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릭 라이리는 「히틀러 시대의 종말」(2024년 11월호)에서, 최근 수십 년 동안 세속주의가 진전됨에 따라 제2차 세계대전이 도덕적 방향 설정의 원천으로서 신약성경을 대신하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그 거대한 전쟁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에 관한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확신의 토대”를 제공하게 되었다.
라이리는 그 전쟁이 지닌 신화적 힘이 약화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추측한다. 나는 그러기를 바란다. 전쟁이 끝난 지 80여 년이 지난 지금, 베이비붐 세대가 복음의 진리처럼 받아들였던 그 전쟁의 교훈은 이제 유익보다 해악을 더 많이 끼치고 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은 마니교적 사고방식을 부추긴다. 곧 갈등을 완전무결한 악과 흠잡을 데 없는 선이 맞서는 세계사적 충돌로 성급하게 규정하는 사고방식이다. 어쩌면 나치즘에 맞선 투쟁에서는 이러한 이해가 적절했을지도 모른다. 윈스턴 처칠은 히틀러를 저지하지 못한다면 세계는 “왜곡된 과학의 빛으로 말미암아 더욱 사악해지고, 어쩌면 더욱 오래 지속될 새로운 암흑시대”를 겪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나치의 집단학살이 드러나면서 처칠의 암울한 예언은 사실로 입증되었다.
그러나 인간사는 좀처럼 이와 같은 성격을 띠지 않는다. 전체주의의 악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이렇게 말했다. “선과 악을 가르는 경계선은 국가들 사이를 지나가지도 않고, 계급들 사이를 지나가지도 않으며, 정당들 사이를 지나가지도 않는다. 그 선은 모든 인간의 마음 한가운데를, 모든 사람의 마음을 가로질러 지나간다.”
이 위대한 러시아 소설가는 예수님께서 하신 유명한 말씀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이 말씀은 우리를 무장 해제시켜 정당한 대의를 위한 행동을 가로막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성찰을 촉구하고자 하셨다.
자기 성찰은 우리의 정당한 대의조차 결코 순수하고 티 없이 깨끗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며, 부당한 대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도 여러 동기가 뒤섞여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한다. 우리는 천사가 아니기에, 인간의 의로움과 사악함은 결코 순수한 형태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냉철한 역사가는 제2차 세계대전 역시 인간 조건에 필연적으로 내재하는 도덕적 모호성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인정한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이를 공개적으로 말한 적이 없지만, 전시의 여러 결정에는 미국이 유럽 열강을 대신하여 세계 질서의 중재자가 되기를 바라는 그의 열망이 작용하고 있었다.
더욱이 얄타회담에서 루스벨트는 동유럽의 여러 민족 전체가 소련의 지배 아래 들어가는 것을 용인했다. 또한 연합국이 민간인 거주 지역을 겨냥해 벌인 폭격은 원자폭탄 사용으로 절정에 이르렀고, 수십만 명의 무고한 민간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선한 편이 승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 역시 티도 흠도 없는 존재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베이비붐 세대에게 마니교적 사고방식은 거의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다. 그들은 제2차 세계대전을, 그 참혹한 총력전의 시대를 직접 겪은 사람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복잡하고 여러 면에서 불행한 실제 사건들의 집합으로 보기보다는 신화의 렌즈를 통해 바라본다.
많은 베이비붐 세대는 젊은 시절 반전운동에 참여함으로써 자신의 도덕적 순수성을 요란하게 과시했다. 그리고 노년에 권력과 책임 있는 지위에 오른 뒤에는 자신들의 활동을 숭고한 언어로 포장하려 애써 왔으며, 이상화된 제2차 세계대전의 표상은 그러한 포장의 토대를 제공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생각해 보라. 도널드 트럼프는 취임 후 전쟁을 끝낼 타협안을 찾고자 모스크바와 협상을 시작했다. 『포린 폴리시』의 크리스천 캐럴은 트럼프의 시도를 1938년 히틀러와 합의했던 네빌 체임벌린의 행동과 동일시하는 격렬한 비판문을 발표했다. 『뉴욕 타임스』의 토머스 프리드먼도 비슷한 논조로 트럼프에게 “네빌 체임벌린 평화상”을 수여했다.
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의 신화에 기대고 있었다. 그 신화 속에서 1938년 뮌헨에서 히틀러와의 전쟁을 막거나 적어도 늦추려 했던 네빌 체임벌린의 노력은 외교적 오판이 아니라, 악과는 절대로 협상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아보지 못한 혐오스럽고 역사적인 배신으로 변한다.
