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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A 가톨릭 376] 유신론적 트랜스휴머니즘

2026-06-21 08:19 | 입력 : 리베르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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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J. 레이타트 Peter J. Leithart is president of the Theopolis Institute, Birmingham, Alabama. He posts regularly at his Substack, Notes from Beth-Elim. 테오폴리스 연구소 소장


트랜스휴머니즘(Transhumanism)은 과학기술을 활용해 인간의 신체적, 정신적 한계를 극복하고 노화와 질병, 죽음을 넘어 진화된 새로운 종(포스트휴먼)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상 및 철학적·문화적 운동

오늘날에는 거의 잊혀졌지만, 『인간의 순교』는 한때 세속주의자들을 위한 대체 성경으로 여겨졌다. 스코틀랜드의 모험가 윌리엄 윈우드 리드가 1872년에 출간한 이 책은 윈스턴 처칠, 조지 오웰, A. A. 밀른, 그리고 셜록 홈스까지도 그 찬탄 어린 독자들 가운데 두고 있었다.

리드에게 인류는 진보한다. 그러나 오직 십자가의 길을 따라서만, 곧 전쟁이라는 육체적 감옥과 교의적 종교라는 지적 감옥에서 고통스럽게 벗어나 이성, 자유, 끝없는 진보의 밝고 환한 세계로 들어가는 방식으로 진보한다.

그 과정에서 리드는 이전 두 세기 동안 유럽 문화 안에서 서서히 끓어오르고 있던 과학적 트랜스휴머니즘을 황홀한 문체로 표현했다. 우리의 몸은 경멸할 만한 것이며, “하등 동물들”의 몸보다 나을 것이 없다. 그러나 희망은 있다. “과학”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의 몸을 “변형시킬” 것이다. 야만인이 전기나 증기기관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미래의 “복된 이들”, 곧 뒤이어 올 “순수하고 빛나는 존재들”은 자신들의 조상들을 가련한 고깃덩어리로 여길 것이다. “날마다 먹을 빵을 얻기 위해 땅을 파헤치고, 살과 피를 먹으며, 비천한 몸 안에 거하고... 고통과 동물적 성향에 시달리는 불쌍한 야만인들”로 말이다.

지금은 “자연이... 아직도 우리를 그 결박 안에 붙들고” 있지만, 우리가 번데기에서 꿈틀거리며 빠져나와 날개를 펴고, 우리가 무엇이 될지 알 수 없는 존재로 솟아오를 날이 오고 있다. 이 모든 것은, 내 생각에, 트랜스휴머니즘도 과장된 미문도 그리 최근의 산물이 아니라는 증거일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본능적으로, 그리고 정당하게 항의한다. 우리의 몸은 정교하게 설계되어 있으며, 칼 트루먼이 강조했듯이, 우리의 변덕에 따라 빚어낼 수 있는 원재료가 아니다. 우리는 피조물이며, 경계 지어지고 유한한 존재이고, 우리의 앎과 행위에는 필연적으로 한계가 있다. 그러한 한계를 초월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인간성 자체에 적대적이다. 트랜스휴머니즘은 反인간주의적이다. 그것은 인간의 폐지를 추구한다.

그러나 우리 문화의 많은 가치와 열망이 그러하듯, 트랜스휴머니즘은 본래 그리스도교적 희망이었던 것을 왜곡한 것이다. 경건하면서도 기이한 가톨릭 신자 피코 델라 미란돌라는 『인간 존엄성에 관한 연설』에서 하느님께서 아담에게 말씀하시는 장면을 상상한다.

하느님은 “불확정적 형상의 피조물”인 아담에게 그의 변화무쌍한 본질을 상기시키신다. 창조주께서는 말씀하신다. “다른 모든 피조물의 본성은 우리가 정해 놓은 법 안에서 규정되고 제한되어 있다.” 그러나 아담, 너는 “그러한 어떤 제한에도 가로막히지 않으므로, 우리가 너를 맡긴 너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너 자신의 본성의 윤곽을 스스로 그려 나갈 수 있다.”

하늘에도 땅에도 속하지 않고, 죽을 존재도 불멸의 존재도 아닌 아담은 “자기 존재를 자유롭고 당당하게 빚어내는 자”이며, “네가 원하는 형상으로 너 자신을 만들어 갈 수” 있다. 두 길은 여전히 열려 있다. 하나는 “더 낮고 짐승 같은 생명의 형태로 내려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너 자신의 결정에 따라, 그 생명이 신적인 더 높은 질서들로 다시 올라가는” 길이다.

