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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참의원 - 자료사진 |
일본이 마침내 이른바 ‘일본판 CIA’로 불리는 국가정보국 창설에 시동을 걸었다. 국가정보국과 그 지휘기구인 국가정보회의를 설치하는 법안이 27일 일본 참의원 본회의를 통과하면서, 일본의 정보·안보 체계는 중대한 전환점을 맞게 됐다.
이번 법안 통과는 단순한 행정조직 개편이 아니다. 북·중·러의 군사적 압박, 첨단기술 탈취, 사이버 공격, 가짜뉴스를 통한 여론전이 일상화된 동북아 안보 환경 속에서 일본이 더 이상 기존의 분산형 정보체계만으로는 대응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결과다.
그동안 일본의 정보 수집과 분석 기능은 외무성, 공안조사청, 경찰청 외사·공안 부문, 방위성 정보본부 등 여러 기관에 흩어져 있었다. 각 기관이 개별적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구조였기 때문에, 국가 차원의 통합 판단과 신속한 정책 결정에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새로 설치되는 국가정보회의는 총리를 의장으로 하며 국가공안위원장, 관방장관, 법무장관, 외무장관 등 주요 각료 9명으로 구성된다. 이 회의는 안보, 테러, 외국 세력의 정보활동, 경제안보 등과 관련한 국가 차원의 기본 방침을 수립하게 된다. 국가정보국은 이 국가정보회의의 사무국 역할을 맡아 각 정보기관의 정보를 집약하고 분석하는 실무 중심축이 된다.
국가정보국은 기존 총리 직속 정보기관인 내각정보조사실을 개편하는 방식으로 출범하며, 오는 7월 약 700명 규모로 가동될 예정이다. 국가정보국장 역시 일본의 외교·안보 정책을 총괄하는 국가안보국장과 동등한 위상을 갖게 된다. 이는 정보기관이 단순한 보조 조직이 아니라 국가전략 수립의 핵심 기관으로 격상된다는 의미다.
이번 법안은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가 지난 2월 중의원 선거에서 내세운 핵심 공약 가운데 하나였다. 다카이치 총리는 법안 심의 과정에서 “중대한 위기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정책 부문의 확실한 의사결정을 정보 부문이 뒷받침하는 체제를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일본 정부가 국가정보국 창설을 서두른 배경에는 변화된 안보 환경이 있다.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 중국의 군사적 팽창과 해양 진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강화된 권위주의 진영의 연대, 여기에 첨단기술과 경제안보를 둘러싼 정보전까지 겹치면서 일본 내에서는 국가 차원의 정보 컨트롤타워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돼 왔다.
특히 최근에는 군사정보뿐 아니라 인공지능, 반도체, 우주·항공, 바이오, 사이버 기술 등 첨단 분야의 정보 보호가 국가안보의 핵심 과제로 부상했다. 선거와 여론 형성 과정에서 외국 세력이 SNS를 통해 가짜뉴스와 조작 정보를 유포하는 문제도 일본 정치권이 심각하게 바라보는 사안이다.
이번 법안은 자민당과 일본유신회 등 연립 여당뿐 아니라 일부 야당의 찬성까지 얻어 중의원을 통과한 데 이어 참의원에서도 가결됐다. 그만큼 일본 정치권 내부에서 정보체계 개편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상당 부분 형성됐다는 뜻이다.
다만 반대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입헌민주당 등 일부 야당은 국가 기밀정보 관리 강화가 국민의 인권 침해나 정치적 중립성 훼손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들은 국가정보회의와 국가정보국의 활동을 연 1회 국회에 보고·공표하고, 활동을 감찰하는 독립기관을 설치하는 대안을 제출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국회 주변에서는 시민단체들이 국가정보국 설치에 반대하는 집회를 열었다. 이들은 정보기관의 권한 강화가 개인정보 침해와 감시사회로 이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다카이치 총리는 법안 통과 후 기자회견에서 이번 법은 “행정기관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것”이라며 개인정보 침해 위험을 높이는 제도가 아니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논란은 여기서 끝나지 않을 전망이다. 다카이치 총리는 국가정보국 창설에 이어 공공기관과 기업의 기밀 정보를 불법적으로 수집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스파이 방지법’ 제정과 해외 정보 수집을 전담하는 ‘대외정보청’ 창설도 추진하고 있다. 이번 국가정보국 설치법은 일본 정보체계 재편의 시작일 뿐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일본 사회에서 스파이 방지법은 오랫동안 논쟁적 주제였다. 전후 평화헌법 체제와 정보기관에 대한 경계심, 국민 감시 우려 등이 맞물리면서 본격적인 입법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최근 안보 현실은 과거와 크게 달라졌다. 국가기밀 탈취, 산업기술 유출, 외국 세력의 정치 개입, 사이버 공작이 실제적 위협으로 부상하면서 “방어할 법이 없는 국가”로는 안보를 지킬 수 없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동북아 전체로 보면 이번 일본의 움직임은 상당한 의미를 갖는다. 한국의 국가정보원이 정치적 논란과 기능 축소 논쟁 속에서 대북·대외 정보 역량 약화 우려를 낳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은 오히려 정보기관의 통합과 강화로 방향을 잡고 있다. 이는 향후 한미일 안보협력의 정보축에도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북한, 중국, 러시아는 이미 오래전부터 정보전·심리전·사이버전·경제안보 침투를 복합적으로 전개해 왔다. 자유민주주의 국가는 법치와 인권을 지켜야 하지만, 그렇다고 정보전의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다. 민주주의 국가가 스스로를 방어할 능력을 갖추지 못한다면, 자유는 가장 먼저 적대 세력의 침투 대상이 된다.
물론 정보기관 강화는 반드시 견제 장치와 함께 가야 한다. 권한은 필요하지만, 통제 없는 권한은 위험하다. 정치적 중립, 개인정보 보호, 국회 감시, 독립적 감사 장치 등은 정보기관이 국민의 신뢰를 얻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일본 국회가 채택한 개인정보 보호 관련 부대결의는 법적 구속력은 없지만, 향후 제도 운용 과정에서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이번 국가정보국 설치법 통과는 일본이 더 이상 ‘정보 후진국’이라는 평가에 머물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앞으로 스파이 방지법과 대외정보청 창설 논의가 이어질 경우, 일본의 안보 체계는 전후 체제 이후 가장 큰 변화를 맞게 될 가능성이 크다.
동북아는 이미 총성 없는 정보전의 한복판에 들어섰다. 일본의 국가정보국 출범은 그 현실을 인정한 첫 제도적 대응이다. 문제는 이제부터다. 일본이 자유민주주의의 원칙을 지키면서도 북·중·러의 전체주의적 정보공세에 맞설 실질적 방어 능력을 갖출 수 있을지, 국제사회와 주변국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안·희·숙 <취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