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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넷 캡쳐 |
북한이 문학을 통해 다시 한번 ‘조국을 위한 헌신’을 강조하고 나섰다. 그러나 헌신이라는 말이 성립하려면 무엇보다 개인에게 선택할 자유와 거부할 자유가 보장돼야 한다.
국가가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사회에서 ‘자발적 헌신’을 이야기한다면, 먼저 그 선택이 정말 자유로운 것이었는지부터 물어야 한다.
조선신보는 16일 ‘헌신은 나의 인생을 포기하는 것인가’라는 글을 통해 백현숙의 단편소설 《산나리꽃》을 소개했다. 작품은 젊은 시절 최전선 산간마을로 ‘탄원’한 어머니 경애와 같은 길을 택하려는 딸 수련, 분교 교원 정단경의 이야기를 통해 ‘조국에 대한 헌신’의 의미를 설명한다.
흥미로운 것은 작품이 북한 농촌과 산간지역의 열악한 현실을 스스로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점이다.
주인공 경애는 외딴 산골에서 극심한 외로움을 겪고, 대톱과 도끼를 들고 일하며 손에 물집이 잡힌다. 무엇보다 딸의 교육 문제 앞에서는 자신의 ‘탄원’을 후회하기까지 한다. 작품 속 분교는 교사가 4년에 한 번씩 바뀌고, 심지어 교사가 아예 없을 때도 있었다고 묘사된다.
그런데 작품은 여기서 근본적인 질문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왜 한 아이가 사는 지역에 따라 정상적인 교육조차 받기 어려워야 하는가. 왜 교사가 지속적으로 근무할 수 없는가. 왜 주민들의 생활환경을 개선하는 대신 개인의 희생을 ‘헌신’이라는 이름으로 해결하려 하는가.
오히려 그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희생과 도덕성으로 덮는다.
산간벽지에 사람이 부족하면 국가가 지역 격차와 생활조건을 개선해야 한다. 교육 환경이 열악하면 학교와 교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것이 국가의 책임이다.
그런데 북한 문학에서는 이런 문제들이 종종 ‘누가 더 어려운 곳으로 자원해 들어가느냐’는 충성의 문제로 전환된다. 그 순간 국가의 책임은 사라지고 개인의 희생만 남는다.
‘탄원’은 과연 얼마나 자발적인가
더 중요한 문제는 북한이 강조하는 ‘탄원’과 ‘헌신’을 일반적인 자유사회의 자원봉사와 같은 개념으로 볼 수 있느냐는 것이다.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는 2024년 북한의 강제노동 실태를 조사한 보고서에서 북한 주민들이 광범위하고 다층적인 강제노동 체계 속에서 통제되고 있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구금시설 노동뿐 아니라 국가가 배정하는 직장, 군 복무, 돌격대, 각종 노력동원, 해외 노동 등을 주요 유형으로 제시했다. 보고서는 2015~2023년 탈북한 피해자와 목격자 등 183명의 인터뷰를 토대로 작성됐다.
특히 유엔은 북한에서 학교나 군 복무를 마친 주민들이 국가로부터 직장을 배정받고, 이것이 사실상 거주지역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지적했다. 자유롭게 직업을 선택하기 어렵고 출근하지 않을 경우 처벌 위험까지 존재한다는 것이 보고서의 설명이다.
이런 현실을 고려하면 ‘탄원’이라는 단어만으로 그 행위가 완전히 자발적인 선택이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선택하지 않을 자유가 없다면 선택의 의미도 달라진다.
국가가 해야 할 일을 왜 개인에게 희생시키는가
《산나리꽃》의 이야기는 역설적으로 북한 체제가 안고 있는 문제를 보여준다.
어머니는 딸에게 자신이 겪은 삶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 도시로 보내려 한다. 이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부모의 마음이다. 좋은 교육을 받고 더 나은 환경에서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은 어느 사회에서나 부모가 자녀에게 품는 희망이다.
그런데 북한식 서사는 이런 개인의 소망을 다시 ‘조국과 공동체를 위한 헌신’이라는 틀 안으로 끌어들인다.
여기서 헌신은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라기보다 국가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개인의 책임감과 희생정신으로 보완하는 수단으로 기능할 위험이 있다.
도로가 부족하면 도로를 건설해야 하고, 학교가 부족하면 학교를 세워야 하며, 교원이 부족하면 교원에게 충분한 처우와 생활환경을 제공해야 한다.
그것이 국가의 역할이다. 국민에게 계속해서 “더 희생하라”고 요구하는 것으로 국가의 책임을 대신할 수는 없다.
헌신의 전제는 ‘자유’다
조선신보 글의 출발점에는 한 일본 대학생의 질문이 등장한다.
“국가를 위한 헌신은 자기희생이 아닌가?” 오히려 이 질문이 작품 전체보다 본질에 가깝다.
헌신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가족을 위한 헌신도, 공동체와 나라를 위한 봉사도 어느 사회에서든 존중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 가치가 성립하려면 반드시 전제가 필요하다.
헌신할 자유와 함께 헌신하지 않을 자유도 있어야 한다. 어디에서 살지, 어떤 직업을 가질지, 국가의 요구를 받아들일지 거부할지 개인이 결정할 수 있을 때 ‘헌신’은 비로소 숭고한 선택이 될 수 있다.
그 자유가 충분히 보장되지 않는 사회에서 국가가 문학까지 동원해 끊임없이 희생과 탄원을 아름답게 묘사한다면, 그것은 ‘헌신의 미학’인 동시에 국가가 개인에게 요구하는 희생을 정상화하는 서사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산나리꽃》이 던진 질문에 대한 답도 결국 여기에 있다. 헌신은 인생을 포기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국가가 국민에게 인생을 포기하도록 요구하면서 그것을 ‘헌신’이라고 부르는 순간, 문제는 헌신하는 개인이 아니라 그런 희생을 필요로 하는 체제에 있다.
김·도·윤 <취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