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소개 - 《다시 근대화를 생각한다》 2019년 《박정희가 옳았다》가 출간된 이후, 2탄의 성격을 띤 《다시 근대화를 생각한다: 박정희가 옳았다2》(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刊) 이강호 연구위원의 저서. - 저자소개 - 이강호 연구위원은 1980년대 좌익운동권 출신. 1990년대 초 소련·동구의 몰락을 보면서 우익으로 전향(轉向)했다. 노무현 정권 이후 좌익 세력의 폭주에 우려를 느껴 그동안의 성찰을 바탕으로 청년학생·시민들을 상대로 한 강연 활동을 벌여왔다. 정치사상, 특히 ‘근대성’의 문제에 천착하는 글을 많이 써왔다. 이강호 연구위원은 이 책에서 “신성(神聖)의 깃발로 행세해 오던 민주화의 정치적 위세가 다른 모든 것을 짓밟고 군림하는 양상이 심화되면서, 되살아난 전근대적(前近代的) 악습이 근대화를 유린하는 꼴을 목도하고 있다”면서 “지금은 박정희의 근대화 정신을 다시 생각할 때”라고 말한다.
이대남 VS 이대녀의 갈등이 지난 20대 대통령선거 이후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여성가족부의 존폐 여부가 곧 판가름 나기에 그럴만도 하겠다. 여러 가지 복잡한 젠더갈등에 훈수 둘 이유는 없다고 본다. 다만 이대녀가 어떤 사람들인지, 어떤 세력의 영향권 안에 허덕이는지가 궁금하다. 흔히들 이대녀들을 향해 페미니스트라 한다. 글을 쓰는 필자 또한 페미니스트적인 면이 없지는 않다. 남녀평등과 상호존중의 삶이 외면받거나 지탄받을 이유는 없다. 하지만 자신들보다 훨씬 어려운 처지에 있던 여성들의 고통에 침묵했던 자들이 누구였던가. 조국 전 장관의 내로남불 딸사랑과 범죄행각에도 침묵했으며, 윤미향의 정신대 할머니 갈취사건에도 모른체 했고, 박원순의 성피해자를 피해 호소인으로 비아냥거리며 고통조차 외면하고 침묵했다. 이대녀는 무엇으로 존재하는 인간이며 세력들인가. 그러고도 존재감을 인정받고 싶은가. 그런 생각 자체가 가증스럽기에.... 이대녀들은 버려야 하고, 변하지 않는 한 계속 버려져야 한다. < T J >
· 이번 대선은 2017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후 5년만에 다시 치루어지는 선거이다. 문재인정권은 지난 5년 동안 적폐청산이라는 ‘한국판 정치 숙청’과 돈뿌리기 ‘사육형 정치’를 통해 불안정한 권력을 유지해 왔다. 이번 대선은 자유대한민국의 존폐 여부와 관련된 중대 선거이다. 이번 대선에서 정권 재창출에 성공할 경우, 여당은 국회 다수 의석을 바탕으로 자유민주주의체제 변경과 북한과 연합을 추진하기 위해 개헌에 착수할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될 경우 합법적으로 대한민국의 체제 변경이 이루어질 것이다. 정권 재창출을 향해 나가던 문재인정권은 불공정의 대명사가 된 ‘조국 사건’이라는 암초에 부딪히게 된다. 조국 사건 수사에 나선 윤석열 검찰총장을 쳐내려는 과정에서 윤석열 총장의 격렬한 저항과 그에 대한 국민적 지지가 합쳐져서 윤석열 총장은 야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다. 박근혜 전대통령은 자신의 탄핵과 수사 문제를 ‘합법성’(legality) 차원에서만 볼 수 없고 '정당성'(legitimacy)의 문제도 동시에 고려되어야 한다고 최근 그의 책에서 지적한 바 있다. 박근혜 전대통령이 윤석열 후보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표명하느냐 하는 점도 이번 선거의 향방을 가르
군사외교안보정책의 상수로 작용하는 지정학측면에서 볼 때, 대한민국은 서남아-중앙아시아-동북아를 잇는 유라시아대륙의 오른 쪽 맨 끝부분에 붙어 있는 특이한 돌출 형 반도국가 모습을 취하고 있다. 국제정치학자들의 관점에 따라 다소간의 차이가 있다손 치더라도, 한반도는 중국의 머리 뒤를 겨냥한 ‘망치’의 모습을 하고 있다든지, 아니면 아래 섬나라 일본의 심장을 겨누는 ‘단검’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지정학적인 평가가 일반적이다. 이런 지정학적 요인이 말해 주듯이, 한반도는 구한말 자국 세력을 확대하려는 강대국들 간의 세력 경쟁 각축장이 되었고, 급기야 청일전쟁(1894)과 러일전쟁(1904)의 대리 전쟁터로 전락하고 말았다. 구한말 당시 대륙 국가였던 청나라는 전형적인 제국주의 열강들의 피해국이 되었으나, 오랜 세월 조선의 종주국을 자처했던 조공국인 조선에 대한 우월적 지위를 포기하지 못했다. 그 결과 또 다른 대륙세력인 러시아와 신흥 해양강국으로 부상한 일본과의 과도 경쟁이 불가피했다. 36년간의 식민지 조선은 해양세력과의 동맹을 포기했고, 군국주의 국가가 된 일본이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연합세력에게 패전하면서 비로소 해방된다. 해방된 조선은 대륙세력의 종주국인
