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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유엔군 수석대표 윌리엄 해리슨 중장(왼쪽 앉은 이)과 북한측 수석대표인 남일 대장이 휴전협정에 서명하고 있는 모습 |
8·15 경축사에 대한 두 번째 질문이다. 정부가 말하는 ‘종전’은 과연 무엇인가.
전쟁을 끝내자는 말 자체에 반대할 국민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종전 협상이나 종전 선언의 조건과 후과를 따져보자는 사람들을 마치 평화를 거부하는 ‘전쟁광’인 양 몰아세우는 것은 지극히 유치한 이분법이다.
전쟁은 문서 한 장에 서명한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전쟁이 끝날 때는 그 전쟁이 남긴 책임과 상처를 함께 정리해야 한다. 총성이 멎었다는 이유로 피해자의 존재까지 지워버린다면 그것은 종전이 아니라 망각이다.
6·25전쟁을 끝내는 협상이라면 가장 먼저 전쟁으로 삶을 빼앗긴 사람들의 원상회복 문제가 협상 테이블에 올라가야 한다. 수많은 국군포로와 민간인 납북피해자, 그리고 전쟁으로 가족과 고향을 빼앗긴 이들의 문제가 빠진 종전은 있을 수 없다.
그들이 어디에서 살았는지, 어디에서 죽었는지, 유해는 어디에 묻혀 있는지, 생존자가 있다면 어떻게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게 할 것인지 밝혀야 한다. 북한이 전쟁과 정전체제 아래에서 억류하거나 데려간 사람들에 대한 진실을 공개하고 생존자를 송환하며 사망자의 기록과 유해를 가족에게 돌려주는 것, 이것이 종전의 최소 조건이어야 한다.
물론 상호주의 원칙도 적용하면 된다. 대한민국에 있는 사람 가운데 스스로 북한으로 가기를 희망하는 이들이 있고 법적으로 송환이 가능한 경우라면 그 문제 역시 협상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도 남아있거나 자칭 비전향장기수든 다른 어떤 사람이든 본인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른 북송 문제를 논의하면 된다. 실제 북한행을 원하는 사람이거나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말았어야할 나라였다는 역사적 사고를 가진 이들에게 법과 인도주의 원칙에 따라 선택의 길을 열어주자는 것이다.
그러니 종전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전쟁범죄와 인권 문제를 덮어버린 채 정치적 선언만 남기는 가짜 종전이다.
북한은 오랫동안 국군포로와 납북자 문제 자체를 부인하거나 축소해왔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종전 협상을 시작하면 북한이 관련 기록을 더욱 철저히 은폐하지 않겠느냐고 걱정한다. 그러나 진실은 그렇게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북한에 의해 억류되었다가 고향을 찾아 대한민국으로 귀환한 국군포로 당사자들과 그 가족들이 있다. 그들의 삶 자체가 기록이다. 아버지가 어느 탄광에서 일했는지, 어느 산골에서 살았는지, 어떤 차별을 받았으며 마지막 순간까지 고향을 그리며 숨죽여 곱씹던 원한의 노랫말조차 그 가족들은 모두 알고 있다.
국가가 해야 할 일은 그 기억을 모으는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기록하고, 생존 여부를 확인하고, 거주지를 추적하고, 증언을 교차 검증해 대한민국의 공식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북한이 부인하면 증언으로 답하고, 자료를 숨기면 기록으로 맞서야 한다. 그리고 그 기록을 들고 종전 협상장으로 가야 한다.
종전 협상은 북한에 정치적 선물을 주는 자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북한의 체제를 인정해주는 의식도 아니며, 지난 70여 년의 역사를 덮어버리는 퍼포먼스는 더더욱 아니다.
"종전 협상은 전쟁의 장부를 결산하는 자리여야 한다."
누가 전쟁을 일으켰는지, 누가 포로가 되었는지, 누가 납치되었는지, 누가 돌아오지 못했는지, 누구의 가족이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평화는 책임의 반대말이 아니다. 진정한 평화일수록 책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화해를 원한다면 진실을 밝혀야 하고, 용서를 말하려면 먼저 피해자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 그런 종전이라면 반대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전쟁포로를 남겨둔 종전, 납북자를 외면한 종전, 희생자의 이름조차 확인하지 않은 종전은 평화가 아니다. 그것은 미완의 전쟁을 정치적 수사로 덮는 것일 뿐이다.
끝으로 북한에도 묻자.
전쟁포로와 그 가족들을 돌려보낼 준비가 되었는가.
납북피해자의 생사를 밝힐 준비가 되었는가.
사망자의 기록과 유해를 가족에게 돌려줄 준비가 되었는가.
전쟁이 남긴 책임을 정리할 준비가 되었는가.
준비가 되었다면 더 이상 주저할 이유가 없다.
“그럼, 이번에는 정말 제대로 전쟁을 끝내보자.”
<論 說 委 員 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