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사추세츠주의 배심원단이 운동용 밴드로 어린 세 자녀의 목을 졸라 살해한 린지 클랜시에게 유죄 평결을 내리지 못하자, 한 친구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내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그는 “이건 여성판 O. J. 심슨 재판이군”이라고 비꼬았다.
나는 그가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이해했다. 배심원단은 여성 아홉 명과 남성 세 명으로 구성되었는데, 그중 상당수는 법원을 나와 유유히 텔레비전 스튜디오로 향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클랜시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죄를 선고받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여성이므로 본래 선하며, 같은 여성들의 자매애 어린 동정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이었다.
끝까지 다른 의견을 고수한 단 한 사람은 생각이 달랐다. 그는 진보적인 상투어보다 사실에 더 관심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사실이 말해 주는 이야기는 단순하다. 클랜시는 정신건강 전문가들의 진료를 자주 받았으며, 살인 전날에도 진료를 받았다. 그러나 정신병적 장애를 진단받은 적은 없었다. 그녀는 남편의 방해 없이 아이들을 죽일 만큼 충분한 시간을 아이들과 단둘이 보낼 수 있으리라고 계산하고, 남편을 심부름시켜 내보냈다. 그런 다음 아이들을 한 명씩 차례로 살해했다.
이 사실들은 듣는 것만으로도 괴롭다. 그러나 이 사건을 우리 시대의 가장 참혹하면서도 중요한 이야기 가운데 하나로 만드는 것은 재판을 둘러싼 더 넓은 맥락이다. 클랜시는 혼자서 자녀들을 죽였지만, 범행 이후에는, 그리고 어쩌면 범행 이전에도, 어떤 문화의 뒷받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지난 40년 동안 그 문화는 우리가 공유하는 도덕의식을 악마적으로 타락시키고, 선을 조롱하는 한편 악을 덕스럽고 세련된 것으로 묘사했으며,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관한 우리의 근본적인 이해에 도전해 왔다.
내가 말하는 것은 분홍색 옷을 입고 나타나 클랜시를 위한 모금 운동에 거액을 기부하고, 아무런 증거도 없이 진짜 살인자는 클랜시의 남편 패트릭이라고 주장한 수천 명의 흉측한 여자들만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그 유해한 이념을 환호하며 지지하고 그 혜택을 누린 수백만 명의 미국 여성들이다. 그 이념은 결국 매사추세츠주에 있는 클랜시 부부의 집에서 필연적인 귀결에 이르렀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조금이라도 주의를 기울였다면, 이런 유독한 분위기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대학 기숙사 방을 “미래는 여성의 것이다” 또는 “가부장제를 타도하라”라고 적힌 작고 아기자기한 표지판으로 꾸미는 젊은 여성들, 남성은 어리숙한 얼간이로, 여성은 지혜롭고 신의 있으며 덕스러운 존재로 그리는 끝없는 텔레비전 프로그램과 영화들, “여성의 권리는 인권이다”라는 동어반복적인 구호를 고함치는 정장 차림의 정치인들 말이다.
마치 제정신인 누군가가 여성은 다른 종에 속한다고 주장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마침내 낙태를 우리 시대의 위대한 도덕적 성전으로, 여성들이 다른 모든 것에 앞서 단결하고 결집하여 싸워 지켜야 할 단 하나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로 떠받드는 일이 있다.
이러한 생각들은 너무나 널리 퍼지고 지배적인 것이 되어, 때로는 그것들이 본래 지닌 이념적 독성을 알아보기조차 어렵다. 대학에 다니거나, 스트리밍으로 프로그램을 시청하거나, 현대 대중문화를 접한다면, 그것들은 그저 우리가 들이마시는 공기와 같다. 그리고 클랜시의 재판에서 섬뜩할 만큼 분명하게 드러났듯이, 이 유해한 생각들은 두 가지 괴물 같은 거짓말을 낳았다. 너무 오랫동안 이 거짓말들은 반박할 수 없는 진실인 양 통용되어 왔다.
첫 번째는 몸을 지닌 존재로서의 인간에 관한 것이다. 지난 10년 동안의 가장 큰 악들, 곧 낙태와 트랜스젠더주의, 안락사를 하나로 묶는 실이 있다. 이들을 관통하는 공통의 기획은 성경의 인간관을 상대로 벌이는 음울하고 집요한 전쟁이다. 성경에 따르면 인간은 몸을 지닌 존재이며, 정신과 마음뿐 아니라 창조주께서 자신을 위해 빚어 주신 몸을 통해서도 세상을 경험한다.
급진적 진보주의자들은 무엇보다도 몸을 지닌 존재라는 고귀한 현실과, 그 현실이 정당하게 요구하는 존중과 보호를 두려워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으로 이를 공격한다. 그들은 모태 속 아기가 여성이 관리해야 할 하나의 ‘의학적 상태’일 뿐이라고 주장하며, 여성이 자라고 있는 생명을 마음대로 끝낼 수 있도록 한다. 그들은 젠더가 유동적이며, 재미와 이익을 위해 선택하고 바꿀 수 있다는 주장을 내세운다.
