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보일러 좀 꺼 주세요!”... 하늘을 향한 ‘간절한 기도’(?)가 넘쳐나고 있단다. 불볕더위가 당분간 계속될 거라는 예보가 들린다. 이런 가운데... ‘50억 클럽’, ‘돈 봉투’, ‘교권 흔들’, ‘순살 아파트’, ‘개(犬)네 가죽신(革신) 장사치’ 등등이 우리네 마음을 더욱 후덥지근하게 만들고 있다. 특히나... 서울 신림역과 분당 서현역의 흉기 난동 사건에 이어 4일에는 대전의 한 고교 내에서 교사가 피습당하고,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에서는 흉기를 들고 다니던 남성이 체포되는 등 강력 범죄가 잇따라 발생하고 있다. ‘묻지 마 칼부림’, ‘흉기 난동’이 빈발한다. 엄습하는 불안감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말마따나 “사실상 테러 행위”라는 표현이 적확했다. 범행을 저지른 작자들은 넓은 범위에서 ‘미친X’이 맞다. 그리고 웬만해서는 검거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서현역 흉기 난동 사건’이 일어난 뒤 (8월)3~4일 인터넷에는 “칼부림이 일어났다”는 가짜 뉴스가 유포됐다... 무차별 흉기 난동을 예고한 ‘살인 예고 글’도 20건 넘게 올라왔다... 경찰은 살인 예고 장소로 명시된 곳에 인원을 투입했고, 일부에선 밤샘 수색 작업이 벌어졌다...
프랑스혁명은 시민혁명이었다. 혁명을 이끌었던 자코뱅당은 시민이 되는 조건을 조세 의무에 두었다. 혁명의 실질적 목적은 거창한 자유, 평등, 박애 정신보다는 상위계급이었던 성직자와 귀족들로부터 상공인 개인의 사유재산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프랑스혁명 당시 사회적 신분계급은 성직자, 귀족, 평민 등 세분류로 통상 구분되었지만, 정치적으로는 국민(Nation), 경제적으로는 부르주아 유산자로 불렸던 시민과 정치적으로 인민 (People), 경제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 무산자로 불린 천민 등, 4계급으로 존재했다. 근대국가발전과정에서 사회통합과 참여권이 확대되면서 천민계급이었던 인민(People)도 국민개념(Nation)에 함께 포함되어졌다. 결국 인민이 국민이 되면서 문제가 증폭되기 시작했다. 루소 (J.J. Rousseau)의 일반의지 (General Will)라는 철학적 화두와 함께, 단시간에 유명해진 국민개념(Nation)도 사실 프랑스 시골 지방에서 동창회나 사교모임같은 친목단체의 이름으로 존재했었다. 그러다가 혁명이후 갑자기 국민 또는 국가라는 개념으로까지 발전되었다. 일본의 명치철학자 후쿠자와가 Nation의 한자어 번역을 가장 어렵게 여겼듯이, 아직도 Na
1969년 국토통일원에서 출발하여 1998년 DJ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지금의 통일부로 운영되고 있다. 기능을 보면 19부 19청으로 조직이 구성되어있으나, 사실은 정부 기구로서의 규모나 역할은 한계에 다다랐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속한 부속기관 또한 통일연구원과 통일교육원 등이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애시당초 통일부의 설립 목적은 남북 대화와 교류 협력 그리고 통일교육에 있었다. 그렇지만 박근혜 정부에 와서 교류는 단절되었고, 문재인 정부가 체결한 판문점 협약마저도 지켜지지 않음에도 북한측은 우리가 바라는 기대조차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우리가 건설하고 설비한 수천억원의 재산마저 몰수하고, 파괴하는 저들의 행동이야 말로 우리가 바라는 평화적 협력과 통일보다도 오히려 북한 김씨 가문의 몰락으로 이루어지는 통일을 대비하는 통일 관련 기관이 더욱 필요할지 모르겠다. 문재인 정부 시절처럼 100억이란 거액의 예산을 민간단체들에게 막무가내로 집행하고도 소대가리 냉면이 목구멍에 넘어갑니까라는 쌍소리를 들었지 않은가? 단도직입적으로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하였기에 국민은 가슴 쓰린 기억만 하고 있다. 한마디로 김정은과 그의 측근들에게 눈치 봐가며 퍼주기만 하는 필요 이
