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널명: 뉴스홈 > 오피니언 > 종교 기사 제목:

[USA 가톨릭 339] 우리의 기묘한 가톨릭적 순간

2026-05-15 07:53 | 입력 : 리베르타임즈
  • 페이스북 공유
  • 트위터 X 공유
  • 카카오톡 공유
  • 링크 복사
  • 페이스북 공유
  • 트위터 X 공유
  • 카카오톡 공유
  • 링크 복사

매슈 슈미츠 Matthew Schmitz is editor of Compact and a former senior editor of First Things. 『Compact』 편집장


미국 가톨릭은 급격한 쇠퇴 속에 있다. 2000년에는 260만 명의 미국 어린이들이 가톨릭 학교에 다녔다. 2025년에는 그 수가 160만 명에 불과했다. 2001년에는 25만 건이 넘는 가톨릭 혼인이 거행되었으나, 2024년에는 약 10만 7천 건에 그쳤다. 2001년에는 100만 명이 넘는 유아들이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2024년에는 그 수가 50만 명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러한 수치들은 가톨릭교회가 현재보다 훨씬 더 작고 가난해질 미래를 예고한다.

이러한 사실들을 고려할 때, 올봄 성인 개종자들의 급증—그중 상당수는 도시와 대학가의 성당에서 나타났다—에 힘입은 가톨릭 부흥을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현재로서는 개종의 증가 추세가 더 넓은 쇠퇴를 상쇄할 조짐을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가톨릭교회 안에서는 무언가가 꿈틀거리고 있다.

그것은 견진성사를 받고자 하는 성인들의 숫자에서만이 아니라, 가톨릭적 개념들과 인물들이 공적 논쟁의 중심으로 이동한 방식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단순한 가톨릭 쇠퇴나 가톨릭 부흥이라기보다, 우리는 붕괴의 과정이 새로운 무언가의 출현과 함께 진행되는 가톨릭적 격동의 시기에 들어선 듯하다.

이 격동은 트럼프 2기 동안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지난해, 취임식 직후 JD 밴스 부통령은 X에서 한 논쟁 상대에게 “ordo amoris를 검색해 보라”고 말했다. 이는 사랑의 질서, 곧 우리는 다른 사람의 자녀들보다 자신의 자녀들에게 더 큰 의무를 지니며, 지구 반대편의 마을보다 자신의 마을에 더 큰 의무를 지닌다는 사상을 가리키는 가톨릭 신학 용어이다.

그는 이민 정책의 맥락에서 밴스가 신학을 끌어들인 것을 비판했던 전 영국 관료 로리 스튜어트에게 응답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가톨릭 신학은 서로 다른 두 나라와 서로 다른 정치적 관점을 대표하는 인물들 사이의 논쟁 조건을 설정했다. 보수 성향의 밴스는 가톨릭 신자이고, 보다 자유주의적인 스튜어트는 그렇지 않다. 그러나 그러한 차이는 논쟁이 전개되는 방식에 별다른 차이를 만들지 않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밴스의 해당 용어 사용을 비판하자, 스튜어트는 교황의 권위를 원용했다. 미국과 영국은 역사적으로 교황이 정치에 관여하는 것에 대해 오랜 불안을 지녀 온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이다. 그러나 2025년, 역사적 프로테스탄티즘은 어떤 문제를 로마에 조회하는데 장애물이 되지 않았다.

비슷한 역학은 ‘에픽 퓨리 작전’ 기간에도 나타났다. 프란치스코의 후임자인 교황 레오 14세는 트럼프 행정부의 대이란 군사 작전에 대해 반복적으로 반대 목소리를 냈다. 이에 대해 밴스는 교회의 “천 년에 걸친 정전론 전통”을 언급하며, 어떤 전쟁은 정의로울 수 있고, 한 정치 지도자는 이 특정 전쟁이 그러한지에 관해 교황과 합리적으로 견해를 달리할 수 있다고 시사했다.

