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나는 보스턴 서부 메트로웨스트 지역에서 선택할 수 있는 학교들에 만족하지 못해 가톨릭 고전 교육 학교를 설립하고자 뜻을 모은 다섯 어머니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해 비좁은 사무실 공간에서 학생 스물다섯 명을 받아들였던 성 베네딕토 고전 교육 아카데미는 이제 학생 385명과 고전 양식에서 영감을 얻은 아름다운 교사, 그리고 긴 입학 대기 명단을 자랑한다. 설립자들이 겪어야 했던 고된 과정과 개인적 희생에도 불구하고, 그 결실은 미국식 방식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내게 심어 주었다. 우리는 무언가를 세울 수 있다.
새롭게 세워 나갈 우리의 역량에 대한 이러한 확신 때문에, 나는 우파가 ‘페미니즘’을 다루는 방식에 당혹감을 느끼곤 한다. 오늘날 대학 교육을 받은 많은 젊은 여성이 가정보다 직업을, 자녀보다 여행을 선택하는 모습을 보면서, 비판자들은 대개 여성 자신을 탓하거나, 더 나쁘게는 여성의 ‘본성’을 탓한다.
오늘날 엘리트 여성들 사이에서 여전히 지배적인 진보적 페미니즘의 서사에 맞서, 지적으로 일관되고 매력적이며 인간의 존엄에 걸맞은 대안을 제시하는 데 관심을 보이는 보수주의자는 너무도 적어 보인다. 문제는 단지 진보주의가 좋은 삶에 관한 그릇된 설명을 내놓았다는 데 있지 않다. 서로 경합하는 여러 선 가운데 올바르게 선택하기 위해 우리 각자에게 필요한 인격 형성을 우리 문화 전체가 소홀히 해 왔다는 데 있다.
여성들이 앞으로 나아갈 더 나은 길이 있으며, 나는 이제 그 길을 만들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지난달 뉴욕주 로체스터에서 애리조나주립대학교의 ‘시민적 삶과 사상 속 여성을 위한 머시 오티스 워런 이니셔티브’와 그 저널인 《페어러 디스퓨테이션스》는 ‘생명을 선택하는 뉴욕 페미니스트들’과 함께 거의 200명의 여성을 모아 새로운 여성운동을 출범시켰다.
우리는 우리 시대의 통념에 도전하는 가장 예리한 여성 사상가들의 이야기를 듣고, 아름다운 곳에서 식사를 함께했으며, 공동의 비전을 제시하기 위해 세네카폴스에서 「상호의존 선언」을 선포했다. 이제 다른 이들에게도 이 선언에 서명하도록 초대하고 있다.
우리의 기획은 현대적 의미의 정치적 기획이 아니다. 어느 연사도 참석자들에게 지역구 의원에게 연락하라고 촉구하지 않았으며, 이러저러한 적대자를 한탄한다고 해서 호응을 얻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우리의 노력은 훨씬 더 오래된 의미에서 깊이 정치적이다. 내가 보기에, 그리고 첫날 저녁 참석자들에게 설명했듯이, 우리는 미국의 선대들, 어쩌면 특히 신생 국가였던 미국의 여성들에게 활력을 불어넣었던 아리스토텔레스적 정치의 의미를 놓쳐 버렸다.
서로 다른 배경과 종교적 신념을 지닌 여성과 남성이 공동의 목적 아래 모여 구체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희망을 잃어버린 것이다. 따라서 첫 모임에서는 그 자리에 있던 대다수가 동의할 수 있는 큰 틀의 원칙들을 제시했지만, 이제 우리의 목표는 구체적인 문제를 함께 해결할 수 있는 더 폭넓은 연대를 구축하는 데 있다.
