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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A 가톨릭 188] 찰스 머레이의 신앙으로의 귀환

케이시 초크 Casey Chalk is a contributing editor at the New Oxford Review. 기고 편집자

미국 학계, 특히 이른바 ‘연성(軟性) 학문 분야’라 불리는 학제들은 지적으로 가장 경직된 공간 중 하나이다. 스스로를 개방적 탐구와 토론의 최고봉으로 포장하지만, 실제로는 미국의 대다수 대학에서 연성 학문 분야는 공격적이며 자기만족적 집단사고에 지배된다.

하버드에서 교육받은 저명한 정치학자 찰스 머레이는 이를 누구보다 잘 안다. 그는 2017년 미들베리 칼리지에서 강연을 할 때 학생들에게 발언을 방해받았으며, 강연장을 떠나는 길에는 신체적 공격까지 받았다.

그러나 머레이의 학문적 관심은, 오히려 가장 논쟁적인 주제—사회복지 제도, IQ, 계급 문제 등—를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연구하고자 하는 태도를 일관되게 보여 왔다. 그의 연구가 인종주의라는 비난을 불러일으킬 때조차 말이다. 이제 한때 냉담한 불가지론자이자 회의론자였던 머레이는 자신의 특유의 객관적·증거 기반 분석을 ‘종교’라는 주제로 옮겨왔다.

접근하기 쉽고 계몽적이며 철저한 연구를 담은 종교적 자서전 ‘종교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Taking Religion Seriously)’에서 그는 점점 더 ‘탈종교적’이 되어가는 우리 시대에 강력한 응답을 제시한다.

머레이는 장로교 가정에서 자랐지만, 하버드 학부 시절 종교를 떠났다. 평화봉사단으로 태국에 머무는 동안 불교 명상에 잠시 관심을 가졌지만 큰 영향을 받지 못했다.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인간 경험의 다양한 ‘층위’를 깨닫기는 했으나 그 이상은 아니었다.

머레이는 이렇게 솔직히 고백한다. “나는 영적 차원을 인식하는 데 결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가장 깊은 절망 속에서 드러나곤 하는 ‘하느님 크기의 빈자리’를 느껴본 적도 없습니다. 이것이 빈자리가 없다는 뜻은 아니고, 다만 내가 그것을 무시할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나 뿐 아니라 우리 시대의 성찰 없는 세속주의를 설명해 줍니다.”

그렇게 그는 학계에서 학습한 ‘세속적 교리문답’을 별 고민 없이 받아들였다. 곧, 인격적 하느님의 존재는 비과학적이며, 종교는 인간이 만들어낸 것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의 자연스러운 산물”이라는 관념 말이다.

그럼에도 머레이의 사유는 점차 하느님 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는 여러 기초적 현상이 놀라울 정도로 수학적으로 단순하고 질서정연하다는 사실이 어떤 ‘지적 질서자’를 암시하는 듯하다고 말한다.

그는 또한 빅뱅 이론이 기독교적 창조 서사를 훼손하기보다 오히려 뒷받침한다는 점을 논한다. (초기 학계에서 이 이론에 강한 반대가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그는 소위 인간중심원리—생명 존재가 가능하도록 우주가 ‘정교 조율’되어 있다는 사실—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중력과 같은 물리 상수가 조금만 달라도 생명은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부는 무수한 우주가 존재할 가능성을 제기하지만, 그 어느 하나가 생명을 허용할 확률을 만들려면 최소 수백만 개의 우주가 필요하다. 머레이는 결론짓는다. “나는 생명 발현을 허용하도록 의도적으로 설계된 우주 속에 살고 있다.”

이어 머레이는 어떻게 영혼의 존재를 믿게 되었는지 설명한다. 그는 텔레파시·예지와 같은 초심리학적 현상의 통계적 실제성을 주장하는 연구와, 여러 사람의 임사체험이 유사하다는 연구를 검토한다. 이 부분이 다소 생경하거나 허술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머레이는 이러한 현상을 수용해야 한다는 자신의 판단을 뒷받침하기 위해 상당한 증거를 제시한다.

그는 또한 인간이 추상적·비물질적 실재를 사유할 수 있다는 사실로부터 인간 영혼의 비물질성을 도출하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고전적 논증을 언급했을 수도 있다. 실제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적 형이상학을 무시한 것이 아니다. 1990년대쯤 그는 이미 아리스토텔레스(그리고 아퀴나스)가 이해한 하느님—움직이지 않는 원동자, 우주 모든 운동의 능동적 원인—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의 두 번째 부분, “그리스도교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다”에서 머레이는 보다 단단한 토대를 다진다. 그는 사회학자 로드니 스타크와 같은 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그가 소중히 여겨온 서구 문명의 핵심 가치—개인의 존엄성, 학문적 탐구 정신, 숭고한 예술 전통—가 바로 그리스도교 문명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그랬듯, 그는 C. S. 루이스의 글에 이끌렸다. 특히 유명한 “삼중 논증 (trilemma)”은 결정적이었다.

“순수한 기독교는, 내가 쉽게 반박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그리스도교 정통신앙을 받아들인 탁월한 지성과의 정신적 대화를 나에게 강요했다.”

자연히 그리스도교 사상을 옹호하려면 신약성경 정경의 역사성을 점검해야 한다. 머레이의 검토에 따르면 신약성경의 많은 책—어쩌면 대부분—이 A.D. 70년 예루살렘 파괴 이전, 더 나아가 60년대 중반 베드로와 바울의 순교 이전에 집필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논의에 익숙한 독자라 해도 머레이의 세심한 복음서 검토를 통해 새로이 배우는 것이 있을 것이다.

예컨대 요한복음 6장 5절에서 예수께서 빵을 어디서 사야 하냐고 빌립에게 질문한 이유는 무엇인가? 루카복음 9장 10절에 따르면 그 기적은 벳사이다, 그리고 빌립의 고향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복음서가 신뢰할 만하다면, 머레이가 말하듯 그리스도의 부활을 역사적 증거의 풍부함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저 ‘부정’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증거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 책은 결말에서 다소 기이한 추정을 내놓는다. 머레이는 하느님이 누구도 지옥에 보내는 것이 아니라 “죽을 때 우리의 삶에 대한 완전한 도덕적 명료성을 주신다”고 제시한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삶에서 큰 죄를 지었으나 회개하지 않았다면, 죽음 이후 우리의 죄책감이 곧 지옥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다분히 공상적이며, 분명 초대 교부들의 지옥 이해와 배치된다. 

그는 또 이렇게 쓴다. “예수는 하느님이 아니었다. 그는 인간이라는 그릇에 담을 수 있는 만큼의 ‘하느님’이었다.” 이런 표현은 신적 단순성을 부정하고 하느님 안에 ‘부분’을 상정하는 것으로, 삼위일체 신학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는 신학적 허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라는 제목은 이 작은 책에 충분히 어울린다. 지난 반세기 동안 가장 흥미로운 정치학자 중 한 사람이 하느님과 그리스도교에 대한 대중적 반대 논거들을 진지하게 탐구하려는 진정성 있는 시도로 보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과연 회의론자들—특히 머리를 혐오하는 이들—이 이 책을 읽을 만큼 열린 마음을 가졌느냐는 것이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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