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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A 가톨릭 322] 질투가 묵시록적 양상으로 변할 때

2026-04-28 08:18 | 입력 : 리베르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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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 헨더숏 Anne Hendershott is a professor of sociology at Franciscan University of Steubenville. 사회학 교수.


피터 틸의 최근 유출된 적그리스도에 관한 강연들—비밀리에 녹음되어 지난해《가디언》에 의해 공개된 것들—은 모방 욕망과 종말론적 위기의 이론가였던 고 르네 지라르의 묵시록적 인간학과 맞닿아 있는 세계관을 드러낸다.

틸은 현대 세계를 “적그리스도 아니면 아마겟돈” 사이에 매달려 있는 것으로 묘사한다. 그는 이 선택을 단순한 은유가 아니라 우리 시대의 중심적인 정치적 딜레마로 다룬다. 부상하는 “단일세계 국가”에 대한 그의 경고와, 실존적 공포가 “부정의한 평화”를 만들어내기 위해 동원되고 있다는 그의 주장은, 모방적 상승작용과 거짓 평화의 유혹적 약속에 관한 지라르의 저술을 떠올리게 한다.

틸에게 있어 기술의 가속화, 세계주의, 그리고 증대되는 도덕적 공황은 서로 분리된 흐름이 아니라, 적그리스도적 인물이 그럴듯하게 등장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내는 수렴적 힘들이다.

르네 지라르는 전통적인 희생 제의 구조들이 붕괴되고 나면, 사회들이 새로운 형태의 만장일치를 통해 거짓 평화를 추구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틸의 강연은 바로 이러한 불안을 반영한다. 그는 세계적 기구들이 기술적 위험과 지정학적 불안정을 새로운 통합의 위협으로 삼는 공동 서사를 중심으로 결집하고 있다고 의심한다.

틸은 금융 규제기관에서 유엔에 이르기까지 국제기구들이 실존적 위험을 내세우고, 점점 더 확장되는 통제를 요구하는 보편적 평화를 약속함으로써 권위를 집중시키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이야말로 지라르가 두려워했던 바로 그 역학이다. 곧 갈등을 너무나 두려워한 나머지 자유와 이견, 심지어 혁신마저도 안전이라는 환상을 위해 기꺼이 내어주는 세계 말이다. 지라르에게 그러한 체제는 적그리스도에 대한 처방이 아니라, 오히려 적그리스도의 정치적 형태이다.

틸이 여기에 더하는 것은, 지라르가 2015년 사망하기 전 예견했지만 체계적으로 탐구하지는 못했던 기술적 차원에 대한 경고이다. 그의 강연에서 틸은 다니엘서의 종말 예언으로 눈을 돌려, 그것을 기술적·세계적 가속화라는 렌즈를 통해 해석한다. 곧 과학적 혁신에 의해 추진되면서도 자기 자신의 발명품에 대한 두려움으로 마비된 세계라는 관점이다. 그는 “적그리스도의 단일세계 국가가 지닌 위험”을 경고한다.

틸에게 있어, 인공지능 위험이나 지정학적 안정이라는 이름으로 기술 발전을 멈추자는 요구들은 더 깊은 영적 위기의 증상이다. 틸의 견해에서—지라르와 마찬가지로—현대 세계는 통제 불능의 혁신과, 과학과 기술을 제자리에 얼어붙게 하려는 똑같이 위험한 환상 사이에 사로잡혀 있다. 이것은 지라르가 모방적 덫의 마지막 단계로 이해했던 긴장이다.

