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독일의 한 주요 가톨릭 웹사이트에 게재된 글에서, 추기경님께서는 교회가 여성에게 성품성사를 줄 수 있는지의 문제가 아직 최종적으로 확정되지 않았다고 시사하셨습니다.
곧, “하느님 백성의 절반이 성품 직무에 접근할 수 없기 때문에 고통받는다면, 그런 교회가 장기적으로 계속 존재할 수 있으리라고 나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잠시, 교회가 오직 남성만을 성품성사에 부르는 오랜 관행 때문에 어떤 고통이, 또 어떻게 초래되는가 하는 문제는 제쳐두더라도, 추기경님의 이러한 표현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관해 여러 질문을 제기합니다.
예컨대 추기경님께서는 지난 이천 년 동안 성품성사에 대한 가톨릭의 이해에 본질적으로 잘못된 무언가가 있었다고 말씀하시려는 것입니까? 그러한 생각은 주님께서 성령의 끊임없는 부어주심을 통하여 당신 교회를 진리 안에 보존하시겠다고 약속하신 말씀(요한 15,16; 16,13)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습니까?
누가 성품성사에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단 한 번도 교회 규율의 부차적 문제로 이해된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성품 직무의 본질 자체와 관련된 것으로 이해되어 왔으며, 이 성품 직무는 교회의 구조를 이루는 본질적 요소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우리의 창조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창조물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이천 년 동안 그리스도를 오해해 온 것입니까? 아니면 그리스도께서 교회와 그 성품 직무를 지난 이천 년 동안 그러한 방식으로 구조화하신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는 말입니까?
또한 여성들이 성품성사에 부름받지 않는 미래의 교회를 상상할 수 없다고 하신 말씀은,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하느님 나라의 삶(마르 1,15)에 대해 다소 성직주의적인 이해를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까?
하느님 나라가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던 때 역사 안으로 들어왔고, 또 그 역사 안으로의 돌입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그 약속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라면(비록 우리가 자주 그것을 잊는다 하더라도), 어떻게 “하느님 백성의 절반”이 성령 안에서의 충만한 생명으로부터 배제될 수 있습니까?
그리고 미래에 대한 추기경님의 두려움은, 과거에 이루어진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추기경님의 이해에 관하여 무엇을 말해 줍니까? 우리 주님의 어머니께서는 당신 아드님께서 성품성사로 그분을 부르지 않으셨기 때문에 하느님 나라의 삶의 충만함에서 배제되셨습니까? 유럽의 수호성인들인 시에나의 카타리나, 아빌라의 데레사, 에디트 슈타인 역시 그러했습니까? 추기경님의 어머니는 그러하셨습니까? 제 어머니는 그러하셨습니까?
그리고 현재의 문제가 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하느님의 계시를 진지하게 받아들입니다. 이는 남성과 여성으로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창조 행위, 곧 똑같이 인간적이면서도 고유하게 인간적이고 상호보완적으로 인간적인 존재로 창조하신 일이, 단지 창조주께서 진화생물학의 메커니즘을 통하여 일하신 문제만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창세기 1장 27절,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라는 말씀은 단순한 묘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 조건 안에 새겨진 깊은 진리들을 계시하는 말씀입니다. 바로 그러하기에 가톨릭교회는 남성성과 여성성을 단지 서로 다른 신체 구조로 축소해 버리는 후기 근대 및 포스트모던의 남녀구분 없는 인간관이라는 허황된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또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에페소서 5장에서 성 바오로는 주님과 교회의 관계를 혼인적 관계로 묘사합니다. 곧 주님께서는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듯이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가톨릭교회가 이해하는 바에 따르면, 서품된 사제는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그 혼인적 관계를 구현합니다. 사제들은 단지 어떤 교회적 기능들을 수행하도록 허가받은 성직 계급의 구성원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서품된 사제는 대사제이시며 교회의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이콘입니다.
남녀 구분을 흐리는 문화는 이 생각을 이해하기 어려워합니다. 두 남자나 두 여자가 서로 “결혼”할 수 있다고 상상하는 문화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어떤 문화의 혼란에도 굴복할 의무가 없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창세기 1장 27절의 저자에게 그 말씀을 쓰도록 영감을 주셨을 때, 또 바로 그 동일한 성령께서 성 바오로에게 에페소서 5장을 쓰도록 영감을 주셨을 때, 하느님께서 우리의 인간성에 관한 중요한 진리들을 드러내셨다는 교회의 확신을 그러한 혼란에 제물로 바칠 수도 없습니다.
성 바오로는 또한 그리스도와 교회의 이 혼인적 관계를, 곧 누가 성품성사에 부름받을 수 있는가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이해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이 관계를, “위대한 신비”라고 묘사했습니다. 이는 우리가 아무리 지성적으로 신중히 이해하려 노력하더라도, 오직 사랑 안에서만 파악될 수 있는 깊은 믿음의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추기경님, 교회의 목자들은 하느님 백성이 사랑 안에서 신앙의 신비를 받아들이도록 도와줌으로써 더 이상의 혼란을, 그리고 그러한 혼란들 때문에 야기되는 온갖 고통을 피하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느님의 계시와 교회의 권위 있는 가르침, 곧 1994년 교황 교서 (Ordinatio Sacerdotalis 사제 서품)에 의해 확정된 바가 사실은 확정된 것이 아니라고 시사함으로써 혼란을 더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부활 신앙의 친교 안에서 드립니다. GW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