그의 발언은 미국 가톨릭 주교회의의 질책을 불러왔다. 주교회의는 교황이 “단지 신학에 관한 의견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선포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행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랑의 질서도 정전론도 동정녀 탄생이나 삼위일체처럼 계시 신학의 문제는 아니다. 그럼에도 두 개념을 둘러싼 논쟁이 모두 가톨릭 용어를 사용하고, 가톨릭교회의 수장의 견해를 참조하면서 진행되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카를 슈미트는 현대 정치 사상들이 단지 “세속화된 신학 개념들”일 뿐이라고 유명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트럼프 2기에는 그 개념들이 종교적 의복을 벗지 않았다. 국방부의 『전쟁법 교범』은 “미군의 투입 및 전쟁 수행에 관한 결정에서 정전 전통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명시한다. 그 전통은 로마의 주교가 종종 개입해 온 전통이다.

1987년 루터교 목사 리처드 존 뉴하우스는 역사가 “가톨릭적 순간”에 들어섰다고 주장했다. 그 순간에 가톨릭교회는 미국을 위한 “종교적으로 형성된 공공철학”을 구축하는 데 있어 자신의 “정당한 역할”을 맡을 기회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교회의 수적·제도적 힘이 쇠퇴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기묘한 형태의 가톨릭적 순간이 실제로 도래했다는 사실은 놀랍다. 그것은 교회가 현장에서는 더 엷은 존재감을 보이지만, 공적 논쟁에서는 오히려 더 큰 존재감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20세기 중반 가톨릭교회가 제도적으로 절정에 있었을 때에도, 공적 논쟁을 형성하는 데 있어 가톨릭은 프로테스탄티즘보다 훨씬 작은 역할을 했다. 당시 프로테스탄트 전통에는 라인홀드 니버와 같은 저명한 주류 교단 대변자들이 있었고, 마틴 루터 킹 주니어와 같은 흑인 교회의 강력한 목소리도 있었다.

미국에는 여전히 가톨릭 신자보다 프로테스탄트 신자가 더 많다. 사실 대략 두 배나 많다. 그러나 현재 프로테스탄티즘은 미국의 “종교적으로 형성된 공공철학”에서 가톨릭보다 덜 중심적인 듯 보인다.

가톨릭의 두드러짐을 우연한 현상, 곧 밴스가 가톨릭 개종자라는 사실이 만들어 낸 단순한 부산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밴스의 개종은—최근 전반적으로 나타난 성인 개종자 증가와 마찬가지로—가톨릭의 지속적인 지적·문화적 힘을 보여 주는 표지이다.

어떤 주류 교단이나 흑인 교회도 성인 개종자의 급증을 경험하고 있지 않다. 이러한 개종자들 가운데 많은 이들은 일종의 대항 엘리트로 기능하는 가톨릭 지성 생태계의 일부이며, 공화당 행정부에 참모들을 공급하고, 시간이 지나면 선출직 공직자들과 연방대법원 대법관들까지 배출한다.

물론 가톨릭교회는 비록 영향력은 있을지언정 작은 세계인 가톨릭 보수주의자들의 세계를 훨씬 넘어선다. 만일 이들이 유일한 가톨릭 신자들이라면, 교회는 미국 장로교회나 북미 성공회와 비슷해 보일지도 모른다. 이들은 교육 수준이 높고 보수적인 구성원을 자랑하지만, 공적 논쟁의 윤곽을 형성하지는 못한다.

가톨릭의 공적 중요성은 부분적으로 그것이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 이민자와 오래된 토착 집단을 모두 포괄한다는 사실에 달려 있다. 사회학적 도달 범위에서 가톨릭은 옛 주류 교단과 닮아 있다.

그 주류 교회들과 달리, 가톨릭 신자들은 언제나 스스로가 주류와 구별되어 있음을 의식했다. 그들은 대안적 제도들을 세워야 했다. 가장 오래되고 중심적인 제도들이 그들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리성은 미국 사회가 세속화되면서 오히려 장점으로 입증되었다.

한때 미국 중산층을 대변했던 프로테스탄트 집단들은 더 이상 그렇게 하지 못한다. 한때 프로테스탄트 정체성을 형성하고 프로테스탄트 영향력을 투사하는 데 필수적이었던 엘리트 학문 기관들은 이제 자신들을 세운 종교 전통에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는다.

