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청 신앙교리성은 최근 ‘Mater Populi Fidelis (신도(信徒)의 어머니)’라는 성모님 관련 문서를 발표하였다. 문서의 부제는 “구원 사업에서 마리아의 협력에 관한 일부 성모 호칭들에 대한 교의적 문헌”이다.
문헌의 작성 이유는 발표 서두에서 명확히 밝히듯, 성모님에 대한 새로운 신심, 새로운(또는 재해석된) 표현들이 등장하고, 더 나아가 새로운 성모 교의 정의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있기 때문이다. 이 문헌의 목적은 복음에 의해 영감을 받고,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에 뿌리내리며, 그리스도교 신비 전체와 조화를 이루는 진정한 신학적 성모 공경 이해를 제시하는 데 있다.
문헌은 전통적으로 성모님께 부여되어 온 여러 호칭을 다루지만, 특히 두 가지가 두드러진다. 바로 공동구속자(co-redemptrix)와 중재자(mediatrix)이다. 전자에 관해 문서는 이 호칭이 “항상 부적절하다”고 결론짓는데, 이 명칭이 쉽게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구세주는 단 한 분,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공동구속자라는 용어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방식이 있기는 하지만, 문서는 어떤 표현이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설명을 필요로 한다면 그 자체로 중요한 문제가 드러난 것이라고 지적한다.
문헌은 이어 중재자(mediatrix)라는 호칭을 다룬다. 공동구속자와는 달리 문서는 이 호칭이 “항상 부적절하다”고까지 말하지는 않고, 다만 그 사용에는 “특별한 신중함”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문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성모님 가르침을 폭넓게 인용하지만, 사실 공의회 당시 이 용어를 둘러싼 격렬한 논쟁은 언급하지 않는다.
60여 년 전 공의회의 신학위원회(De Fide라고도 불림)에서는 이 용어를 보편 공의회 문헌에 포함시킬 것인가를 두고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었다.
이 논쟁은 종교개혁 이래 성모님을 둘러싼 논쟁적 분위기 속에서 민감한 사안이었다. 게다가 가톨릭교회는 이미 성모님에 관한 두 개의 무류적 교의를 정의한 바 있었다(1854년 무염시태, 1950년 성모 승천). 이는 가톨릭과 정교회·개신교 간의 간극을 더욱 벌려 놓은 사안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공의회가(그리고 그 안에 정교회와 개신교 참관자들이 함께하는 가운데) 어떻게 하면 가톨릭 교리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Ecumenical(교회일치)한 민감성을 살려 성모님의 역할을 표현할 수 있을까? 이것이 신학위원회가 직면한 과제였다.
마리아에 관한 장을 초안한 이는 루뱅의 신학자 제라르 필립스로, 그는 De Fide의 조정자이기도 했다. 그가 1964년 6월 위원회에 초안을 제시하자마자 논쟁이 시작되었다.
교황청 성성(聖省) 소속의 피에트로 파렌테 대주교는 초안에 성모님의 하느님 은총의 중재자 역할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점에 깊은 실망을 표했다. 그의 문제 제기는 크로아티아의 프란치스코회 출신 마리아 신학자 차를스 발리치가 적극 지지했다. 발리치는 필립스가 성모님의 중재적 역할을 포함하지 않은 책임이 있다고 여겼다. 그러자 필립스는, 공의회가(그 목회적·에큐메니컬한 성격상) ‘중재자’라는 칭호를 강제할 권위를 갖고 있다고 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답변했다.
그러나 파렌테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필립스에게 초안을 수정하여 두 가지 신학적 전통, 즉 “그리스도의 모범적 제자로서의 마리아”와 “은총의 중재자로서의 마리아”를 조화시키라고 요구했다. 필립스는 이에 응하지 않았고, 이는 평소에 다양한 신학적 관점을 조화하려 애쓰던 그의 성향과는 이례적이어서 위원회 구성원들을 놀라게 했다. 일부는 필립스가 교황 바오로 6세가 교의헌장에 ‘중재자’라는 용어가 포함되는 것을 반대한다는 사실을 사적으로 전달받은 것이 아니냐고 추측했다.