그보다 한 세기 반 앞서 단테는 이미 transumanar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천국편』의 문턱에서 베아트리체를 바라보던 그는, “바다에서 / 자신을 다른 신들의 동료로 만들어 준 풀을 맛본” 어부 글라우코스처럼 변화된다. 단테는 이 “초인간화”를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하늘을 다스리시는 사랑”께서는 “당신의 빛으로 저를 들어 올리셨음”을 아신다.

피코는 자유의지를 강조했지만, 아담이 “너 자신의 본성의 윤곽을 그려 나갈” 능력은 은총의 선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믿었다. 단테 역시 자신이 인간성의 한계를 초월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태양과 다른 모든 별들을 움직이는 사랑과의 만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르네상스의 트랜스휴머니즘은 심오하게 유신론적인 트랜스휴머니즘이다.

그리고 그것은 르네상스가 그리스도교 정통 신앙을 왜곡한 것도 아니다. 니사의 그레고리오는 하느님께 말씀드리며 인간 본성의 변화무쌍한 포용력을 이렇게 표현했다. “끝없는 모든 세대 속에서, 당신께 달려가는 이는 더욱 커지고, 더욱 높아지며, 선을 통하여 올라가는 그 상승에 비례하여 끊임없이 성장합니다.”

데이비드 벤틀리 하트는 이를 풀이하면서, 그레고리오가 영혼을 “그 안으로 무궁무진하게 흘러들어오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끝없이 확장되는 그릇”으로 본다고 말한다.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를 “아름다움에 대해 더욱더 넓어지고 수용적인 존재”로 만든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원천이신 선들 안으로 성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욕망은 “마치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것을 포괄하려는 듯이 무한을 향해 뻗어 나간다.”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더 많이 머무르실수록, 우리는 하느님께서 머무르실 더 많은 자리를 갖게 된다. 어찌 달리 될 수 있겠는가? 분명 어떤 피조물도 하느님께서 그에게 이루고자 하시는 바를 제한할 수는 없다.

이 모든 것의 배후에는 신약성경이 있다. 요한은 “우리가 장차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습니다”라고 쓴다(1요한 3,2). 베드로는 우리가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되었다고 말한다(2베드 1,4). 히브리서는 시편 8편을 풀이하며 우리가 “잠시 동안 천사들보다 낮게” 되었다고 말하는데(히브 2,7-9), 이는 우리의 종속 기간이 예수님의 현양과 함께 끝난다는 것을 암시한다.

바오로는 예수님께서 하늘의 자리로 현양되신 높이를 표현하기 위해 언어를 한계까지 밀어붙인다. 그분은 “모든 권세와 권위와 권능과 주권 위에, 또 현세만이 아니라 내세에서도 불리는 모든 이름 위에” 계신다(에페 1,21-23). 그리고 바오로는 우리를 예수님과 함께 그 자리에 앉힌다(에페 2,6). 궁극적인 초월은 부활에서 오며, 그것은 육체적 초월이다. 그 안에서 우리의 “혼적인” 몸, 곧 psychikon의 몸은 영적인, 곧 pneumatikon의 몸으로 변모될 것이다.

바오로는 식물학적 비유를 든다. 우리의 현재 몸은 씨앗이고, 우리의 미래 몸은 식물이다(1코린 15,36-37). 비천함과 약함 속에 뿌려지는 죽을 몸은 썩지 않는 몸, 영광과 능력의 몸으로 일어날 것이다(1코린 15,42-44). 우리의 현재 몸이 미래의 몸에 대해 씨앗이 나무에 대해 갖는 관계와 같다면, 그 차이가 도토리와 참나무 사이의 차이만큼 크다면, 우리가 장차 어떻게 될지가 마침내 드러날 때, 우리는 과연 우리 자신을 인간으로 알아볼 수 있을까?

그렇다. 인간에게는 목적이 있다. 그러나 그 목적은 무엇인가? 신약성경은 일종의 불가지론을 요구한다.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한다. 아직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기술적이고 세속적인 트랜스휴머니즘에 힘써 반대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일을 효과적이고 철저하며 지속적으로 수행할 수 있으려면, 프로메테우스와 프로테우스조차 입을 벌리고 놀랄 만큼 경이로운 약속과 희망을 포함하여, 그리스도교 인간학의 모든 자원을 끌어와야 한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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