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위태로운 갈림길에 설 때마다 우리는 흔히 젊은 세대의 경박함과 조급함을 걱정해 왔다. 경험이 짧고 역사의 무게를 덜 짊어진 세대가 순간의 감정과 유행에 휩쓸려 공동체를 그르칠 수 있다는 우려였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늘 연륜과 경륜을 존중했고, 국가적 위기 앞에서는 무엇보다 어른들의 식견과 절제를 기대해 왔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마주한 현실은 그 기대를 무겁게 배반하고 있다. 한때 대한민국을 위해 헌신했던 일부 원로들이, 작금의 세계사적 기로에서 오히려 판단을 잃고 시대의 나침반이 아니라 혼란의 진원이 되는 모습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한 의견 차이의 문제가 아니다. 늙는다는 것은 저절로 지혜로워진다는 뜻이 아니다. 세월은 사람에게 주름과 훈장을 남기기도 하지만, 동시에 고집과 독선, 자기기만을 남기기도 한다. 그래서 예로부터 사람들은 노쇠함을 연민했지만, 노망(老妄)은 경계했다. 육신의 쇠약은 어쩔 수 없는 자연의 이치이나, 정신의 일탈은 공동체에 큰 상처를 남기기 때문이다.
더욱이 과거의 공로가 현재의 오류를 면책해 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한 시대를 이끌었던 위치에 있었던 사람일수록, 그릇된 판단은 더 넓고 깊은 폐해를 낳는다.
참으로 가슴 벅찬 것은, 정작 어른들이 늘 우려해 온 손주뻘인 2030 세대가 오히려 자기들의 미래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냉혹한 국제정세와 국가의 향방을 두고 더 현실적으로 판단하려 애쓰는 모습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물론 젊은 세대 역시 완전하지 않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은 자신이 살아갈 내일을 놓고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다.
그들이 세계의 흐름을 읽고, 자유와 안보와 번영의 조건을 따져 묻고, 감상보다 현실을 직시하려는 태도를 보일 때,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마땅히 격려하고, 기뻐하고, 박수를 보내야 한다. “그래, 너희가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응원해 주어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정반대다. 일부 어른들은 오히려 사악한 무리의 편에 서서, 역사와 현실을 흐리는 말로 젊은 세대의 판단을 흔들고 있다. 분명히 옳고 그름이 갈리는 문제 앞에서도 좌고우면하고, 자신이 지켜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조차 잊은 채 갈팡질팡한다. 자유를 말하던 이가 자유를 위협하는 세력 앞에서 침묵하고, 국가를 걱정하던 이가 국가의 기둥을 허무는 논리와 타협하며, 후손의 미래를 입에 올리던 이가 정작 그 미래를 좀먹는 선택에 동조하는 모습은 차마 눈 뜨고 보기 민망할 지경이다.
이 모습이 더욱 안타까운 이유는, 그들이 본래부터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때 이 나라를 위해 땀 흘리고 헌신했던 사람들이다. 산업화의 현장에서, 민주화의 굴곡 속에서, 국가적 위기의 순간마다 각자의 자리에서 애쓴 세대다. 그래서 더 슬프다. 그들의 과거가 거짓이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헌신이 진실이었기에 지금의 일탈이 더욱 처연하게 보이는 것이다.
사람은 과거의 영광 속에 영원히 머무를 수 없다. 시대가 바뀌면 책임의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 물러설 때를 알고, 침묵할 때를 알고, 무엇보다 후대가 자신보다 더 잘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진짜 어른의 품격이다.
어른의 권위는 나이에서 나오지 않는다. 옳은 것을 알아보고, 옳은 편에 설 줄 아는 용기에서 나온다. 젊은 세대가 자신들의 미래를 스스로 찾아가는 길목에서, 그들을 가로막고 비웃고 왜곡하는 것은 지도도 조언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자기 시대의 습관을 버리지 못한 채, 다음 시대를 시기하는 초라한 집착일 뿐이다. 더욱이 그것이 공동체를 해치는 세력의 논리와 결합될 때, 그 해악은 개인의 노쇠를 넘어 공적 재앙이 된다.
지금 반드시 필요하고 바라는 것은 단 하나다. 어른들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이다. 자신들의 삶이 쌓아 올린 명예를 스스로 허물지 말고, 후손들의 미래를 어지럽히는 말과 행동을 멈추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젊은 세대의 분투를 인정하고, 그들이 걸어가는 현실의 길을 축복해 주는 것이다.
그것이 한 시대를 살아낸 이들이 마지막으로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책임일 것이다.
<論 說 委 員 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