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2016년 3월 북한 법정에 끌려가는 웜비어 |
미국 법원이 북한에 억류됐다가 사망한 고(故) 오토 웜비어 유족에게 북한 관련 동결자금 약 260억 원을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북한 정권의 불법 억류와 고문, 사망 책임을 묻기 위한 유족의 장기 법적 투쟁이 또 하나의 실질적 성과를 거둔 것이다.
워싱턴DC 연방지법의 베릴 A. 하웰 판사는 지난 11일 결정문을 통해 JP모건 체이스 은행에 동결돼 있던 1천713만1천65.73달러, 우리 돈 약 260억 원 규모의 자산을 웜비어의 부모인 프레드·신디 웜비어 부부에게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이번 결정의 핵심은 해당 자금이 단순한 민간 금융거래 자금이 아니라 북한의 핵무기 개발과 밀접하게 연결된 파키스탄 핵 과학자 A.Q. 칸 네트워크 관련 자산이라는 점이다.
웜비어 유족은 이 자금이 북한 핵개발을 지원한 칸 네트워크와 관련돼 있으며, 북한 정권의 대리 또는 대행기관 성격을 가진 자산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법원은 이 같은 주장을 받아들였다. 하웰 판사는 결정문에서 A.Q. 칸 네트워크가 북한의 “대리인 또는 대행기관” 역할을 했다고 판단하고, 원고 측이 해당 동결자금의 실질적 송금자가 칸 네트워크였다는 점을 입증했다고 평가했다.
이는 북한 정권이 국제 금융망과 제3국 네트워크를 활용해 핵개발과 제재 회피를 시도해왔다는 의혹에 대해 미국 법원이 실체적 책임을 인정한 의미 있는 결정으로 해석된다.
오토 웜비어는 2016년 관광 목적으로 북한을 방문했다가 체제전복 혐의로 체포돼 15년 노동교화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17개월 동안 억류됐고, 2017년 6월 혼수상태로 미국에 송환됐으나 귀국 엿새 만에 숨졌다. 북한은 그의 사망 책임을 부인했지만, 미국 사회는 이 사건을 북한 정권의 반인도적 억류와 고문, 인권유린의 상징으로 받아들였다.
웜비어 유족은 아들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해 2018년 북한 정권을 상대로 워싱턴DC 연방지법에 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북한의 책임을 인정하고 5억 달러 규모의 손해배상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북한 정권이 판결을 이행할 가능성은 사실상 없었기 때문에, 유족은 이후 전 세계에 흩어진 북한 관련 자산을 추적하며 배상 집행 절차를 이어왔다.
이번 판결은 그 연장선상에 있다. 웜비어 유족은 앞서 유엔 제재 위반 혐의로 미국 정부가 압류한 북한 선박의 매각 대금 일부, 뉴욕주 당국이 압류한 북한 동결자금 24만 달러, 뉴욕멜론은행에 예치된 북한 관련 자산 약 220만 달러 등에 대해서도 권리를 인정받은 바 있다.
이번 지급 명령은 단순한 금전 배상의 차원을 넘어선다. 북한 정권이 해외 금융망과 불법 네트워크를 통해 축적하거나 이전한 자금이 피해자 배상에 사용될 수 있다는 선례를 다시 확인한 것이다. 특히 북한의 핵개발 조력 네트워크와 관련된 자금이 피해자 유족에게 귀속된다는 점에서, 대북제재 집행과 인권 책임 추궁이 결합된 사례로 평가된다.
북한 정권은 오랜 기간 납치, 억류, 강제노동, 핵개발, 제재 회피를 통해 국제사회의 규범을 위반해왔다. 그러나 이번 판결은 그러한 범죄적 행위가 시간이 지나도 면책될 수 없으며, 피해자와 유족이 국제 금융·사법 체계를 통해 끝까지 책임을 물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웜비어 유족의 법적 투쟁은 북한 인권 문제를 단순한 외교 현안이 아니라 구체적 책임과 배상의 문제로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북한 정권이 피해자의 생명을 앗아가고도 침묵과 부인으로 일관한다면,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사법 체계는 그들이 숨겨둔 자산을 찾아내 책임을 묻는 방식으로 응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 결정은 북한 정권에 대한 분명한 경고다. 인권범죄와 핵개발, 제재 회피로 축적된 불법 자산은 영원히 숨겨질 수 없으며, 피해자와 유족의 정의 실현을 위해 사용될 수 있다.
오토 웜비어의 죽음은 여전히 끝나지 않은 사건이며, 그의 부모가 이어가는 법적 투쟁은 북한 정권의 책임을 국제사회가 결코 잊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안·희·숙 <취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