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탄 ITA 항공편은 주일 아침 팔레르모 근처에 착륙했다. 짐과 10유로를 친절한 기념품 가게 주인에게 맡긴 뒤, 나는 masstimes.org를 손에 들고 미사 참례를 위해 길을 나섰다. 결국 나는 제수 성당에 이르게 되었다.
후기 바로크 양식이자 예수회 성당인 그곳은 아마 내가 지금까지 본 성당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성당일 것이다. 금박을 입힌 흰 대리석이 검은 배경 위에 놓여 있었고, 그 극적인 대비는 바닥에서 천장까지 내부 전체를 가로질렀다. 곳곳에는 아기 천사들이 있었고, 천장 프레스코화들은 우주적 장엄함을 띠며 종말의 일들을 묘사하고 있었다.
영국의 추기경 헨리 에드워드 매닝의 친구이자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의 후원자였던 레이디 엘리자베스 허버트가 그곳에서 회심 체험을 했다고 들었다. 이 성당은 허스키 작전 개시 두 달 전 연합군의 폭격으로 거의 파괴되었고, 60년에 걸친 복원 사업은 2009년에야 마무리되었다.
이 성당은 리소르지멘토 직후 국가 기념물로 지정되었고, 역사적으로나 예술적으로 중요한 곳이다. 그러나 나의 관심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나는 내가 본 것을 시칠리아의 가톨릭에 관해 읽어온 내용과 비교해 보고 싶었다.
보도들에 따르면 이탈리아는 세속화되고 있다. 20년 전만 해도 이탈리아인의 36%가 매주 미사에 참례한다고 답했지만, 지금은 18%다. 그럼에도 이탈리아는 여전히 서유럽에서 가장 종교적인 나라들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다.
물론 요즘에는 매우 종교적인 나라로 여겨지는 데 그리 많은 것이 필요하지는 않다. 그리고 성인들과 성당들의 땅인 시칠리아에서조차 종교 실천은 쇠퇴하고 있다. 그 주일, 나의 임무는 관찰하는 것이었다. 시칠리아 교회는 어떤 건강 상태에 있는가?
내가 제수 성당을 방문했을 때, 관광객들이 줄지어 성당 안을 둘러보고 있었고, 한 단체 관람객이 끝마치도록 하기 위해 미사는 몇 분 늦게 시작되었다. 한 신랑에서는 한 연로한 예수회 신부가 고해성사를 듣고 있었다. 화해의 성사는 미국에서보다 시칠리아에서 더 쉽게 접할 수 있는 듯했다.
한편 성당 맞은편에는 종이 반죽으로 만든 조형물 전시가 수도회의 정치적 우선순위를 알리고 있었다. 작은 ICE 요원들이 그리스도를 채찍질하고 있었고, 품에 안긴 지구본은 환경 보전의 중요성을 나타내는 듯했다. 주일 미사 참례자는 많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시칠리아에 머무는 동안 반복해서 보게 될 몇 가지 특징을 알아차렸다.
우선 시칠리아 사람들은 미국인들보다 훨씬 더 자연스럽게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화려한 옷차림을 한 한 지역 여성이 대개 자기 자리에서 회중을 이끄는, 일종의 자임한 성가대 지휘자 역할을 했다. 강론은 길었다. 나는 사제들에게 간결함을 요청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호소에 점점 더 공감하게 되었다. 또한 무릎 꿇는 방식은 미국 성당들에서보다 훨씬 덜 일률적이었다.
대부분은 축성 때 무릎을 꿇지만, 그 이후에는 예측하기 어려웠다. 같은 미사 진행 지점에서 어떤 이들은 무릎을 꿇고, 어떤 이들은 서 있으며, 또 어떤 이들은 앉아 있는 식으로 회중이 갈라지는 모습을 보는 것이 드문 일이 아니었다. 내가 방문한 몇몇 성당들은 무릎 꿇는 것을 사실상 금지하는 듯한 좌석 배치를 갖고 있었다.
예수회 성당의 압도적인 아름다움을 본 뒤, 나는 가능한 한 많은 시칠리아 성당들을 방문하고, 열려 있는 문이면 어디든 들어가 보기로 했다. 아마 50곳 쯤 보았을 것이다. 대부분은 아름답고 바로크 양식이었다. 어떤 곳은 노르만 양식이었고, 어떤 곳은 브루탈리즘 양식이었다. 나는 카라바조와 마르코 루프니크의 예술, 시라쿠사의 흰 석회암, 에트나산의 검은 현무암을 보았다.
