정에서 공기를 통해 들어오는 냄새를 맡거나, 코안의 털로 병원체 등 이물질을 잡아내는 방어기능을 보조하거나, 목소리 울림통 역할을 한다. 이보다 더 중요한 역할은 공기를 통해 들어오는 백금 성분을 받아들여 사리가 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과학으로 검증된 ‘백금(Pa)과 사리’ 연구분석 결과 과학자들은 태양광에 의해 광합성(光合成)된 외계 금속성 물질들이 지구 보호막 전리층을 형성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더 나아가
홍익인간 이념은 일연(一然)의 저서 삼국유사(三國遺事) 권1 고조선(古朝鮮) 조(條)에 ‘환국(桓國) 7세 지위리 환인(桓仁)이 배달국 초대 환웅(桓雄)에게 전수한 가르침’이라는 기록이 있다. 우주의 진리로 백성을 가르치고 이끌어서 올바른 방향으로 나갈 수 있게 하여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한다는 한민족의 인간 구원 정신은 수천 년 이어지며 민족의 가슴속 깊이 아로새겨져 면면히 이어져 왔다. 선조들이 인간은 우주의 조화로 태어나서, 함께 살아가야 한다며 종전지도(倧佺之道)를 강조하였다. 종(倧)이란 인도(人道)의 정신에 뿌리를 둔 도맥(道脈)이다. 전(佺)이란 인간은 하늘의 완전성[佺=亻+全]을 이룰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도(道)를 풀이하자면, 아비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아비다워야 하고, 임금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임금다워야 하고, 스승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스승다워야 한다. ‘마음과 기운과 몸’ 균형과 조화 이뤄 무해유익(無害有益)한 사람이 되자. 홍익인간은 심신(心身)이 밝아진 사람을 말한다. 이 경지에 이르게 되면, 너와 내가 하나임을 알게 되고, 전체를 먼저 생각하며 무해유익(無害有益)한 사람이 된다. 다시 말하면 인간 본래의 감각과 본성(本性)을…
세상 만물이 태어나고 성장하면서 완성되었다가 소멸하는 과정의 원리를 인간 중심으로 설명한 내용이 천부경(天符經)이다. 그리고 천부경의 주석서인 『삼일신고』는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하는 이치의 원리를 366자로 담은 경서(經書)이고, 『참전계경』은 삶의 생활 규범을 366가지 지혜로 담은 경서(經書)이다. 『삼일신고』 제5장 ‘인물’에 담긴 내용을 아래와 같이 구성해 보았다. 신라 때 최치원은 자연의 섭리와 이치를 통찰하고 기(氣)의 생성 원리를 명쾌하게 설명했다. 난랑비 서문에서 나라에 현묘(玄妙)한 도(道)가 있으니 이를 풍류(風流)라고 밝혔다. 최치원은 이 경지에 이르게 되는 이치를 현빈일규(玄牝一竅)로 설명했다. 현빈일규(玄牝一竅)의 뜻은 천기(天氣)와 지기(地氣) 사이 공간에 합(合)을 이루면 ‘하나의 구멍’이 생기며, 그곳에서 기(氣)의 교감이 생긴다는 것이다. 최치원이 ‘하나의 구멍’에서 기(氣)가 머문다고 한 뜻은 어떤 의미일까? ‘하나의 구멍’을 과학적인 방법으로 비유하여 설명하자면, A 지점과 B 지점에서 무전기(無電機)로 교신하려고 한다고 하자. 그렇게 하려면 우선 무전기의 주파수가 연결되어야 하는 것처럼, 천기(天氣)인 우주의 주파수와 지기
이 순간 나를 존재하게 하는 것은 목숨이다. 사람이 코나 입으로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쉬는 숨이 바로 목숨의 실상이다. 이렇게 소중한 숨은 태어나면서부터 배우지 않아도 누구나 다 할 수 있다. 그런데 선조들은 소홀히 생각할 수 있는 호흡에서 그 참 의미를 깨닫고, 몸과 마음의 감각이 깨어날 수 있도록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라고 밝힌 것이다. 숨이 고르면 마음이 안정되지만, 흥분하거나 놀라면 호흡이 가빠진다. 그래서 호흡할 때 숨을 고르게 쉬되, 억지로 참거나 길게 해서는 안 된다. 자연스럽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숨을 내쉴 때 허공과 하나가 되어 하늘에 감사하고, 숨을 들이쉴 때 몸과 하나가 되어 몸에 감사하면 어떨까? 호흡에 정신을 집중해서 하다 보면 의식이 호흡 속에 무르녹아 호흡 자체가 된다. 그래서 선조들은 자연스러움을 잃지 않고 숨을 쉬다 보면 숨의 더 깊은 의미, 생명의 참모습을 알게 된다고 한 것이다. 그렇다 숨을 고르게 쉰다는 것, 그것은 숨결이 지극히 곱다고 느낄 만큼 부드럽게 다스리는 것이다. 자신의 숨이 짧던 길던 의식하지 않고 숨결에 집중하게 되면, 몸과 마음의 근원적인 생명 리듬을 되찾게 되어, 영혼과 육체의 조화가 절로 이루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