그 단계에서 우리는 묵시록적 공포와 총체화된 평화의 거짓 약속 사이를 오가게 된다. 틸의 강연들이 또한 보여주는 것은, 이러한 모방적 위기들을 추동하는 데 있어 질투가 핵심적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지라르에게 질투는 사적인 악덕이 아니라 모방적 경쟁의 엔진이다. 곧 다른 이가 가진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 다른 이가 된 것을 자신도 되고자 하는 욕망, 그리고 마침내 그 존재 자체가 자신의 부족함을 외면할 수 없게 만드는 경쟁자를 제거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기술의 영역에서 질투는 더욱 강력하게 증폭된다. 인공지능은 지식을 가속화할 뿐만 아니라 비교 또한 가속화한다. 그것은 원한을 품은 개인들, 국가들, 제도들이 서로를 끊임없이 견주게 만드는 더욱 연결된 세계를 만들어낸다. 틸에게 있어, 인공지능에 관한 기술 발전을 중단하라고 요구하는 이들은 그 내면 깊은 곳의 더 근본적인 영적 불안을 감추고 있는 것이다. 이것 역시 지라르적인 통찰이다. 질투는 불평등과 취약성이 인식되는 조건에서 번성하며, 화해를 통해서가 아니라 경쟁자의 억압을 통해 안도감을 찾고자 한다.

이런 의미에서, 기술적 혹은 지정학적 위협으로부터의 안전을 약속하는 “단일세계” 국가에 대한 현대의 요구는 질투의 정치적 형태로 읽힐 수 있다. 그것은 모든 차이를 하나의 통제적 권위 안으로 흡수함으로써 경쟁자를 무력화하려는 욕망이다. 지라르가 보기에 적그리스도의 거짓 평화를 위한 길을 예비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질투에 의해 움직이는 획일성에 대한 욕망이다.

틸은 또한 적그리스도가 반드시 “젊은 정복자”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곧 서른세 살에 죽은 그리스도를 능가할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붓다, 심지어 톨킨의 호빗들에 관한 그의 성찰은 무작위적인 곁가지가 아니다. 그것들은 한 시대의 결정적 인물이란 젊음이 무한한 가능성을 상징하고, 그의 부상이 전 세계적 비교를 촉발하는 그런 인물일 것이라는 그의 믿음을 드러낸다.

이미 질투로 포화된 세계에서 카리스마 있는 젊은 지도자의 등장은 단지 그럴듯한 일이 아니라 필연적인 일이 된다. 지라르에게 그러한 인물은 단순한 물리적 폭력만으로 부상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카리스마와 자신이 불러일으키는 질투, 그리고 그를 따르고 모방하거나 파괴하려는 타인의 욕망을 통해 부상한다. 그러한 지도자가 실존적 공포를 이용해 전례 없는 권력을 집중시킬 수 있다는 틸의 불안은, 그 핵심에서 질투의 정치적 힘에 대한 인식이다. 곧 질투가 스스로 불붙인 경쟁에서 벗어나려는 희망 속에서 사회들이 지배를 받아들이도록 준비시킨다는 점에 대한 인식이다.

지라르에 관한 논의에서 자주 간과되는 것, 그리고 틸이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지라르의 모방적 위기에 대한 전체 분석이 그의 로마 가톨릭 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라르는 그리스도교가 희생양의 무죄를 드러냄으로써 모든 인간 문화의 폭력적 토대를 폭로했다고 믿었다. 그 결과 한때 사회들을 결속시켰던 희생 제의적 장치들은 약화되었다.

지라르는 이 계시가 역사를 카테콘—혼돈을 억제하는 힘—과, 인간의 공포를 이용해 거짓 평화를 강요하는 인물인 적그리스도 사이의 최후 대결을 향해 가속한다고 보았다. 틸은 세계적 제도들을 잠재적 카테콘적 억제력으로 보지만, 동시에 그것들이 자신들이 막겠다고 주장하는 바로 그 지배의 도구가 될 수도 있다고 두려워한다. 이것이 전형적인 지라르의 통찰이다.

곧 폭력을 막아두는 동일한 구조들이 질투나 모방적 전염의 압력 아래에서 새로운 총체적 질서로 변질될 수 있다는 인식이다. 카테콘과 적그리스도를 함께 언급함으로써, 틸은 희생 제의적 보호 장치를 상실하고 모방적 경쟁으로 포화된 현대 세계가 지라르가 경고했던 거짓 평화가 마침내 정치적 형태를 취하는 순간을 향해 표류하고 있다는 가톨릭적 불안을 표현하고 있다.

