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는 되돌릴 수 없는 영적·존재론적 변화인가, 아니면 요청만 하면 삭제할 수 있는 기록된 개인정보의 한 조각인가? 바로 이 문제가 현재 유럽사법재판소앞에 놓여 있다. 유럽연합(EU)의 일반개인정보보호법(GDPR)에 규정된 ‘삭제권(right to erasure)’을 근거로, 벨기에의 한 냉담 가톨릭 신자가 교회의 세례대장에서 자신의 이름을 삭제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헨트교구는 이를 거부하고 있다.
16세기까지 유럽에서 폭넓게 공유되던 인식은 세례가 유일하며, 반복될 수 없고, 지워질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세례를 되돌릴 수 있는가라는 문제는 로마 제국의 박해 시기에 배교한 그리스도인들을 다시 교회 공동체에 받아들이는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도나투스파 논쟁에서 이미 예고되었다. 교회가 세례 후에도 화해와 회복이 가능하다고 인정했다는 사실 자체가,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지워질 수 없음을 의미했다.
세례의 영속성 문제는 종교개혁이 시작된 지 채 10년도 되지 않아, 스위스에서 재세례파가 등장하고 울리히 츠빙글리가 유아세례 문제에서 초기의 동요를 보이면서 더욱 첨예하게 부각되었다. 재세례파는 유아에게 베푼 ‘세례’가 과연 유효한 세례인가를 두고 논쟁했을 수는 있지만, 그것이 하나의 역사적 사실이었다는 점까지 부인하지는 않았다.
마르틴 루터는 1528년 저술한 『재세례에 관하여』(Concerning Rebaptism)에서, 다른 어떤 교리적 분열이 존재하더라도 세례에 관한 주류 그리스도교의 입장은 세례가 유일하며 반복될 수 없고 최종적이라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세례에 대하여 ‘보라, 세례가 있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아니다. 세례는 남아 있다. 하느님의 명령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분의 명령에 따라 행해진 것은 확고히 서 있으며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사람은 나쁜 그리스도인이 될 수도 있고, 신앙생활에서 멀어진 그리스도인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던 사람’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현재 유럽사법재판소에 계류 중인 사건에서 원고의 손을 들어주는 판결이 나온다면, 그것은 유럽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권리를 근본적으로 제한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세례를 받았다는 역사적 사실 자체는 부인할 수 없다. 그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며 어떠한 결과를 수반하는지는 국가가 관여할 일이 아니다. 국가가 이러한 문제에 개입한다면,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신앙을 실천할 권리를 침해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가톨릭교회는 두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 사이의 혼인을 성사로 본다. 따라서 세례기록을 변경하는 것은 성사에 대한 모독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 혼인을 준비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가 불분명해지고, 그에 따라 그 혼인이 성사혼인지 여부도 불분명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는 성사혼을 원하는 사람과 관련하여 교회가 마치 기억을 잃은 것처럼 행동하도록 요구할 권리가 없다.
이 벨기에 시민이 원하는 것은 유럽 사회를 ‘국가’와 ‘개인들’만으로 축소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개인들과의 모든 관계 (개인 대 개인이든, 교회와 같은 공동체를 통한 관계이든)를 국가의 규제 아래 두려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관계 모델에는 중간 공동체나 독립적인 제도가 자리할 공간이 없다.
그러나 여기에는 현대인의 삶을 매우 심각하게 괴롭히는 또 다른 관념이 작동하고 있다. 바로 자유란 ‘모든 선택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 생각은 모든 것이 언제나 잠정적이고, 언제나 수정되거나 철회될 수 있으며, 언제나 미결정 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믿음에 바탕을 둔다. 이는 자유를 선을 위해 봉사하는 수단으로 보는 유대-그리스도교적 자유 이해와 정면으로 대립한다.
이러한 ‘미결정성’의 지적 대변자 가운데 한 사람은 아일랜드 전 대통령 메리 매컬리스다. 그는 2018년 유아세례를 비판했는데, 그 이유는 아기가 신앙을 선택하기에는 너무 어리다는 재세례파식 반대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유아세례가 사람들을 “평생 복종의 의무에 묶여 있는 영구적인 징집병”으로 만든다고 비판하면서, 그것이 현대적 자유관을 부정한다고 주장했다. 같은 미결정성에 대한 집착은, 자녀가 언젠가 스스로 선택하게 해야 한다는 이유로 자녀의 세례를 미루는 이른바 ‘영적인’ 부모들에게서는 좀 더 미숙한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런 부모들 가운데 누구도 자녀가 열여덟 살이 되어 하버드가 자신에게 ‘맞는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자녀의 교육과 사회화를 미루지는 않을 것이다. 부모는 일반적으로 자녀가 충분히 성장해 여러 선택지 가운데 하나를 고를 수 있을 때까지 언어, 가족, 역사, 도덕적 어휘를 가르치는 일을 미루지 않는다.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보통 무(無)에서 갑자기 선택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선택은 오랜 삶의 궤적, 곧 일련의 결정과 헌신의 연쇄 속에서 형성되며, 그것이 우리를 특정한 방향으로 기울게 한다.
‘선택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 사람을 자유롭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사람을 닻 없는 배처럼 만들어 결국 길을 잃게 한다. 숲에서 길을 잃은 사람은 방향을 찾기 위해 태양을 바라본다. 밤에는 북극성을 바라본다. 고정된 기준점이 없다면 모든 방향이 열려 있을 뿐이다. 그러면 빠져나갈 분명한 길도 없다.
세례는 하나의 고정된 기준점이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세례는 하느님의 자녀로 입양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자녀가 하느님을 떠날 수는 있다. 그것은 친자녀가 부모에게서 도망칠 수 있는 것과 같다. 법적으로는 법원이 부모의 친권을 박탈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법원도 부모와 자녀 사이의 사실 자체를 지워버릴 수는 없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라는 사실은 삭제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아버지 됨의 근원이신” 분과 맺은 우리의 양자적 관계도 지워질 수 없다(에페 3,14-15).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