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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가 박정희 학술포럼, 발제하는 이영훈 대표 |
더불어민주당이 국회에서 열린 ‘혁명가 박정희’ 포럼을 두고 “독재 미화에 판을 깔았다”며 국민의힘을 비판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민주화의 공로까지 돌린 발언에 대해서는 충분히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특정한 역사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토론의 장을 마련한 행위 자체를 중단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역사 논쟁은 근거와 반론으로 풀어야 한다. 정당의 논평이 역사 평가의 허가증이 될 수는 없다.
이 대목에서 묻지 않을 수 없다. 북한 김씨 왕조에 대한 찬양에는 표현의 자유와 남북관계의 특수성을 내세우면서, 이승만과 박정희에 대한 긍정적 평가에는 왜 곧바로 ‘독재 미화’라는 낙인을 찍으려 하는가. 전자에는 이해와 관용을 요구하고 후자에는 침묵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민주주의의 원칙이 아니라 진영의 편의다.
또한 심각한 것은 정치권이 만들어내는 공론장의 분위기다. 공적을 말하는 순간 독재 옹호자로 몰리고, 토론회를 여는 것만으로 역사 왜곡에 가담한 것으로 취급된다면 자유로운 역사 토론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반박해야 할 주장이 있다면 무엇이 사실과 다른지 밝히면 된다. 무대를 없애라는 요구는 논증을 대신할 수 없다.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논의는 언제든 열려있다. 이승만 정부의 권위주의와 3·15 부정선거, 박정희 대통령 집권기의 정치적 억압 문제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논쟁을 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고통받은 국민들이 있다면 그 부분도 가볍게 취급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 잘못을 지적하는 일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국가 생존, 산업화와 경제성장의 성과까지 지우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공적을 인정한다고 과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듯, 과오가 있다고 공적까지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박정희 시대의 경제성장이 훗날 민주주의 발전에 어떤 사회·경제적 토대를 제공했는지는 대한민국이 더 깊이 토론할 수 있는 주제다. 바로 이처럼 구분하고 따지는 것이 역사 평가다. 논쟁적인 발언 하나를 이유로 포럼 전체를 금기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은 역사 이해를 넓히지 못한다.
역사 속에서는 늘 ‘착한 독재’와 ‘나쁜 독재’가 존재했다. 그렇다면 권력이 국민에게 무엇을 남겼는지부터 물어야 한다. 분단과 전쟁, 극심한 빈곤과 체제 대결이 겹친 한반도의 특수한 현실에서 대한민국의 권위주의 통치에는 국가 생존과 정치적 안정을 꾀한다는 측면이 있었다. 그 과정의 억압과 희생은 비판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 비판이 대한민국의 건국과 산업화, 오늘의 번영으로 이어진 역사적 성취까지 부정하는 구실이 돼서는 안 된다.
북한 김씨 왕조는 권력을 세습하면서 주민에게서 자유와 선택권을 빼앗았다. 국가의 자원을 정권 유지에 쏟아붓고, 주민을 어둠과 절망 속에 가둔 채 나라의 미래마저 침몰시키고 있다. 반면 대한민국은 이승만 시대의 국가 수립과 생존의 토대, 박정희 시대의 산업화를 거치며 세계사에서도 보기 드문 번영의 길을 열었다. 그 토대 위에서 국민은 민주화를 이루고 선진국을 건설했다. 두 체제의 역사를 ‘독재’라는 한 단어로 묶어 같은 무게로 평가하는 것은 결과와 책임을 외면하는 일이다.
‘착한 독재’라는 표현이 의미를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은 억압 자체가 선했다는 뜻이 아니다. 권위주의의 과오에도 불구하고 국가 발전의 기반을 마련해 국민이 더 풍요롭고 자유로운 미래로 나아갈 여건을 남겼다는 역사적 평가다. 반대로 ‘나쁜 독재’는 국민의 삶과 나라의 미래를 지배 가문의 영구집권에 종속시키는 권력이다. 전자는 공과를 함께 따져야 할 역사이고, 후자는 지금도 주민의 자유를 짓누르는 현실이다.
그렇다면 국민을 어둠에 가둔 김씨 왕조에는 관대하면서, 대한민국을 일으켜 세운 이승만과 박정희의 공적을 말하는 데만 ‘독재 미화’라는 딱지를 붙일 수 있는가. 국민에게 발전의 토대를 남긴 권력과 국민에게 세습의 족쇄를 채운 권력조차 구별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독재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역사를 거꾸로 세우는 진영의 독선이자 반동이다.
<論 說 委 員 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