민족지상주의와 평화이상주의에 의한 환상적 착시현상은 우리 국가안보와 남북관계에 현실적 문제들을 적잖이 배태시키고 있다. 인류의 염원인 평화는 단순한 평화협정이나 평화 메세지만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수많은 전쟁의 역사를 통해서 뼈저리게 경험해왔다. 민족지상주의자들의 평화에 대한 환상적 집착은 ‘역사를 기억하지 못한 자, 그 역사를 다시 살게 될 것이다’라는 얘기를 떠 올리게 한다. 왜곡된 인간의 감성은 어리석은 시행착오를 향한 배에서 내릴 줄을 모른다. 모름지기 평화는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켜내야 하는 것이고, 지켜내는 것은 단순히 메세지나 협정으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히틀러에게 굴종적 평화를 구걸하고 그것이 ‘이 시대의 평화’라고 믿었던 체임벌린의 평화, 2000년 6월 평양을 다녀오면서 “이제 한반도에 전쟁은 없다”라고 확신에 찼던 김대중의 평화, “평화는 강자의 특권이다”라고 한 윈스턴 처칠의 일갈을 새겨봐야 한다. ‘우리민족끼리’라는 ‘민족공조’에 대한 집착과 망상 또한 한반도에 합리적 평화를 염원하는 우리에게 혁신적 각성제가 필요함을 일깨워 준다. 실체가 없는 민족지상주의의 환상이 남북관계에 합리적인 진전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선거사상 유래가 없는 부실선거 의혹이 불거져 나오는 이때,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된 경북지역의 산불이 한 개인의 방화로 드러나 충격이다. 대한민국 역사상 유래가 없었던 국보 1호 남대문 또한 한 개인의 방화로 전체가 소실되었던 사건은 그야말로 비보였었다. 한 개인의 왜곡된 심성이 얼마나 많은 피해를 주변과 사회에 끼칠 수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 사례였다. 우리는 이런 사건을 통해 무엇을 교훈으로 삼아야할까.. 한 개인의 삐뚤어진 심성이 이러할진대, 집단적 소시오패스 증상을 보이는 특정 정치집단이 대한민국의 운전대를 잡게 된다면... 그 결과는 차마 입에 담기도 싫은 비극이 될 게 뻔하다. 경북과 강원지역은 정권교체를 바라는 야당 몰표 성향이기에 산불이 더 확산되어 투표 못하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글들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도배질을 하고 있다니... 우리사회가 이렇게까지 망가졌는지, ‘아수라’가 따로 없다. 엉망진창 선관위에 개탄하고, 인성말살 소시오패스 집단에게 분노하며, 9일(수)만 손꼽아 기다려본다. < S M >
어느 순간부터 대한민국에서 보수라는 말이 무조건 부정적인 의미로 통용되는 세상으로 되어버렸다. 사실 보수라는 의미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그냥 얼치기 주사파운동권 출신 수구좌파 반동들이 자칭하며 억지쓰는 진보라는 개념에 밀려서, 어쩌면 정말 진보로 분류되어야 할 사람들도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떠밀려서 보수가 되어버린 세상이 되었다. 인간의 영혼을 상실한 “면후심흑(面厚心黑 얼굴의 두께는 성벽만큼 두텁고 심장은 숯처럼 새까만 얼치기 좌파악령)”들이 인간의 양심과 소양을 가진 모든 대한민국 시민들을 저주받은 보수라는 악의적 프레임으로 몰아넣고 조롱하고 있는 그야말로 <아수라>판이 된 것이다. 사실 보수주의란 말이 제대로 형용되려면, 영국처럼 그 사회의 근저에 귀족적인 또는 봉건적인 유산이 현대에도 남아있어서, 그 자양분이 보수사회라는 공동체를 지원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는 이런 자양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일제 36년간의 식민통치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대한민국은 2차대전 이후 독립한 신생국중 유일하게 자유민주주의로의 건국과 산업화의 기적을 이루어 내었다. 그리고 건국과 산업화의 주력들은 자유를 주축으로 혁신과 실용, 능률과 실
