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5일, 스물한 살의 압둘 발루트는 승합차를 몰고 베를린 프라이드 축제의 군중 속으로 돌진한 뒤, 마체테를 휘둘러 참가자들을 공격했다. 이 사건으로 여성 한 명이 목숨을 잃고 스물아홉 명이 부상을 입었다.
독일 당국은 이 사건을 이슬람주의 테러 공격으로 의심된다고 규정했다. 발루트는 다음 날 경찰과 대치하던 중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이 공격에 대한 반응은 정체성 정치가 그 자체의 모순으로 인해 무너지기 시작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가장 최근의 사례다. 분노가 터져 나오기는커녕, 사람들은 이번 공격이 “우리를 분열시키게 해서는 안 된다”고 불안하게 호소했다. 마치 분열의 원인이 살인범의 동기가 아니라 그에 대한 대중의 반응에 있는 것처럼 말이다.
정체성 정치는 공격자가 ‘특권층’에 속하고 피해자가 ‘보호받는 집단’에 속할 때에만 폭력을 규탄한다. 베를린에서처럼 그 역할이 뒤바뀌면 분노의 목소리는 잦아든다. 이러한 이중잣대는 이제 너무도 명백해져, 현실의 문제들을 놓고 정직하고 진지하게 토론할 수 있는 대중의 능력마저 파괴하고 있다.
내가 학계 생활을 막 시작했던 1990년대 초, 한 동료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방법론이란 애초에 잡도록 설계된 물고기를 잡기 위해 만들어진 그물이다.” 물론 당시에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으며, 이처럼 신탁을 연상시키는 모호한 발언은 학계라는 클럽의 회원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즐겨 구사하던 상투적인 언어였다. 그러나 그 말에는 일말의 진실이 담겨 있다.
특히 공적 생활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맺은 실천적 열매라 할 수 있는 정체성 정치에 적용할 때 더욱 그러하다. 정체성 정치는 애초에 악인으로 지목하도록 설계된 사람들을 잡아내기 위해 만들어진 그물이다. 그뿐만 아니라, 정체성 정치가 허용하기로 선택한 방식 이외의 언어로 그들의 악행을 논의하려는 시도 자체를 정당성 없는 것으로 만들도록 설계되어 있다.
지난 몇 년 동안 우리는 성소수자 운동의 구성원들이 카피예를 두르고 하마스를 지지하는 운동을 벌이는 기이한 현상을 목격해 왔다. ‘여성’이라는 개념이 생물학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강간과 죽음의 위협까지 받을 수 있는 세상에서, 동성애 행위를 사형에 처할 수 있는 범죄로 규정하는 조직을 성소수자 권리의 지지자들이 옹호한다는 것은 기묘해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현시대를 규정하는 부정의 정신이다. 이것이 바로 비판이론이라는 이념적 계보가 하는 일이다. 현재 존재하는 것을 해체하면서도, 그 자리를 무엇이 대신하게 될지에 대해서는 거의 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 내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것이다. 설령 그 적이 꿈꾸는 미래가 내가 선호하는 대명사의 사용을 거부하는 정도가 아니라, 나를 돌로 쳐 죽이는 세상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마찬가지로, 영국 정치인들이 미니애폴리스에서 발생한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에 보인 반응과 헨리 노왁의 죽음에 보인 반응 사이에는 극적인 대조가 드러난다. 미니애폴리스는 지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웨스트민스터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다. 반면 노왁은 영국인으로서, 경찰에 의해 수갑이 채워진 상태에서 치명상을 입었으며, 자신을 살해한 사람으로부터 인종차별주의자라는 거짓 비난까지 받았다.
조지 플로이드 사건은 영국 정부가 관여할 사안이 아니었음에도 즉각 정치화되었다. 한쪽 무릎을 꿇는 행위는 맨해튼에서와 마찬가지로 첼시에서도 반드시 따라야 할 의례처럼 되었다. 그러나 J. D. 밴스가 노왁의 살해 사건에 대해 논평하자, 영국 노동당 정부는 외국의 내정간섭이라며 분개했다. 그 차이는 무엇인가? 노왁 사건의 구체적인 정황이 정체성 정치의 취향에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급진화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과 프라이드 축제가 온라인 공간이나, 성혁명이라는 지극히 서구적인 현상을 조장하는 반서구적 위선자들의 상상 속이 아니라 현실의 서구 세계에서 실제로 마주치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이제 우리는 그 답을 알게 되었다.
분명히 해두자. 이러한 지적은 앞서 언급한 어느 사건의 참혹함도 상대화하려는 것이 아니다. 또한 정체성 정치가 사용하는 인종, 젠더, 성적 지향, 민족성과 같은 범주들이 인간이 서로 관계를 맺는 방식을 이해하는 데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범주에 현실을 묘사하는 역할을 부여하는 것과, 그것을 선택적으로 규범화하여 더 큰 정치적 게임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후자의 길을 택하면 이민과 인종차별 같은 문제에 관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사려 깊은 토론이 불가능해진다. 아무리 정중하게 문제를 제기하더라도, 특정한 질문을 던지는 순간 곧바로 악마화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안에 관한 모든 논의가 거부될 때, 정치 세계의 어두운 구석들이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노동당 의원 케이트 오즈번이 베를린의 참극을 정치화하면서, 영국개혁당이 “증오를 격화시키고 있다”고 비난한 것은 다소 역설적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녀 자신이야말로 지적이고 사려 깊은 토론을 억압해 온 바로 그 정치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자신이 혐오스럽게 여기는 정치를 가진 사람들에게만 책임을 돌리려 하는 극단적으로 양극화된 정치문화를 만들어낸 것도 바로 그러한 정치다.
정체성 정치가 현실이 자신의 도덕적 명령에 부합할 때에만 적용되고, 현실이 그 명령과 모순될 때에는 결코 적용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살인범이 “하일 히틀러!”를 외치는 백인 스킨헤드였다면 언론이 얼마나 경악하며 호들갑스러운 제목을 쏟아냈을지 상상해 보라. 이런 선택적 태도가 계속된다면, 사회가 중대한 문제를 놓고 충분한 정보에 근거한 토론을 벌일 능력은 급속히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그 대가는 모든 사람이 치르게 될 것이다.
유럽과 미국의 엘리트들은 정체성 정치가 무한정 계속할 수 있는 게임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어쩌면 정체성 정치는 다른 급진적 혁명들처럼 자기 자식들을 집어삼키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베를린 프라이드 축제 공격이 앞으로 닥칠 일들의 전조라면, 정체성 정치는 단호한 의지와 목적을 지닌 적들 앞에서 자기 자식들을 무방비 상태로 내버려두게 될 것이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