이 땅 ‘만악(萬惡)의 근원(根源)’인 그 전범(戰犯)의 불장난이 시작되고 1129일 째 되는 날... 오전 10시를 기해 모든 전선(戰線)에서 포성이 멎었다. 그러나... “통일목표는 기어코 성취되고야 말 것” ‘북진통일’(北進統一)을 주장하며 정전협정(停戰協定) 조인(調印)을 강하게 반대했던 이승만 대통령의 입장은 단호했다. 70년이 흘렀다. 대한민국이 선택한 자유민주주의와 북한의 공산주의라는 체제가 70년 세월의 운명을 갈랐다... 정전협정 이후 남북한은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자유 진영의 도움으로 공산화의 위기에서 벗어난 대한민국은 폐허를 딛고 번영을 이뤘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치면서 세계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나라가 됐다. 경제적으로는 세계 최빈국에서 10위권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다... 반면 북한은 고립을 택했고, 공산권 몰락 이후에는 고립이 더욱 심화했다. ‘3대 세습’이라는 반문명적 권력 체계가 수십년간 이어지면서 주민들은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궁핍에 시달리고 있다... 어쩌면 상투적(?)이라고 느껴지는 이런 유(類)의 글과 말들을 접하고 있다. 분명한 사실(史實+事實)임에도 이제는 크게 감흥조차 일으키지 못한다. 너무
5천만 국민 중에 별난 사람인 위선자 한 사람이 자기 가족을 다 동원하여 범죄를 기획하였다. 그리고 조작하여 기상천외한 대학입학 비리란 기록을 세우려고 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우리는 복통이 터지라고 소리쳐봤다. 세상을 다 뒤집어 놓고서도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극렬지지자 몇 명을 지지대로 삼아 보려 했으나, 범법 사실이 사필귀정으로 드러나니 뒤늦게 이자가 말하는 소리 들어보소! 나, 祖國이 아니라 曺國은 ‘초심으로 돌아가겠다’고 국민에게 말했다. 그러고는 또 한번 법정을 쑤셔놓겠다고 한다. 대학교수직은 더하고 싶다고 ㅎㅎ. 그래서 어쩌겠다는 것인가? 명색이 대한민국 최고 대학의 법학교수이며 법무부 장관이었던 자가 법치를 무시하는데도 우리는 그저 이해하고 용서하란 말인가? 한동안 대한민국의 수많은 국민들이 조국 당신의 술수에 마취되어 오로지 진영 논리에만 빠져 몸과 마음까지 고통을 받았음도 알진데, 가짜 선비행세를 계속하면서 놀아보겠다는 작정이란 말인가. 자식 가진 부모의 마음인들 좋은 대학 좋은 직업을 갖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있겠냐? 누구나 조국 당신과 똑같을 것인데... 그래도 한 가닥만이라도 정의가 무언지 알고, 이치를 지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현대철학의 문을 열어젖힌 천재 철학자 니체 (Fridrich Nietzsche)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은, 시인, 음악가, 심리학자, 계보학자, 문화비평가, 미학자 등 참으로 다양하다. 니체는 1867년과 1870년 각각 두 번에 걸쳐 지역전쟁과 보불전쟁에 참전했다. 첫 번째 참전당시 입었던 부상은 평생 니체를 괴롭혔던 육체적 고통으로 남았다. 포탄속에서도 철학적 상상력을 더해갔던 니체의 사상은 그래서 그런지 생사를 넘나드는 진솔함과 박진감이 넘쳐난다. 니체의 관점에서 보면, 인류가 배출했다고 일컬어지는 4대 성인인, 예수, 붓다, 소크라테스, 공자는 위선자다. 그 누구도 직접 자신의 사상적 의지를 문자로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어라는 문자의 장벽에 갇히지 않기 위해 제자들이 성인들의 언사를 기록해 후세를 위한 경전을 만들도록 했다. 주어진 관습과 제도에 안일하게 타협하는 나약한 인간의 존재를 부정하고, 삶을 극복하는 동시에 재창조하는 자유정신의 의지를 강조했던 니체는, 초월적 존재를 향한 인간들의 동물적인 허영심, 습관, 나약함, 공포심 등이 신을 죽였다고 말하고 있다. 자신의 물질적 삶에 반해버린 나태한 인간들에게 판도라 상자 속에 남아있는 희망이야말로
