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알리자 아빌라 슈발리에는 맨해튼 북부 지역의 새로운 연방 하원의원 후보로, 미국민주사회주의자들(DSA)의 지원을 받고 있으며 맘다니의 지지도 받고 있다. 그녀는 내가 컬럼비아대학교에 다니던 시절 같은 학교에 있었던 학생들 가운데 가장 위험한 인물 중 하나가 되어가고 있다.
그녀는 우리의 모교를 2016년에 졸업했지만, 이후 다시 학교로 돌아와 내가 4학년이던 때 벌어진 가자지구 연대 천막 농성에서 지도자로 활동하며 캠퍼스의 핵심 인물로 부상했다. 지난 6월 예비선거에서 승리한 뒤 사실상 연방의회 입성이 확실시되는 그녀는 이스라엘에 대한 모든 원조 중단에서부터 교도소와 국경의 폐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정책적 입장을 전국적 정치 담론의 장으로 가져오게 될 것이다.
그녀의 견해는 나와 함께 학교를 다닌 많은 동문들도 공유하고 있다. 졸업식에서 우리 학년 전체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른바 ‘텐티파다(tentifada)’ 지도부에 박수를 보냈다. 미국에서 가장 뛰어나고 총명한 젊은이들 가운데 속한다고 여겨지는 내 동료들은 압도적으로 터무니없고 혐오스러운 일련의 반유대주의적 관념을 믿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함께 받은 교육의 무엇이 이 젊은 지성들로 하여금 이처럼 해로운 사고방식에 빠지도록 준비시키고 있는 것일까?
컬럼비아의 핵심 교양과정에 속하는 많은 강좌와 마찬가지로 ‘인문학 문학 1001(Literature Humanities 1001)’도 약 스무 명의 학생이 참여하는 소규모 세미나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수업 참여도는 최종 성적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다. 어떤 학생들은 너무 수줍어 발언하지 못했고, 자신이 망신당할 위험을 감수하느니 차라리 성적에서 불이익을 받는 편을 택했다.
특히 우리 반에는 야구부 소속 학생 한 명이 있었는데, 그는 매 수업마다 정확히 한 번만 발언하도록 신중하게 행동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이것이었다. 그는 어떻게 된 일인지 그 단 한 번의 발언을 통해, 자신이 과제로 주어진 텍스트를 단 한 쪽도 읽지 않았다는 사실을 어김없이 반 전체에 입증해 보였다.
그 운동부 동급생의 독특한 세미나 발언은 우리 강의실에 만연해 있던 현상을 눈에 띄게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에 불과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우리 모두가 그와 똑같은 게임을 하고 있었다. 다만 대부분은 그보다 그 게임을 더 잘했을 뿐이다. 세미나가 열릴 때마다 스무 명의 학생들은 한 테이블에 둘러앉아 모두 같은 목표를 품었다.
교수에게 우리가 과제로 주어진 내용을 읽었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실제로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거의 혹은 전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심오하고 그럴듯해 보이는 방식으로 텍스트를 논하려 애썼다.
위험 부담은 크고 정보는 제한된 모든 게임이 그렇듯, 여기에도 위험과 보상 사이에서 따져야 할 선택들이 많았다. 존 스튜어트 밀의 언론 자유 절대주의에서 발견한 결함을 지적해야 할까? 하지만 내가 읽지 않은 바로 그 장의 뒷부분에서 밀이 그 문제를 명시적으로 다뤘을지도 모른다.
셰익스피어의 대사가 햄릿과 오필리아의 기묘한 관계를 어떻게 밝혀주는지 논평해야 할까? 그런데 그 둘이 남매였는지, 부부였는지, 사촌이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발언이 구체적일수록 속임수가 탄로 날 위험은 커진다. 반대로 발언을 지나치게 모호하게 만들면 더 이상 의미 있는 수업 참여라고 할 수 없게 된다.
