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선거 이전, 트랜스젠더 문제는 많은 부모들에게 중대한 현안으로 떠올랐다. 이들은 자녀의 이른바 “성 정체성”과 관련하여 부모의 권리가 잠식되는 것을 우려했다.
“그들이 당신 아이들을 트랜스젠더로 만들러 오고 있다”라는 말은 수사학적 힘을 지녔는데, 이는 많은 이들이 그것을 매우 현실적인 위협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곧 퀴어 로비에 얽매인 정치인들이 승리할 경우 현실화될 위협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선거 이후 조류는 바뀐 듯 보인다. 최근 많은 이들이 이 문제에서 이성이 돌아오는 듯한 상황을 내가 고무적으로 보는지 물어왔다.
짧게 답하자면 “그렇다.” 5년 전, 트랜스젠더 이데올로기가 패배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대해 나의 대답은 조건부였다. 결국 이성이 승리하겠지만, 아마도 내 생애에는 아닐 것이라는 것이었다. 인간이라는 존재에 관한 어리석고도 무의미한 관념을 사회 조직의 중심 원리로 그토록 오래 둘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현실이 반격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현 행정부 아래에서 여성 스포츠, 탈전환자들의 부상하는 영향력, 그리고 이성을 옹호하는 발언을 기꺼이 하려는 공적 인물들의 증가라는 면에서 진전이 있었다.
그러나 지난 몇 년간의 모든 진전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 승리의 개선행진을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본다. 첫째, 트랜스젠더주의는 인권 캠페인과 같이 부유하면서도 교활한 조직들의 지원을 받고 있다. 또한 그것은 전투적인 행동 단체들까지 낳았다. 영국에서 출현한 전투적 친트랜스 직접행동 단체 ‘배시 백(Bash Back)’은 의미심장하다. 이 단체는 자신들이 “비폭력적”이라고 주장하면서도 “트랜스혐오”에 대한 폭력적 저항 지침을 발표했다.
아마 이것 역시 몸과 젠더에 관한 그들의 역설적 철학이 또 한 번 적용된 것일 것이다. 곧, 자기 동일시가 현실과 정면으로 모순되는 것이다. 적어도 그 홍보물에 나타나는 복면을 쓴 차림의 분위기는 준군사조직의 그것과 일치한다. 배시 백과 같은 단체들의 등장이 희망적인 징후일 수도 있다. 문화전쟁에서 이기고 있다면 게릴라전 전략을 채택할 필요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이 문제가 곧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는 징표이다.
둘째, 트랜스 로비는 여전히 언론의 상당 부문에서 활약을 하고 있다. 노골적으로 트랜스젠더의 허튼소리를 밀어주는 이들이든, 트랜스젠더라는 이유로 살인자에게 선호 대명사를 써 주는 유용한 바보들이든 마찬가지이다. 그런 기자들은 가해자의 트랜스젠더 정체성이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마치 그것을 언급하는 순간, 모든 성별 불쾌감을 가진 사람이 집단살인을 저지를 잠재적 살인자라는 비약적 결론에 동의하게 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셋째로, 더 눈에 띄지 않지만 더 음험한 위협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트랜스젠더주의는 그저 LGBTQ+ 정치 로비의 일부일 뿐이다. 실제적인 차원에서는 그것이 맞다. 그러나 그렇게 보면 그것을 더 넓은 철학적 맥락으로부터 떼어놓게 된다. 그 맥락이 바로 트랜스휴머니즘이다.
이것은 인간의 육체적 한계, 예컨대 신체적 힘과 죽음에 대한 조급함, 그리고 그러한 한계를 초월하고 극복할 방법들에 대한 헌신을 공유하는 철학들의 계열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러한 야심은 지금도 건재하며, 트랜스젠더 문제에서 트럼프 행정부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돕는 데 일조한 바로 그 인물, 일론 머스크에게서도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트랜스젠더 문제는 애초부터 대중 홍보적 차원에서 문제를 안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우리 치료문화적 세계 속에서 아마도 대다수 사람이 여전히 동의하는 마지막 도덕 원리들 가운데 하나일지도 모르는 “공정성”의 직관적 미감과 지속적으로 충돌하기 때문이다.
퀴어 이론가들이 대학원 세미나에서 그들의 불쾌한 상투어를 늘어놓는 것이나, “드래그페이스(화장)”를 한 기괴한 여성혐오자들이 매년 6월 프라이드 행진에서 거리를 활보하는 것은 한 가지 일이다. 그러나 승리 단상 위에서 명백히 남성인 수영선수가 왜소한 여성 경쟁자들 위에 우뚝 서 있는 광경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본능적 혐오감과는 경쟁할 수 없다. 여론의 법정에서 주디스 버틀러 같은 인물을 반박하는 데 있어, 그런 장면은 참으로 천 마디 말보다 더 큰 힘을 지닌다.
반대로, 트랜스휴머니즘의 어떤 형태들은 그러한 문화적 불리함을 전혀 겪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은 우리의 치료문화가 형성한 욕망들과 깊이 공명하는 것들을 약속한다. 끝없는 생명, 완벽한 맞춤형 아기, 무한한 힘, 숨 막히는 지성 같은 것들이다. 이 가운데 어느 것도 결코 완전히 성취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이루려는 과정에서 인간성 자체가 해체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치료적 유토피아주의는 하느님처럼 되고자 하며, 그 야망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려는 인간의 근원적 욕망에 호소한다. 트랜스젠더주의는 그것이 너무도 불공정해 보이기 때문에 좌초하고 있다. 반면 트랜스휴머니즘은 많은 이들이 자신의 프로메테우스적 생득권으로 여기는 것을 실현해 주겠다고 약속하기에 번성할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을 포함한 정치계급은, 실리콘밸리의 사람들이 그 기획을 추구하도록 길을 열어주는 데 헌신하고 있다.
우리가 내려야 할 냉정한 결론은 이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당신 아이들을 “트랜스”시키러 오고 있다. 다만 그것은 그들의 성(sex) 차원에서라기보다, 비록 그 싸움도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훨씬 더 깊은 차원, 곧 그들의 인간성 자체의 차원에서이다.
우리는 트랜스 전투에서는 이기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주의하지 않는다면, 트랜스 전쟁에서는 결국 패배할지도 모른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