지라르의 가톨릭적 비전의 중심에는 십자가가 희생양 메커니즘을 있는 그대로 폭로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한때 모방적 폭력을 억제하던 문화적 “배출 밸브”를 제거했다는 확신이 있다. 성사적 세계 안에서 이러한 계시는 손실이 아니라 변형이다. 성체성사가 질투와 원한을 그리스도의 자기 증여적 사랑 안으로 흡수하는 비폭력적 희생 제사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사를 버리면서도 모방 욕망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세속 시대에서, 우리는 출구 없이 남겨진다. 우리는 여전히 희생양을 찾는다. 정치적 적, 이념적 반대자, 세계적 제도들이 그 대상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폭력을 화해로 돌려놓았던 신학을 더 이상 갖고 있지 않다. “부정의한 평화”를 향해 소용돌이치는 세계에 대한 틸의 불안은 바로 이 부재를 반영한다. 질투와 경쟁을 흡수할 수 있는 성사적 중심이 없을 때, 사회들은 대신 통제와 감시, 그리고 거짓 만장일치로 향한다. 희생 제의적 충동은 남아 있지만, 그 구속적 형태는 잊혀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라르의 가톨릭 종말론이 틸의 현시대 해석에 그토록 깊이 중요한 이유이다. 지라르에게 카테콘은 성 바오로가 묘사한 신비로운 억제력이다. 곧 적그리스도의 완전한 드러남을 막아서는 힘이다.

테살로니카 2서 2장 6–7절에서 바오로는 카테콘이 모방적 폭력을 여전히 억제하고 있는 모든 것—법, 전통, 성사, 그리고 질서를 보존하는 취약한 정치 구조들—을 포괄한다고 암시한다. 그러나 이러한 억제력들이 약화되면, 한때 질서를 보존했던 바로 그 힘들은 적그리스도에게 포섭될 수 있다. 적그리스도는 감시와 차이의 억압 위에 세워진 거짓 평화를 제시한다.

틸의 경고는 단순히 정치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사적 상상력—모방적 전염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형성할 수 있는 교회—이 없다면 세계는 결코 평화가 아닌 평화를 향해 표류한다는 지라르의 확신을 반향한다. 이런 의미에서 틸의 묵시록적 언어는 지라르의 마지막 통찰을 조금 더 세속화한 버전에 지나지 않는다. 곧 카테콘과 적그리스도 사이의 투쟁은 궁극적으로 인류가 미래의 조직 원리로서 희생적 사랑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희생적 폭력을 택할 것인가를 둘러싼 투쟁이라는 통찰이다.

분별이 공황으로 바뀌는 지점에서, 틸의 비판자들은 자신들의 모방적 얽힘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프란치스코회 윤리학자이자 인공지능에 관한 바티칸 자문역인 파올로 베난티 신부는 최근 틸을 이단자로 낙인찍었다. “틸의 전체 작업은 자유주의적 합의에 대한 지속적인 이단 행위, 곧 시민적 공존의 토대 자체에 대한 도전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베난티 신부는 복합적인 지적 기획을 일종의 이념적 일탈로 재구성한다. 그의 비난은 틸의 실제 주장보다 베난티 신부 자신의 고조되는 모방적 불안을 훨씬 더 많이 드러낸다.

틸은 지라르가 그랬던 것처럼, 성사가 사라지고 질투에 휩싸이며 모방적 경쟁에 의해 움직이는 세상은 점점 더 그 내재된 폭력을 억제하지 못하게 되어, 우리 모두를 지라르가 적그리스도의 전조가 될 것이라고 믿었던 가짜 평화에 무방비 상태로 내몰게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틸의 강연들—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해결되지 않은 불안을 지닌 이들로부터 불러일으킨 듯한 공황—은 현대 세계가 공포와 질투, 기술적 가속화가 한데 모여 지배를 우리의 구원처럼 보이게 만드는 순간을 향해 표류하고 있다는 커져가는 경고를 반영한다.

성사적 쇄신이 없다면, 지라르가 처음 식별했고 틸이 이제 이름 붙이는 모방적 힘들은 계속 표면 아래에서 작동하며 우리의 정치와 우리의 영혼 자체를 부패시킬 것이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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