나는 세미나가 이런 식으로 운영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결국 그것을 받아들였다. 4년 동안 나는 주어진 현실 속에서 얻을 수 있는 교육을 목마르게 받아들였고, 그 모든 상황이 얼마나 기묘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이제 2년이 지나 뒤돌아보니, 나는 바로 이 게임이 미국 최고의 고등교육기관들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보여주는 핵심이라고 믿게 되었다. 대학 세미나가 학생들에게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주제에 대해 자신감 있게 말하는 것을 보상한다면, 학생들은 결국 바로 그런 일을 능숙하게 해내는 전문가가 된다.
우리의 가장 뛰어나고 총명한 젊은 지성들은 ‘가짜 세미나’라는 연기를 반복하면서, 어떤 사상을 부분적으로만 이해하고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훈련을 받아왔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식에 공백이 있다는 사실을 드러낼 수도 있는 질문과 모순을 억누르는 법을 배웠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피상적인 지식을 진정한 이해와 동일시하도록 교육받은 나머지 이제는 그 둘을 언제나 구별할 수조차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지금 미국은 내가 동급생들과 세미나에서 했던 바로 그 게임이 국가적 무대에서 펼쳐질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목격하고 있다. 슈발리에는 내 동급생들이 호메로스나 칸트, 혹은 중동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만큼이나 국가 정책의 기본 원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녀 역시 내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어떤 주제에 관해 지식이 부족하다는 사실 때문에 그 주제에 대해 거침없는 열정과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자신 있게 말하도록 훈련받았다. 불행히도 그녀의 잘못된 정보에 기초한 정책적 입장들은 지극히 위험하기까지 하다.
사람들은 학생들 스스로가 잘못된 교육을 받은 데 책임이 있다고 비난하고 싶은 유혹을 느낄 수 있다. 왜 그들은 세미나에 진지하게 참여하는 대신 연기하듯 세미나를 수행하기로 했는가? 왜 수업에 들어오기 전에 시간을 내어 지정된 텍스트 앞에 앉아 그것을 읽으려 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이 학생들이 근거 있는 독서와 연구가 학문적 성공에 불필요하다는 결론에 스스로 도달한 것은 아니다. 훨씬 더 깊은 문제는 대학이 교육의 유일한 중심 과제로 ‘비판적 사고’에 지나치게 매혹되어 있다는 데 있다.
나는 미술사 수업에서 있었던 한 장면을 생생히 기억한다. 교수는 자크루이 다비드의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를 슬라이드로 보여주고 우리에게 작품을 분석해보라고 했다. 그러나 나와 동급생들 가운데 누구도 호라티우스 형제가 누구인지, 혹은 이 그림이 무엇을 묘사하고자 한 것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 결과 이어진 것은 색채의 사용이나 그림 속 인물들의 감정에 관한 피상적인 관찰들의 연속이었다.
음악 수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대부분이 기초적인 음악이론조차 배운 적이 없었는데도 여러 음악 걸작을 분석하는 에세이를 써야 했다. 메시지는 분명했다. 진지한 학습이 전혀 없어도 ‘비판적 사고’가 최고라는 것이었다. 학생들이 수업에 들어오기 전에 주어진 자료를 읽는 일의 가치를 점차 낮게 평가하게 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자신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주제에 관해 비판적으로 사고하려 애쓰는 시시포스적 부조리 외에도, 이 교육 방식에는 더욱 근본적인 결함이 자리하고 있다. 지식의 토대는 자신의 무지를 아는 데 있다. 비판적 사고는 교육에 필수적이지만, 그것은 인간 정신 안에 자리 잡은 깊은 겸손에서만 생겨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겸손은 우리가 이어받은 위대한 지적 전통의 뛰어난 사상가들과 작품을 진지하게, 반복적으로 만나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인격적 덕목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육자들은 너무도 자주 그 대신 학생들에게 정당한 근거 없이 얻은 자존감과 자기 중요성을 불어넣으려 하고, 어떤 주제에 대해서든 자기 혼자만의 비판적 사고만으로 충분하다고 믿게 만들려 한다. 우리는 지금 이러한 잘못된 선택이 초래할 파괴적인 결과의 시작을 목격하고 있을 뿐이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