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장 위구르족과 중공간 대립의 뿌리

- 달라도 너무 다른 위구르족과 한족, 공산 치하 공존 더욱 힘들어
- 인권침해, 자원탈취, 대규모 핵실험까지...위구르족 막대한 피해
- 위구르족의 끝없는 독립운동, 동투르키스탄 망명정부도 세워

 

 

신장은 옛부터 서역으로 불리며, 종족 구성이 복잡해서 수천년동안 중원과의 관계가 끊어졌다 이어졌다를 반복했다. 한편 신장에는 석유, 천연가스, 석탄 등 자원 매장량이 매우 풍부하다.

 

신장 문제는 인구가 가장 많은 위구르민족과 중국 공산당 사이의 갈등(정치 군사적 충돌)을 중심으로 시작됐다. 19세기말 투르키스탄의 독립을 추진하던 신장 독립운동은 공산당의 통치를 받고 있는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가고 있다.

 

중국 공산당이 신장을 통치한 후, 1950년대부터 70년대까지의 중공정부가 지원한 대규모 한족의 신장 이전, 위구르인의 한족화(문화침략) 촉진, 위구르족의 신분을 가진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징벌하는 정부정책(자원 약탈 및 인권침해, 종교적 제한) 등이 있어 위구르족과 지방정부, 한족 사이의 긴장관계를 초래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공산당 총서기 집권 이후, 정부 정책의 특징은 재교육영(再敎育營,교화세뇌)으로 수십만~수백만 위구르인과 기타 무슬림 소수민족이 포함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1949년 공산당의 신장(新疆) 통치 이후 강도 높은 탄압 정책이 시작되면서 신장(新疆) 북부와 남부에서 왕전(王震) 중공군 상장이 반란군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고 1953년에야 겨우 수습했다. 왕진(王震)은 "신장(新疆)을 50년간 무찌른다고 해서 혁명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고 했다.

 

살인이 너무 많아 신장 사람들이 어린아이가 우는 것을 막는 방법 중 하나가 '왕진이 온다'고 겁주는 것이라고 한다. 독일로 망명한 위구르인 딜리샤티 씨는 그런 상황이 있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는 당시 신장위구르인들의 사망자가 매우 많았다고 전했다.

 

이어 "공산당이 현지에 들어가 무장탄압을 하다가 저항하자 군사탄압을 가해 많은 사람을 사살했다"고 덧붙였다.

 

1960년 중소 관계가 결렬된 후, 소련은 신장(新疆) 지역 위구르인을 지지하고, 원래 이리 민족군 장성이었던 주농(祖農) 타이야바오푸(太野保夫)를 책동하는 데 성공했으며, 1960년대 말 티쿠르반(thekuleban), 니아쯔쯔 우바이얼(waibale), 스마이불라음하스무파르샤(simpazaza) 등에 의해 전강권 내에 독립된 동투르키스탄 인민혁명당(人民혁명당)이 조직되었다.

 

1969년 8월 20일, 메게티현의 위구르인들이 현의 민병 무기고를 털었다. 국경으로 향하던 중 중국 공안에 포위돼 총기와 탄약, 기타 흉기가 노획됐다.아호노프 등 10명은 총살당하고 나머지는 모두 검거됐다.

 

문화적으로는 위구르족 특유의 문화가 전파됐고, 이 시기 독립사조는 강의, 프레젠테이션, 저서, 글쓰기 등을 통해 전파됐다.위구르인 흉노간사 위구르 고대문학이 유명하다.

 

1992년에는 터키 퇴역 장교 리사 벳킨을 중심으로 이스탄불에서 '동투르키스탄 민족대회'를 개최했다.

 

 

1996년 매바이티민 아이쯔레티는 터키에 동투르키스탄 해방조직을 창설한 바 있는데, 이는 무장군사적 수단을 통해 신장(新疆)에 동투르키스탄을 건설할 목적이었다.

 

해방군은 2001년 8월 13일 신장(新疆) 카슈~아투시(아르투시) 간 군사 실탄 훈련을 실시했다.같은 달, 공안원들이 쿠처현 우존 향의 시코네슈가티 마을을 수색하던 중, 깊이가 4미터인 갱도를 발견하고, 무기와 탄약을 제조하는 각종 설비 및 폭발장치 61기를 압수하였다.

 

2004년 4월 16일, 동투르키스탄 민족대회와 세계위구르 청년대표대회는 독일 뮌헨시에서 새로운 단일 조직인 세계위구르회의로 통합되었다. 동투르키스탄 망명정부는 이미 같은 달 14일 미국 워싱턴에서 수립됐다.

 

2005년 9월 29일 동투르키스탄 해방기구는 위구르어로 녹화 방송된 뒤 모든 수단을 동원해 중공군을 상대로 무장전쟁 개시를 선언했다.

 

2009년 7·5사건은 신장(新疆)의 수도 우루무치( 乌)에서 발생한 폭력사태로 192명이 사망하고 721명이 다쳤다. 공안당국이 발표한 43건의 인권관찰보고서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난동 이후 수일 동안 위구르인들이 행동에 나서던 중 실종됐는데도, 이 사람들에 대해 대규모 은폐시도가 있었던 흔적이 남아 있다. 따라서 실제 실종자는 훨씬 많을 것으로 보고 있다.

 

2013년 4월 23일 신장 카슈바추(新疆)현에서 한 공안이 위구르족 청년 1명을 총으로 쏴 숨지게 하는 충돌이 벌어져 15명의 공안이 숨졌고 위구르인은 6명이 목숨을 잃었다.

 

중공정부는 신장(新疆) 위구르 자치구 누란(樓蘭) 인근에 32년간 46차례의 핵실험까지 실시해, 2천만톤의 폭발을 일으켜 인근 주민들에게 막대한 건강 피해와 환경오염을 끼쳤다. 최대 핵실험은 한때 4백만 톤에 달했고, 폭발력은 구소련 핵실험의 10배에 달했다. 중공 내부 문건에 따르면 129만명이 방사능에 노출됐고, 이중 75만명이 사망했다.

 

 

 

영국 BBC는 2002년 9월 27일 리뷰에서 "중국 공산당은 신장에 대한 식민주의를 채택하고, 자연자원을 대량 채굴하고 한족 이민자를 수입했으며, 이에 대해 위구르 민족주의자들은 전혀 독립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헌법상 민족 자치권과 본토의 종교적 자유 수호, 반핵 실험 반오염을 요구한다"고 주장했다.

 

위구르족은 중화 문명의 언어, 문화, 신앙, 예술과 역사의 궤적 등에 있어 큰 차이가 있다.  중국 공산 치하 후, 신장 현지에서 자원 약탈, 문화 멸절과 종족 멸절, 종교 탄압, 정치적 박해 등의 정책을 실시하여 위구르 민족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한족과 위구르족은 모두 중국 공산당의 폭력 통치의 피해자인 것이다.

 

장 춘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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