그러나 이는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블라디미르 푸틴은 아돌프 히틀러가 아니다. 러시아 지도자가 감행한 경솔한 침략은 위대한 승리를 가져오지 못했다. 러시아 제국의 지배에 대한 그의 향수는 위험하며 반드시 견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지배 인종에게 무제한의 특권이 있다는 광적인 관념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의지의 우월성을 내세우는 허무주의적 이념에 의해 불붙은 것도 아니다.
나는 트럼프가 이란과의 타협을 모색하는 과정에서도 우리가 제2차 세계대전과의 비유를 계속 견뎌야 할까 두렵다. 9·11 테러 이후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이슬람 파시즘”이라는 용어를 대중화했다. 더글러스 머리는 최근 10월 7일의 공격과 이에 대한 이스라엘의 대응을 문명의 미래가 걸린 “죽음의 숭배 집단”과의 투쟁으로 규정했다. 우리는 오늘날의 분쟁을 1939년의 렌즈로 바라보라는 끊임없는 요구를 받고 있다.
이처럼 사태의 의미를 극단적으로 부풀리는 것은 결정적 승리, 곧 적의 완전한 패배를 추구하도록 부추긴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1943년 연합국의 카사블랑카 회담에서 추축국(Axis powers)의 무조건 항복을 정책으로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정책은 연합국, 실질적으로는 미국이 독일과 일본을 재편하는 데 자유 재량권을 갖게 된다는 것을 뜻했다.
이러한 역사적 유형은 오늘날 이란을 완전히 패배시키고 그 대리 세력들을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 속에서 되풀이된다. 이와 유사한 야망은 테러와의 전쟁에서도 나타났으며,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실패한 시도들로 전형화되었다. 일부 논평가들은 우리가 충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주장한다.
미국이 “끝까지 버티지” 않았고, 독일과 일본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조건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 실패에서 교훈을 얻어, 이란이 중동에서 문제를 일으킬 역량을 끝장내는 데 필요한 만큼의 무력과 결의를 사용해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이러한 야망은 악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더 나은 세상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이상주의적 입장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현실이 그와 다르다고 생각한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독일 인구의 약 10퍼센트가 사망했고, 독일은 완전히 초토화되었다. 이러한 수준의 파괴를 달성하려면 미국의 총동원이 필요했으며, 그것은 미국이라는 나라를 근본적으로 변모시켰다.
러셀 커크와 리처드 위버 같은 보수주의자들은 이를 개탄했다. 미군은 독일을 점령했고, 오늘날까지도 그곳에 주둔하고 있다. 물론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 내기 위해서는 핵무기 사용이 필요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와 전후에 미국 지도자들이 내린 각각의 전략적·전술적 결정을 옹호할 만한 타당한 논거는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전쟁 전체가 서구 문명에 하나의 재앙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역사가들은 7천만 명에서 8천5백만 명에 이르는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산한다. 그 폭력의 광란에서 오늘날 서구의 미래를 외부의 적들보다 더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영혼을 잠식하는 허무주의가 태어났다.
지금 미국 외교정책의 지침을 얻기 위해 그 전쟁의 선례에 호소하는 사람들은 잘못 판단하고 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잘못된 길로 이끌고 있다. 미국이 독일과 일본에 했던 일을 이란에 그대로 한다면 군사적 승리를 거둘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도덕적 대가는 우리 문명이 아직 간직하고 있는 자기 확신의 마지막 남은 힘마저 완전히 꺾어 버릴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란과의 대결, 그리고 이제 막 태동하고 있는 중국과의 냉전은 제2차 세계대전의 신화가 우리에게 믿도록 부추기는 것처럼 세계 지배를 놓고 경쟁하는 현대 이념들 사이의 거대한 투쟁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오래전에 끝난 그 분쟁이 남긴 것으로 여겨지는 교훈들을 창조적으로 망각해야 한다. 실체화되고 신화화된 관념으로 사고하는 것은 정치 지도자들이 수행해야 할 중요한 임무 가운데 하나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 임무란 국가들 사이의 충돌 속에서 실행 가능하지만 필연적으로 불완전하고 결코 영구적이지 않은 타협과 해결책을 찾아내어, 사람들이 전쟁 속에서 불필요하게 짓밟히고 소모되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