우리 운동이 지금 당장 대응할 역량을 지닌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만연한 음란물 이용도, 전 세계적으로 이루어지는 대리모 관행도,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을 부당하게 죽이는 일도 아니다. 물론 우리의 선언은 이 모든 것을 명시하고 규탄하며, 이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진정한 문제는 너무도 많은 젊은 여성들, 그리고 남성들 역시 자신의 삶을 정의롭고 용기 있고 절제하며 실천적 지혜를 갖추어 이끌어 갈 주체가 되는 데 필요한 지도와 인격 형성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근대가 특히 여성들에게 실질적인 좋은 것들을 가져다주기는 했지만, 근대는 한때 남녀 모두에게 일상생활을 위한 참된 지침을 전해 주던, 인간의 품격을 높이는 서구의 유산을 저버렸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적 공백은, 우리 각자가 지금 인간다운 삶을 더 잘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젊은이들도 그렇게 하도록 돕지 않는다면, 앞서 언급한 불의들을 바로잡는 일이 앞으로 갈수록 어려워질 수밖에 없음을 뜻한다. 현대의 삶에 존재하는 수많은 다른 비인간적 위협들은 말할 것도 없다.
세 차례 결혼하고 이혼한 어머니 밑에서 자랐고, 청소년기에 두 남자 친구의 자살로 깊은 충격을 받은 나는, 사회 보수주의자들이 미국인들로 하여금 개인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자치 능력을 갖춘 사람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경고했던 흐름들을 몸소 겪었다. 광범위한 세속화, 세대를 거치며 진행된 가정생활의 붕괴, 그리고 교양교육의 뚜렷한 쇠퇴가 그것이다. 온라인 음란물의 등장으로 서서히 타락해 가던 문화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나는 진보주의에 맞서는 가장 풍요로운 대안이 내 삶 전체를 변화시키는 경험도 했다. 하루하루, 올바른 행동을 하나씩 실천하면서 말이다. 그 어머니들과 함께 학교를 세우는 동안, 나는 남편과 함께 자녀가 많고 행복한 가정도 이루어 갔다. 그리고 본받을 만한 모범도 부족하고 삶을 위한 실질적 지도도 거의 받지 못한 채 자란 여성에게는, 이것이 훨씬 더 벅찬 과업이었다.
오늘날 많은 여성은 나의 성인 딸들이 자란 방식보다는 내가 자란 방식에 더 가깝게 성장했다. 부모가 결혼했거나 혼인 관계를 유지한 여성들조차도,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문화 환경 속에서는 내가 깊은 고통을 겪으며 찾아낸,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나를 찾아온, 삶을 위한 풍요로운 지침을 접할 기회가 비교적 적다.
우리의 선언에 영감을 준 것은 수십 년, 아니 수백 년에 걸친 삶의 경험을 응축한 바로 이러한 지혜다. 우리는 과거를 돌아봄으로써 새로운 목적을 품고 앞으로 나아간다. 그 목적은 남성과 여성과 아이들 사이의 상호의존이라는 현실, 그리고 모든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이 지닌 육체적이며 초월적인 본성에 대한 이해에 바탕을 둔다.
종교적 신앙에서 힘을 얻는 사랑의 모범을 공적 삶에서 좀처럼 찾아볼 수 없고, 번성하는 가정들이 서로 결속하여 이루는 튼튼한 공동체를 만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며, 거룩한 길을 밝혀 줄 수도 있는 위대한 고전들이 읽히지 않는 문화 속에서, 여성들이 더 낮은 차원의 선에 끌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남성들도 마찬가지다.
우리 시대는 사회 보수주의자들이 수십 년 동안 해 온 경고가 옳았음을 입증한다. 그러나 문화전쟁에서 패배한다고 해서 모든 것을 잃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이 전혀 새롭다 해도, 인간의 조건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글을 쓰고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설교하던 때와 다르지 않다.
모든 마음은 삶을 위한 참된 지침을 갈망하며, 섭리는 모든 시대에 작용한다. 절망할 겨를은 없다. 우리는 참으로 새롭게 세워 나갈 수 있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