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해 전, 나는 이 잡지에 「섬뜩한 이야기들(Grim Tales)」이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당시 나는 어린 딸에게 어떤 책을 읽어주고 어떤 책은 피해야 할지를 고민하며 아동문학의 세계를 새롭게 발견하고 있던 젊은 어머니였다.
나는 그 글에서, 이를테면 디즈니 책으로 각색된 판본이나 지나치게 순화되고 단순화된 현대의 재화(再話)보다는 원래의 동화들, 혹은 적어도 20세기 이전의 전통적인 동화들을 읽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물론 전통 동화들은 언제나 시대와 나라, 문화에 따라 각색되어 왔다. 그림 형제가 이를 글로 옮겨 적기 전까지 이 이야기들은 주로 구전으로 전해졌으며, 이른바 ‘주부들의 이야기’였다.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오스카 와일드 등을 비롯한 많은 작가들은 그림 형제에게서 깊은 영향을 받았고, 이후 자신들만의 동화를 썼다.
이는 W. H. 오든이 “성경 다음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평가한 하나의 문학적 전통을 증언한다. 아인슈타인이 “지적인 아이를 원한다면 동화를 읽어주라. 더 지적인 아이를 원한다면 동화를 더 많이 읽어주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러나 내 딸이 어렸을 당시에는 디즈니 영화를 제외한 거의 모든 전통 동화를 꺼리는 강한 편견이 있었다. 그런 이야기들은 지나치게 ‘무섭고’, 정치적으로도 올바르지 않다고 여겨졌다. 실제로 맨해튼의 사립학교 입학 설명회에 가면, 학교 측은 전통 동화를 피하는 대신 아이들에게 스스로 동화를 쓰게 하되, 적절히 ‘힘을 부여받은 여성’과 ‘독성을 제거한 남성’을 등장시키도록 가르칠 것이라고 학부모들을 안심시키곤 했다.
어린 제이니가 운 좋게 그 신성한 교육기관에 입학하기라도 한다면, 그녀는 시대에 뒤떨어진 가부장적 텍스트들을 다시 쓰고 ‘개선’하느라 바쁠 터였다. 공주가 왕자와 사랑에 빠지는 일이라니, 세상에 그런 일이 있어서야 되겠는가. 그녀에게는 정복해야 할 기업이 있지 않은가.
당시 내가 전통 동화의 ‘퇴출’을 우려했던 가장 큰 이유는 신비와 복합성, 아름다움의 상실이었다. 어린이 교실과 서점에 넘쳐나는 많은 책들은 얄팍하게 위장된 선전물이거나, 평면적이고 보기 흉한 문체로 쓰인 거칠고 어리석은 이야기들이었다. 당시 나는 이렇게 썼다.
“아이들이 책을 읽을 때, 혹은 이야기를 들을 때, 우리가 그들에게 주는 것은 경이로움으로 가득 찬 그들의 마음과 영혼에 걸맞은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동화라는 정전(正典)을 버리는 것이 이보다 더 불길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생각은 당시 내게 미치지 못했다.
이제 세 살배기 손녀라는 축복을 받은 나는 다시 옛 이야기들을 찾아 읽고 있다. 우리는 「빨간 모자」, 「늑대와 일곱 마리 아기 염소」, 「헨젤과 그레텔」, 「백설공주」, 「잠자는 숲속의 공주」, 「신데렐라」, 「룸펠슈틸츠헨」, 「라푼젤」을 비롯한 수많은 이야기를 계속해서 읽고, 다시 연기해 본다. 손녀는 언제나 순진무구한 희생자 역할을 고집하고, 나는 늘 악역을 맡는다.
그리고 나쁜 요정의 저주, 바늘에 찔리는 손가락, 독이 든 사과가 주는 공포보다 손녀를 더 흥분시키는 것은 없다. 그녀를 가장 들뜨게 하는 것은 바로 그 ‘무서운’ 대목들이다. 손녀는 두려움과 마주한 뒤 이야기를 따라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좋아한다.