중국의 외교부 장관인 친강(秦剛) 외교부장이 지난 6월 25일 북경에서 베트남과 스리랑카 외교부 장관을 만나고, 러시아 외교차관을 만나는 활동을 끝으로 오늘 7월 18일까지 23일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잠적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 7월 14일 중국정치분석 41번째 영상으로 이미 친강의 스캔들 설(說)을 보도했는데. 추가 소식을 전한다. 친강의 잠적에 대해 몇 가지 설이 있었다. 첫째, 코로나 확진설은 이미 잠적한 시간이 23일째이므로, 격리기간과 회복기간이 모두 지났다고 봐야 하기 때문에 아닌 것으로 볼 수 있다. 둘째, 와병설인데, 만약 와병설이라면, 격무에 시달린 모습을 오히려 선전·선동에 이용하기 위해서라도 병상 인터뷰라든지 뭐 이런 형태로 항간에 나도는 각종 루머를 잠재울 수 있다. 공산당이 이걸 하지 않는 걸 보면 단순 와병설은 아닌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셋째, 간첩설이다. 작년 10월 중국의 로켓군 부대의 위치와 미사일 종류, 주요 간부의 인적사항 등이 포함된 보고서가 미국에서 발표되었는데, 이 민감한 정보가 미국으로 흘러들어가는 과정에서 당시 주미대사였던 친강도 연루되었을 것이라는 거다. 넷째, 스캔들 설(說)이다. 필자가 유튜브를 통해 7월
지난 세기 말... 이 나라 대학가의 여름방학이 시작되면, 인천(仁川) 부둣가에서 인구(人口)에 널리 회자(膾炙) 되던 전설(?)이 있었다. 청바지와 통기타, 그리고 긴급조치와 장발(長髮) 단속이 한창이던 1970년대 말의 어느 여름날... 서해(西海)의 아무개 섬을 향해 인천(仁川) 연안부두를 떠난 정기여객선이 30분 남짓 파도를 가르고 있었다. 여객선 뱃머리에는 여름방학을 맞은 서울의 아무개 대학 써클[동아리] 회원들이 모여 앉아 노래를 부른다. “조개껍질 묶어 그녀의 목에 걸고, 불가에 마주 앉아....” 통기타와 노랫소리가 시원한 바닷바람에 한참 어울리는 순간, 갑자기 배가 덜컹하더니 뱃전에 앉았던 여학생 하나가 물속에 ‘풍덩’ 빠졌다. 당황한 대학생들이 승객들을 향해 소리친다. “사람 살려! 사람이 바다에 빠졌어요!” 뱃전과 객실의 승객들이 거의 모두 모이고 뛰쳐나왔다. 동승한 경찰·군인도 있었고, 승무원들도 뱃머리로 달려왔다. 급기야 선장(船長)까지도... 그리고는 바닷물에서 허우적거리는 여학생을 향해 고함을 지른다. 너도나도, 여기저기서... “헤엄을 쳐!” “팔을 힘차게 저어!” “다리로 물을 차란 말야!” 얼마나 지났을까. 그 여학생이 몇 번
대한민국의 건국정신은 자유민주주의이다. 그것은 대한민국 국가정체성의 본질이요 우리가 누리고 구가해온 체제의 기반이다. ‘인류가 만들어 낼 수 있는 최선의 제도’라고 칭송되어온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수많은 체제전복의 도전 앞에서도 우리는 끈질긴 극복의 길을 꿋꿋이 걸어왔다. 대한민국은 2차 세계대전 후 독립한 국가 중 유일하게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선택했던 국가이다. 이조 왕조체제와 식민지배 체제를 넘어 8·15광복 후 아무것도 없던 황무지에 누가 이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접목할 수 있었던가? 이승만이라는 영웅이 없었다면 과연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 대한민국이 존재했겠는가? 민족통일에 대한 열망이 상황을 혼미하게 하던 시대적 상황에서 1946. 6.3. 전라북도 정읍에서 이승만의 고뇌에 찬 발언은 가히 한반도 역사에 혁명적 전기를 이루는 순간이었고, 통일부장관 후보자 김영호 교수는 이것을 ‘이승만 독트린(doctrine)’이라고 규정했다. 불확실한 국제정치의 소용돌이 속에 공산주의자들의 속셈을 꿰뚫어본 고독한 국가 건설자 이승만이 남한만이라도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구축해야겠다는 벼랑 끝 선택에 대한 확고한 가치의 공감이었다. 해방후 문맹율 80%로 세계 최빈국
