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에는 모든 사람이 가리 카스파로프의 슬픔을 알게 될 것이다. 러시아의 체스 그랜드마스터였던 그는 1997년 체스 컴퓨터 딥 블루에게 패했다. 그 이후 어떤 인간 경쟁자도 그 타이틀을 되찾을 만한 그럴듯한 도전을 해내지 못했다.
과거에는 컴퓨터가 인간적 탁월성의 특정 영역을 정복했을 때, 사람들은 대개 우리 자신을 낮추어 보기보다는 그 영역 자체를 덜 중요하게 여기는 방식으로 반응했다. 그러나 돌파구가 너무 빠르게, 너무 많은 서로 다른 영역에서 나타나 추적하기조차 어려워질 때에는 그러한 양상이 지속되기 어렵다.
알파고가 현존 최고의 바둑 기사를 이긴 일은 2016년 전 세계적인 뉴스였다. 2026년 오픈AI 시스템이 미해결 에르되시 문제를 푼 일은 그렇지 않았다. 거의 모든 인간이 실패할 곳에서 AI가 성공하는 일은 이제 “개가 사람을 물었다”는 식의 흔한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교황 레오 14세의 회칙 「위대한 인류애」는 카스파로프들의 세계를 향해 말할 바가 있다. 이 문헌이 발표되기 며칠 전, 교황은 “인간의 목소리와 얼굴을 보존하기” 국제회의 참가자들을 만나 “우리가 현재 직면한 도전은 기술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학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기계 의식의 가능성과 자율 무기의 사용을 다루는 이 회칙 전반에는,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왜 선한 일인지를 밝히는 강한 주장들이 관통하고 있다. 20년 뒤 「위대한 인류애」는 AI에 관한 회칙인 만큼이나 생명 수호 회칙으로 기억될지도 모른다.
사실 교회는 오래전부터 쓸모없어 보이는 사람들의 가치를 옹호해 왔다. 태중의 아이와 쇠약함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노인은, 점점 더 많은 나라들이 죽이는 것이 허용된다고 믿는 두 부류의 인간이다. 그들을 반대하는 논거는 그들의 능력 부족에 호소함으로써 제기된다. 그들은 스스로를 부양할 수도, 먹일 수도, 자신을 대변할 수도 없다. 현재로서는 자신을 돌보는 이들에게 보답할 수도 없다. 그들은 심대한 비대칭성의 패배하는 쪽에서 살아간다.
「위대한 인류애」에서 레오 교황은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의 가치를 벌어들이거나 정당화해야 한다고 암시하는” 이데올로기를 “특별히 교활한 것”으로 지목한다. 인간이 빚을 진 채 태어나, 결국 자기 자신을 사서 자유롭게 된다는 이러한 관점은 분명히 아주 어린 이들과 아주 늙은 이들을 위험에 빠뜨린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자신의 노동이 AI에 의해 더 싸고 빠르게 수행될 수 있을 때 자기 삶을 정당화하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많은 다른 이들까지 위태롭게 한다.
이 회칙은 앞으로 10년 동안 예상되는 경제적 격동을 완화하기 위해 가톨릭 사회교리의 원칙들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에 관해 조언한다. 그러나 이 문헌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이, 왜 사람들이 쉽게 버려질 수 있는 대체 가능한 부품처럼 취급되어서는 안 되는지에 대해 말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교회가 인간 존엄을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우리의 존재에서 솟아나는 것으로 본다는 점이다.
레오 교황이 쓰듯이, “모든 인간 존재의 존엄은 무한하다고 묘사될 수 있다...그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우리를 당신과의 우정으로 부르시는 하느님의 사랑이 무한하기 때문이며, 둘째, 그분의 사랑은 절대적으로 무조건적이기 때문이다. 곧 우리가 끝없이 찾아 헤맨다 하더라도, 그 사랑을 지우거나 부정할 수 있는 것은 결코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지상 생활에서 우리는 각자의 고유한 능력과 재능에 따라 서로 뚜렷이 구별된다. 어떤 사람들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성악가로 성장하고, 어떤 사람들은 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의사소통을 해야 한다. 우리 각자는 하느님께서 우리 손에 맡기신 재능이나 십자가를 선한 청지기로서 돌볼 책임을 지고 있다. 그러나 하늘의 경제 안에서 우리는 모두 동등한 이들로 함께 모여 있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을 자기 힘으로 획득할 수 없다.
구원의 경륜 안에서 자기 자신을 빚에서 풀어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내어주신 선물을 받아들임으로써 구원받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는 건널 수 없는 비대칭성의 낮은 쪽에서 살아간다.
레오 교황이 쓰듯이, “우리의 유한한 본성과 하느님의 생명 사이에는 무한한 간극이 놓여 있다.” 우리의 한계는 그분의 사랑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하느님께서 그 간극을 가로질러 우리를 당신께로 들어 올리시기에, “하느님께 합당하지 않은 순간이나 인간적 상황은 없다.” 우리의 유한성은 슬픔의 원인이 아니라, 우리를 당신의 무한성에 참여하게 하시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상기시키는 표식이다.
다가오는 세월은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유한성과, 우리의 행위에 근거한 정체성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날카롭게 일깨워 줄 것이다.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어떤 대안들이 열려 있을까?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우리의 존재 안에서 정체성을 찾을 다른 길이 무엇일까? 하느님을 제쳐놓는다 해도, 우리 정체성에는 상으로 얻어낸 것이 아니라 선물로 받은 부분들이 여전히 있다. 그것들은 남자나 여자로 태어나는 것, 특정한 나라 안에 태어나는 것, 특정한 인종의 구성원으로 태어나는 것과 같은 특수성의 표식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표식들이 누군가의 자기 가치의 자리가 될 때, 그것들은 경쟁과 위계질서를 세우려는 시도로 이어진다. AI의 역량이 급증함에 따라, 나는 이러한 파편화된 정체성들이 더 많은 포퓰리즘적 에너지를 끌어들이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것들은 다가오는 세월의 질문, 곧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면 무엇이 당신에게 가치를 부여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하나의 가능한 답을 제공한다.
그리스도인의 과제는 “여러분이 지닌 희망의 이유를 묻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답변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1베드 3,15). 우리는 초인간주의자에게, 레오 교황의 표현처럼 “공동선을 위하여 건설한다는 것은 인간성의 한계와 약함을 바로잡아야 할 오류로 여기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임을 설득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재능을 발전시키고 이웃을 섬기기를 갈망할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능력들을 더하는 것만으로 우리의 가치를 확립하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는 정체성주의자를 바깥으로 향하게 하여, 그가 “우리 자신보다 더 큰 형제애를 직관”하고 배제에 의존하지 않는 존재의 원천을 발견하도록 초대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절망에 맞서는 조언을 제공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행위” 정체성을 붙잡지 못하게 된 이들이 자기 자신을 버리지 않고,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과 노인들이 이미 부당하게 선고받은 “비인격적 인간”이라는 범주로 스스로를 추방하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의 한계 때문에 발밑의 땅이 꺼져 내리는 것처럼 느껴질 때, 이러한 위험의 순간들은 또한 레오 교황이 말하듯 “우리가 새로운 지혜를 발견할 수 있는 순간들”이다. 그리스도인의 증언은 더 단단한 땅으로 뛰어오르도록 친절한 손을 내미는 모습일 것이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