워싱턴 포스트에서 줄리아 요스트가 탐구한 또 하나의 요인은 프로테스탄티즘이 유지했고 또 의존했던 문해 문화의 쇠퇴이다. 이 쇠퇴는 가톨릭의 두드러짐을 높였다. 가톨릭은 사진에 잘 어울리는 사제의 검은색, 추기경의 붉은색, 교황의 흰색을 지니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의 탈문자적 문화는 미국인들이 더 이상 종교 논쟁을 수행할 공통의 성경 언어를 갖고 있지 않음을 뜻한다. 킹 제임스 성경과 같은 진정으로 공통된 권위 있는 텍스트가 부재한 상황에서, 교황과 같은 인격적 종교 권위는 더욱 필요하고 적실한 존재로 보인다.

가톨릭이 뜻밖에도 중심성을 갖게 된 이유에 관한 가장 흥미로운 이론은 아마도 토크빌이 제시했을 것이다. 그는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가톨릭 신앙 안에는 민주사회에 매력적인 무언가가 있다고 시사했다.

내가 처음 뉴하우스의 부엌에서 접했던 한 대목—그는 그것을 냉장고 문에 붙여 두고 있었다—에서 토크빌은 자신의 시대에 “로마 가톨릭 신자들은 불신앙으로 떨어져 나가는 것이 보이고, 프로테스탄트들은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것이 보인다”고 관찰했다. 이로 인해 쇠퇴와 성장의 기묘한 결합이 생겨난다고 토크빌은 썼다. “로마 가톨릭 신앙을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 보면 쇠퇴하는 듯하지만, 그 울타리 밖에서 보면 성장하는 듯하다.”

이 흐름 뒤에는 가톨릭과 민주주의 사이의 놀라운 친화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민주사회는 평등과 일치를 향한 내적 추동력을 지니고 있다. 이 추동력은 민주사회를 종교에 반대하게 만들 수도 있지만, 동시에 민주사회가 가장 보편적이고 획일적인 종교—말하자면 가장 평등주의적인 종교—이외의 어떤 종교도 받아들이기 어렵게 만든다.

토크빌의 표현처럼, 가톨릭 신앙은 “인류 전체를 동일한 기준으로 환원함으로써” “사회의 모든 구별을 뒤섞어 버린다.” 따라서 토크빌은 미국인들이 “점점 더 두 부분으로만 나뉘는 경향을 보일 것”이라고 예견했다. 곧 일부는 그리스도교를 완전히 포기하고, 다른 일부는 로마 교회의 품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이 모든 요인들이 일정한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가톨릭 신자는 마지막 가능성, 곧 하느님의 섭리를 고려해야 한다. 더 많은 미국인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면, 가톨릭적 용어들이 공적 논쟁에서 점점 더 중심적이 되고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여전히 미국을 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표지일 수 있다.

하지만 세속적인 승리주의에 휩쓸릴 위험이 있는 이들은, 비록 일부 상황은 호전되고 있지만 전반적인 추세는 여전히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
Copyrights ⓒ 리베르타임즈 & www.libertimes.kr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 더보기 리베르타임즈
댓글 :0
댓글 등록
0/400
  • 작성자명 |2024.11.14 10:30
    이곳은 댓글 작성한 내용이 나오는 자리 입니다.
1 2 3 4 5
리베르타임즈로고

신문사소개 | 찾아오시는 길 | 개인정보처리방침 | 이메일무단수집거부 | 청소년보호정책(책임자:도희윤) | 기사제보 | 문의하기


서울시 서초구 반포대로 5길 12 타운빌 2층 | 이메일: libertimes.kr@gmail.com | 전화번호 : 02-735-1210
등록번호 : 415-82-89144 | 등록일자 : 2020년 10월 7일 | 발행/편집인 : 도희윤
기사제보 및 시민기자 지원: libertimes.kr@gmail.com
[구독 / 후원계좌 : 기업은행 035 - 110706 - 04 - 014 리베르타스협동조합]
Copyright @리베르타임즈 Corp.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