이성적 합리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남북이 쉽게 합쳐질 수 없다는 현실을 당연시 한다. 6.25전쟁이후 70년이 넘는 적대관계,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세습 전체주의라는 이질적 체제, 북한경제의 50배가 넘는 대한민국의 경제력, 북․중․러 북방 삼각관계와 한중일 해양 삼각관계, 북중동맹과 한미동맹, 개별국가로 가입된 유엔회원국, 변치 않는 북의 대남 전복전, 북한 핵과 미사일 도발로 인한 평화위협 등등 눈앞에 나타난 현실만 보더라도, 남북간 특수관계는 몽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북한의 대남전략은 우리민족끼리 또는 민족은 하나 등과 같이 남북의 혈족적 민족관계를 강조하며 배타적 자주성을 주장해 왔다. 그 연장에서 미 제국주의 식민지인 남조선 괴뢰정부라는 표현으로 굳어졌었다. 그랬던 북한당국이 드디어 대한민국이란 단어를 처음 사용했다. <대한민국> 합동참모본부, <대한민국> 족속들이란 표현속에서 민족관계가 아닌 이웃한 개별국가로서 대한민국에 대한 적개심을 표출했다. 결과적으로 지금까지 종북, 종중 기조를 유지해오며 대한민국 체제소멸에 매진해왔던 세력들이 아노미 상태가 되었음직하다. 북한과 연계된 지하정치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간혹은 마찬가지일 것 같지만 마찬가지가 아닌 사람을 만난다. 첫 번째는 주인이면서 주인이 아닌 것처럼, 겸손하게 타인을 존중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주인이 아니면서 주인인 것처럼 당당하게 요구만하며 불손하게 타인을 무시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첫 번째 부류의 사람은 주인의식으로 행동이 방정(方正)하지만, 두 번째 부류의 사람은 주인행세로 행동이 방정맞다. 특히 일부 정치인과 고위공직자는 주인의식을 갖고 자신의 본분을 방정하게 행하기보다, 주인행세를 하며 자신의 본분을 방종(放縱)하게 행하는 경우가 허다하게 있다. 이런 사회는 겉으로는 멀쩡한 듯이 보이지만 속은 썩어서 언제인지는 몰라도 무너지기 마련이다. 어느 나라에서나 마찬가지이겠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직업에 따라서는 그 의무를 다 할 것을 서약한다. 하지만 의무를 다할 것을 서약하고서도 실제의 현실에서는 직업윤리마저 팽개쳐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특히, 여타의 나라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서도 정치인인 국회의원은 국회법에 따라 임기시작과 함께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하여 노력하며, 국가이익을 우선으로 하여 국회의원의
신성로마제국에서 벌어졌던 신, 구교간 30년 전쟁과 네덜란드 독립전쟁이 천신만고 끝에 마무리되었던 1648년 웨스트팔렌(Westfalen)조약은 최초의 근대적 국제협약이었다. 총 16개국가와 66개 제후국에서 135명의 대표자들이 모여 오랜 기간 동안 회의를 통해 국가의 의무와 권리를 규정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군주 또는 제후국의 영토주권과 외교주권을 인정함으로써 근대 주권국가의 길을 열었고, 주권국가를 주요 행위자로 하는 국제정치의 기원점이 되었다. 시민전쟁과 청교도 혁명을 거쳐 명예혁명으로 입헌군주국이 된 영국은, 유럽에서 제일 먼저 산업혁명에 성공해 제국주의를 통한 해외 식민지 건설에 나섰다. 해상무역의 발전과 기차의 발명으로 국가간 교역이 늘어나자, 국경선을 넘어 국가간 이동을 증명해 줄 수 있는 여권 (Passport)제도가 생겨났다. 불과 150여년 전이다. 제국주의 과도경쟁 속에서 대폭 늘어난 전쟁행위는, 강대국의 국익창출을 위한 최상의 도구가 되었다. 그래서 국가마다 앞다투어 전쟁부(Ministry of War)를 창설했다. 그러나 과도한 전쟁발발로 인한 인명피해를 막고, 안정적인 식민지 경영을 도모하기 위해 서구 문명국간 국제공법의 필요성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