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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넷 캡쳐 |
추석 극장가에 개봉한 영화 〈암살자(들)〉을 둘러싸고 역사왜곡 논란이 거세다. 1974년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을 소재로 한 이 영화는 사건의 배후에 대한 여러 의혹과 가설을 극적 장치로 끌어들이면서 정치권과 관객 사이에서 적지 않은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번 논란에서 더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는 영화 한 편의 옳고 그름만은 아니다. 문화와 문학은 결코 정치와 무관한 공간에 존재하지 않았다. 한반도의 근현대사를 돌아보면 더욱 그렇다. 남과 북을 막론하고 수많은 문인과 예술가들이 시대를 기록했고 인간의 고통을 증언했다. 동시에 어떤 문인과 예술가들은 권력과 이념에 봉사했고, 때로는 선전과 우상화의 도구가 되기도 했다.
특히 북한 체제에서 문학과 예술은 오랫동안 국가의 정치적 목적과 긴밀하게 결합돼 왔다. 개인의 자유로운 상상과 표현보다는 체제와 지도자를 찬양하는 작품만이 장려되는 구조 속에서 문화는 권력을 견제하는 공간이 아니라 권력을 정당화하는 수단이 되었다.
이는 전체주의 체제가 문화의 힘을 얼마나 중시하는지를 보여준다. 총과 탱크만으로 체제가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잊을 것인지, 무엇을 정의라고 생각하고 무엇을 악이라고 생각할 것인지에 영향을 미치는 이야기와 이미지 역시 정치권력이 탐내는 영역이다.
그래서 전체주의 체제는 언제나 언론과 교육뿐 아니라 문학·영화·연극·미술을 중요하게 다루어 왔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여기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또 하나의 역사가 있다.
바로 이른바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이다. 국가권력이 특정한 정치적 견해나 문화적 성향을 이유로 예술가를 지원이나 활동에서 배제하려 했던 경험은 자유민주사회에서 문화와 권력 사이에 어떤 경계가 필요한지를 되돌아보게 했다.
문화적 편향에 대한 불만이 아무리 크더라도 그 답이 다시 국가권력에 의한 배제와 통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자유민주사회가 전체주의와 다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보고 싶지 않은 영화는 보지 않을 자유가 있다. 비판할 자유도 있다. 잘못된 역사해석이라고 판단한다면 자료와 기록을 통해 반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작품을 금지하거나 창작자를 권력의 힘으로 침묵시키는 방식은 자유민주사회가 선택해야 할 길이 아니다. 진정한 대응은 더 많은 작품을 만드는 것이다.
북한 체제 내부에서 인간의 존엄이 어떻게 파괴됐는지를 증언한 반디의 『고발』 같은 작품을 더 널리 읽게 해야 한다.
전체주의 체제 아래에서 개인과 가족이 어떤 선택을 강요받았는지, 남북 분단이 한 인간의 삶을 어떻게 뒤틀어 놓았는지를 기록한 『남북 혁명가의 대화』와 같은 증언도 세상으로 더 많이 나와야 한다.
정치범수용소 생존자의 이야기, 국군포로의 이야기, 납북자의 이야기, 탈북민의 이야기, 북한 주민들의 일상과 고통을 기록한 수많은 증언도 영화가 되고 소설이 되고 연극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방식이다. 어떤 영화 한 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영화 한 편을 막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열 편, 백 편의 작품으로 답하면 된다.
선전에는 검열이 아니라 진실로 맞서야 한다. 왜곡이라고 생각되는 이야기에는 침묵이 아니라 기록으로 답해야 한다. 문화적 편향이 문제라면 문화적 다양성을 더 넓혀야 한다.
그 과정에서 무엇이 설득력을 얻고 무엇이 역사 속에서 사라질지는 결국 독자와 관객이 판단할 것이다. 자유민주주의 문화가 강해지는 길도 바로 여기에 있다.
문화의 전쟁은 누군가의 입을 막는 순간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잊고 있던 진실을 다시 찾아 읽고, 기록하고, 영화로 만들고, 다음 세대에게 전하기 시작하는 순간 비로소 시작된다.
『고발』을 읽고, 수많은 북한 주민과 탈북민의 증언을 듣고, 『남북 혁명가의 대화』와 같은 기록을 통해 전체주의가 한 인간에게 무엇을 요구했는지를 들여다보는 일도 그 시작일 수 있다.
자유민주사회가 전체주의를 이기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더 많은 진실, 더 많은 기록, 그리고 더 좋은 작품이다.
도·희·윤 피랍탈북인권연대 대표 / 리베르타임즈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