몸을 지닌 인간에 대한 이와 동일한 진보주의적 이념의 공격은, 오직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신성한 생명을 끝내기로 선택하는 데 존엄이 있다는 생각을 설파한다. 이것들은 모두 같은 거짓말이 서로 다르게 드러난 모습이다. 곧 우리는 육신을 초월하고, 그때그때 선택하는 정체성에 따라 형성되는, 일정한 형체 없는 추상적 존재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육신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체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형이상학적·영적 가증스러움에 해당한다. 그리고 스스로 우리보다 우월하다고 자처하는 이들은 그에 걸맞은 왜곡된 정의 이론을 만들어 냈다. 여기서 우리는 두 번째 거짓말에 이른다. 그 핵심 생각은 비뚤어진 만큼이나 단순하다.
우리는 동료 시민들을 인격의 됨됨이가 아니라 피부색과 생식기관, 성적 선호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여성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특별한 배려를 받을 권리가 있다. 심지어 중대한 범죄에 대한 처벌을 면제받는 데까지 이른다. 다른 어떤 자격 요건도 필요하지 않다.
내가 심술궂게 군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여성주의자들이 즐겨 쓰는 말을 빌려, 여성혐오적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린지 클랜시는 잠시 제쳐 두겠다. 미국 노동통계국의 2026년 8월 자료를 제시하겠다. 그달 미국 경제에는 신규 일자리 16만 2,000개가 생겼다. 그 가운데 15만 8,000개, 곧 98%를 여성이 차지했다.
이 놀라운 결과를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서비스업의 채용이 급증했고, 그런 일자리는 대체로 여성들이 맡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맞는 말일 수 있다. 하지만 98%라니! 나는 더 사악한 원인이 작용하고 있다고 본다. 주로 여성들로 구성된 기업 인사부서가, 주로 여성들로 구성된 대학 캠퍼스에서 형성되고, 주로 여성들로 구성된 언론기관이 확산시키는 이념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그 결과 X염색체 두 개를 지닌 인간을 고용하는 데 무언가 덕스럽고 여성의 힘을 키워 주는 가치가 있다는 편견이 자리 잡고 있다.
젊은 남성들이 누구나 흔히 볼 수 있을 만큼 노골적인 차별에 불만을 제기하면, 그들은 유난히 예민한 사람들로 조롱받으며 자신의 특권부터 돌아보라는 말을 듣는다. 제대로 된 소득을 얻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또래 여성들에게 덜 매력적으로 보인다고 호소하면, ‘인셀’ 같은 모욕적인 이름으로 불린다. 미국에서 연애 상대가 없는 젊은 남성의 수는 지난 25년 동안 무려 50%나 급증했다. 남성은 도무지 숨 돌릴 틈조차 얻지 못하는 반면, 여성은 살인을 저지르고도 처벌을 피할 수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리고 이제 이것은 단순한 비유적 표현이 아니다.
나는 우리의 문화가 이념적 여성주의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에 비탄을 느낀다고 인정한다. 그 여성주의는 너무나 깊이 뿌리내려 이제는 상식으로 통한다. 나는 롤링 스톤스의 노래 「악마에 대한 동정」에 나오는 구절을 떠올리곤 한다. “나는 ‘케네디가 사람들을 죽인 건 누구인가?’라고 외쳤다. / 결국 그것은 너와 나였는데.” 여기에 “클랜시의 아이들을 죽인 것은 누구인가?”를 대신 넣으면, 그 노래는 너무나 음울하게 울려 퍼진다.
그렇게 우리 앞에는 정확히 두 가지 선택이 남는다. 어느 쪽도 그리 보기 좋은 선택은 아니다.
첫 번째이자 더 두려운 선택은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불의를 정당화하는 사회정의에 관한 허튼소리의 행렬을 계속 이어 가는 것이다. 여성들의 자질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그들을 옹호하며, 그들의 죄가 어떠하든 범죄를 용서해 주는 것이다. 낙태가 여러 세대의 여성들을 인간 생명의 가치에 무감각하게 만든 도덕적 부패가 아닌 것처럼 계속 가장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반발이 닥칠 것이다. 그것은 유쾌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이리저리 떠밀리며 대학 교육부터 제대로 된 소득을 얻는 일자리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모든 지표에서 여성에게 뒤처지고 있는 수백만 명의 젊은 남성들은, 자신들의 지극히 정당한 좌절을 터뜨릴 끔찍이 부당한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벌어질 일을 우리 가운데 누구도 반기지 않을 것이다.
두 번째 선택은 더 어렵지만 훨씬 더 자비롭다. 그것은 여성들이 스스로 여성주의라고 부르는 운동이 초래한 모든 것을 정직하고 철저하게 성찰하도록 요구한다. 여성들이 남성과 경건하고 풍요로우며 평화로운 동반자 관계를 이루기를 바라도록 교육받는 대신, 권력을 갈망하도록 교육받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직시하고 책임을 따져 보도록 요구한다. 그것은 회개를 요구하며, 현재 수백만 명의 미국 여성들이 옳다고 여길 뿐 아니라, 더 심각하게는 자연스럽다고까지 여기는 파괴적인 생각과 행동을 버리도록 요구한다.
오직 여성들만이 이 운동을 이끌 수 있다. 오직 여성들만이 멈추어 서서, 지난 수십 년 동안 자신들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잘못들을 성찰할 수 있다.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클랜시의 집에서 펼쳐지는 것을 목격한 참극은 시작에 불과하리라는 두려운 생각이 든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