필립스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파렌테는 계속 강경했다. 그는 성모님께 ‘중재자’라는 호칭이 부여되어 왔다는 사실을 언급하는 문단을 넣되, 그리스도의 독특한 중보자적 사명은 분명히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파렌테는 다음과 같은 문구를 제안했다.
“가톨릭교회 안에서,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 마리아께서는 다른 칭호들과 더불어 ‘중재자’라고 불려 왔다. 그러나 이 호칭은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자적 품위와 효력을 손상시키거나 거기에 무엇을 더한다는 의미로 이해된 적은 결코 없다.”
당대의 저명한 신학자 이브 콩가르와 카를 라너는 이 문구에 설득되지 않았다. 그들은 ‘중재자’라는 용어가 신학적 혼란을 야기하고 에큐메니컬한 반감을 불러올 것이라 보았다. 논쟁이 결론에 이르지 못하자, 위원회 전체가 이 용어를 초안에 포함시킬지를 표결에 부쳤고, 결과는 찬성 12, 반대 9로 성모님께 ‘중재자’ 호칭을 삽입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성모님을 둘러싼 논쟁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64년 8월, 필립스는 프랑스의 루르드 성모 발현지로 순례를 떠났다. 그곳에서 현지 주교는 “De Beata(성모님에 관하여) 초안은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필립스는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진실한 마리아론을 쓰기 위해 정직하게 노력했다. 그럼에도 모든 일은 하느님의 손 안에 있다.”
논쟁은 성 베드로 대성전 안에서도 계속되었다. 벨기에의 레오 요제프 쉬넨스 추기경은 공의회에서 진보적 인물로 간주되었지만, 그럼에도 놀랍게도 성 베드로 대성전 회의장에서 필립스의 초안이 반(反)마리아적 그리스도중심주의를 퍼뜨린다고 비판했다. 이는 충격적이었고, 개인적·신학적 배신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필립스는 다시금 흔들리지 않았고, 자신의 일기는 “나는 쉬넨스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와 진리를 위해 봉사한다”고 기록했다.
보다 온건한 비판은 타이제(Taizé) 공동체의 막스 튀리앙으로부터 나왔다. 그는 개신교 대표 참관자 중 가장 저명한 인물이었다. 그는 ‘중재자’라는 단어는 개신교 신자들에게 문제가 되므로 초안에서 삭제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이미 늦은 시점이었고, 튀리앙은 바오로 6세의 직접 개입만이 이를 철회할 수 있을 것이라는 답변을 들었다. 그러나 교황은 개입하지 않았다.
1964년 10월, 필립스는 주교들의 의견을 반영하여 De Beata를 수정하고 있었다. 그는 어떻게 하면 논란이 되는 ‘중재자’라는 호칭을 가장 적절히 다룰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그는 advocata(변호자), adjutrix(도우미) 등 다른 성모 호칭들 사이에 이 용어를 배치하기로 결론지었다. 이러한 전략은 ‘중재자’라는 단어가 고립된 기술적·교의적 의미를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오늘 우리가 Lumen Gentium(교회의 빛)을 읽어 보면 알 수 있듯, 필립스의 수정안은 신학위원회와 공의회 주교들 모두에게 승인되었다.
루멘 젠티움이 정식 반포된 뒤(1964년 11월 21일) 6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필립스는 자신의 마리아 장을 되돌아보며 당시 신학적 논쟁을 성찰했다. 일부 신학자들과 주교들은 ‘중재자’라는 호칭이 가톨릭 마리아론에 필수적이라고 여겼다. 필립스는 그 명칭 자체를 반대한 것은 아니었으나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한 인격을 공경하지만, 그 인격이 그리스도를 근원과 성취로서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공경하는 것이다. 마리아의 품위 또한 그리스도로부터 온다. 물론 아무도 이 근원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사용하는 방식은 항상 이러한 근거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다.”
Mater Populi Fidelis(신도(信徒)의 어머니)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벌어졌던 활기찬 신학 논쟁들에 이미 오랫동안 예견된 문헌이다. 최근 문서가 루멘 젠티움을 반복적으로 인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필립스의 절제된 마리아론은 교황청 부서가 오늘날 직면한 문제들을 기민하게 예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