손녀는 직관적으로 알고 있다. 공포가 없이는 기쁨도 없다는 것을. 할머니의 집에 도착하려면 숲을 지나가야 한다. 사랑을 만나기 전에 백 년을 잠들어 있어야 할 수도 있다. 마녀나 늑대를 이기려면 재빨리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절망 앞에서도 굳세게 버텨야 한다.
동화에서 악은 손에 잡힐 듯 분명한 실재이지만, 언제나 결국 패배한다. 무고한 이는 구원받고 악인은 폭력적인 최후를 맞는다. 정의는 보전되고 질서는 회복된다. 부모는 자녀와 다시 만나고, 처녀는 사랑하는 왕자를 만나며, 모두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산다.
물론 우리 모두가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생에서 언젠가 반드시 악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동화는 바로 그 현실 세계, 곧 공포와 무질서, 이해할 수 없는 잔혹함과 폭력적인 죽음이 존재하는 세계에 대비하도록 우리를 준비시킨다.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는 사악한 늑대와 악한 마녀, 질투심 많은 계모, 탐욕스러운 아버지가 있다. 욕정, 시기, 질투, 탐욕 같은 죄악은 현실에서 그러하듯 동화 속에도 넘쳐난다.
풍요롭고 여러 층위의 의미를 지닌 이 이야기들은 정의와 도덕, 선과 악을 가르치는 탁월한 스승이기도 하다. 숲을 빠져나갈 올바른 길을 찾도록 우리를 도와준다. 이러한 근본적인 텍스트를 빼앗긴 아이들은 악이 너무나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세상에서 방향을 잃고 표류하게 된다. 그리고 오늘날 젊은이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음이 잘 기록되어 있는 우울과 절망, 취약성이 동화의 정전을 버린 것과 어느 정도 관련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어쩌면 이 세대가 어린 시절 늑대나 마녀와 마주했다면 역경에 좀 더 잘 대처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악의 실재와 마주하고 악이 마땅히 파멸하는 모습을 보며 환호했다면, 지금 무고한 이와 죄 있는 이를 올바로 식별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랬다면 이스라엘이 아니라 하마스를 규탄했을지도 모른다. 운동용 밴드로 세 자녀를 목 졸라 죽인 어머니에게 환호하는 대신, 무고하게 죽은 세 아이의 피에 대한 정의를 요구했을지도 모른다. 출산 직전까지 이루어지는 낙태의 끔찍함이나, 경찰도 감옥도 없는 사회라는 발상이 얼마나 광기 어린 것인지 알아보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무고한 이들이 학살되고, 죄 있는 이들은 벌받지 않은 채 남겨진다. 도덕적 질서는 뒤집히고 혼돈이 지배한다.
우리는 늑대를 ‘이해’할 필요가 없다. 늑대는 배를 갈라 제거해야 한다. 마녀에게 불행한 어린 시절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정의는 그 마녀가 화덕 속에서 구워지기를 요구한다. 백설공주의 계모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에게 내려진 운명은 충분히 마땅하다.
“숯불 위에서는 이미 쇠로 만든 신발이 달구어지고 있었다. 집게로 그것을 가져와 그녀 앞에 놓았다. 그녀는 시뻘겋게 달아오른 쇠신을 신어야 했고, 쓰러져 죽을 때까지 춤을 추어야 했다.”
옳고 그름, 선과 악, 희망과 용기, 아름다움과 신비, 기쁨과 웃음, 공포. 이 모든 것이 동화 속에 있다. 동화는 순화될 필요도, 현대식으로 고쳐질 필요도 없다. 있는 그대로 완전하다. 우리가 그것들을 버리는 것은 스스로 위험을 자초하는 일이다.
고전 동화를 다시 불러오는 것만으로 뒤죽박죽이 된 세상에 온전한 이성과 도덕적 분별력을 회복할 수 있을까?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오디세이아』와 마찬가지로, 이 이야기들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인간의 이야기 자체에 속해 있으며, 우리 삶에 의미와 일관성을 부여한다.
각각의 이야기는 우리가 숲을 안전하게 통과하도록 이끄는 빵 부스러기 하나와도 같다. 그것들을 없애버린다면, 우리는 어쩌면 영영 숲에서 빠져나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