2022년 3·9대선은 윤석열 또는 이재명이라는 새로운 지도자를 선출하는 차원을 넘어 헌법이 규정한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운명을 결정하는 선거라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의 정초선거(foundation election)라고 할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탄핵이라는 헌정 초유의 사태와 그 여세를 몰아 이른바 ‘촛불’의 거대한 바람으로 당선된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공언했었다. 그리고 20대 대선을 목전에 두고 대한민국 19대 대통령 문재인의 약속은 실현되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문재인 대통령은 “사람이 먼저다”라는 슬로건으로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남북관계, 외교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속도전으로 ‘사람’ 중심의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들었다. ‘사람(man)’이라는 암호(code)는 기본적으로 문재인 정권을 지지하는 사람을 의미하며, 근현대 정치사에서 주권과 인권을 가진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으로서 국민(nation)과는 구분되는 자연 그대로의 생명과 삶을 영위하는 존재다. 나아가 해방 후 건국, 산업화, 그리고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위대한 대한민국의 국민과 전 세계 유일 세습전체주의 독재체제 북한
나라 밖에서 중공이 ‘국뽕’ 올림픽 난장판으로 우리는 물론 세계적으로 공분을 불러일으키는 가운데서도 3·9대선은 이미 투표가 시작됐다. 돌이켜 보면, 탄핵 난동 이후 지난 5년여는 참기 힘들고 분노스러운 상황의 연속이었다. 그럼에도 시원한 상황 타개는 여의치 않았다. 문 정권 패거리들은 180석에 달하는 초유의 의석을 휩쓸고 기세를 부렸다. 그러자 “한번 망해봐야 정신 차린다”는 말들도 심심찮게 나오곤 했다. 다가오는 3·9대선을 앞두고도 그렇게 내뱉는 이들도 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에 분노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윤석열 후보는 마땅치 않을 수 있다. 더러는 이재명이나 윤석열이나 마찬가지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한번 망해봐야”는 없다. 그냥 망하면 끝이다. “한번 망해봐야”는 없다. 그냥 망하는 것으로 끝이다. 기나긴 인류 문명의 차원에서도 그렇지만, 한 국가의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 폐허에서 일어서는 것은 어렵지만, 할 수 있다. 대한민국은 그것을 증명했다. 그러나 성취했던 문명이 망한 뒤 다시 정신 차리고 일어선 경우는 없다. 말로야 내뱉을 수 있지만, 그것으로 끝이다. 역사는 성취했다 망해버린 문명이 다시 일어서
20대 대선은 역대 대선 중 가장 비호감 후보에 네거티브로 일관하고 있다는 부정적 평가가 일반적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왜 정책대결은 사라지고, 거대 담론은 실종된 채 오로지 인물간 네거티브로 시종하고 있는 것일까? 선거는 구도, 정책, 인물의 대결로 치러진다. 기본적 정치지형 위에서 현재적 갈등이 드러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정당간 정책 경쟁이 이루어지며, 인물 간 대립구도가 형성되는 것이다. 문제는 문정권과 여당이 정책대결을 가로막고 있다는 데 있다. 기본적 현안과 갈등구조가 드러나고 이를 시정할 정책 대결을 하면 결정적으로 불리해지기 때문이다. 문정권 5년은 거짓과 실패로 범벅되어 있다. 법치주의가 무너지고 의회민주주의가 일탈하였고, 위헌적 법률이 양산되었다. 북한의 핵개발은 좌시한 채 종전선언 등 엉뚱한 평화놀음에 매달리면서 북한과 중국에 굴종적 외교로 일관한 결과, 국가안보는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다. 경제적으로는 경쟁력 추락은 말할 것도 없고, 부동산과 물가 폭등 그리고 청년실업 문제를 비롯하여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국정 전반에서 걸쳐 총체적 부실과 혼란을 맞고 있다. 이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fact)이다. 혹자는 임기말 40%선을 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