관광객이 많이 찾는 지역이나 역사 중심지에 있는 많은 성당들은 평일 미사를 봉헌하지 않았다. 수십 개의 종교 건축물이 있는 “백 개의 성당 도시” 에리체의 포에니 성벽 안에서도, 어떤 날에는 미사가 전혀 봉헌되지 않는다. 또 다른 성당들은 공연장이나 전시장으로 너무 심하게 개조되어 있어서, 나는 그곳들이 이미 축성 해제되었기를 바랄 정도였다. 그리고 또 다른 곳들은 분명히 축성 해제되어 있었고, 감실이 뽑혀 나간 자리에 생긴 상처가 벌어진 채 남아 있었다.
내가 여행한 곳들에서 대부분의 성당은 방문객들에게 개방되어 있었다. 다수의 성당은 입장권을 요구했다. 시칠리아인들이 영웅적이고도 비용이 많이 드는 복원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나는 그런 불편함에 대해 불평하고 싶지 않다. 때로는 입장권 제도가 유로화를 담을 접시를 든 연로한 본당 신자 한 명으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다른 성당들은 더 복잡한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팔레르모의 벨리니 광장에서는 세 곳의 역사적인 성당을 묶은 할인 통합권을 살 수 있다. 나는 그 광장 바로 옆, 산 주세페 데이 테아티니 성당의 지하 경당에서 미사에 참례했다. 섬의 반대편 카타니아에서는 15유로짜리 입장권으로 “성녀 아가타”의 수난 여정을 성당에서 성당으로 따라가다가, 마침내 도시의 주교좌성당에 이르게 되었다.
아가타, 곧 카타니아의 동정 수호성인에 대해 말하자면, 시칠리아 사람들은 자신들의 성인들에게 깊은 신심을 가지고 있다. 성당들은 그들을 기리는 축제용 수레들로 가득하고, 거리와 광장은 그들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어 있으며, 길가에는 동정 성모와 지역 성인들에게 봉헌된 벽감 형태의 성지가 점점이 자리하고 있다. 팔레르모에서는 성녀 로살리아가 아란치니를 먹고 있는 모습이 그려진 간판을 내건 패스트푸드점도 적어도 두 곳 보았다. 시칠리아 문화는 가톨릭 문화다.
그러나 이 모든 열정과 신심에도 불구하고, 시칠리아는 여전히 세속화되고 있다. 정확한 지역별 수치를 얻기는 어렵지만, 성소의 감소는 분명하다. 어느 날 밤, 나는 한때 활발히 운영되던 우르술라회 모원 건물에서 묵었다. 용도가 바뀐 그 궁전에는 아직 두 명의 수녀만 거주하고 있었다. 다른 곳에서는 오랫동안 자리 잡아 온 수도 공동체들이 계속 남아 있는지 물어보았다. 한 공동체에는 생존한 회원이 네 명뿐이었고, 또 다른 공동체에는 단 한 명뿐이었다. 대부분은 문을 닫게 될 것이다.
신학생 수는 그 어느 때보다 적고, 사제들의 연령층은 높아지고 있다. 미사 참례율은 세대별로 감소해 왔고, 이는 그 쇠퇴가 앞으로 수십 년간 계속될 것임을 거의 보장한다. 결국 조직 구조는 무너질 것이다. 성사를 집전할 사람도 없고, 성사를 찾는 사람도 없게 될 것이다. 수백 개의 성당은 더 이상 성당으로 기능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시칠리아 사람들은 세례받은 백성이다. 그들은 그 세례를 통해 은총에 열려 있으며, 그들의 땅과 문화도 그러하다. 시칠리아 사람들을 구원의 통상적 수단으로 다시 데려오는 일은 방향을 돌려 세우는 일이며, 성녀 로살리아와 성녀 아가타의 신심가들이 자신들의 유산의 충만함을 받아들이도록 부드럽게 이끄는 일이다.
연료는 이미 그곳에 있다. 그것에 불을 붙이는 것은 충분히 담대한 복음 선포자를 찾는 문제일 뿐이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