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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A 가톨릭 187] 입문성사인가, 아니면 ‘자기확인’의 의식인가?

앤서니 R. 루스바르디 S.J Anthony R. Lusvardi, S.J., is the author of Baptism of Desire and Christian Salvation. 『갈망의 세례와 그리스도인의 구원』의 저자

견진성사는 일반적으로 ‘피플’ 매거진 편집진이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 주제가 아니다. 그러나 지난주, 이 흔히 소홀히 여겨지고 오해받는 성사가 뉴스가 되었다. 한 소규모 유명 인사(뉴스 앵커)가 가톨릭 교회로 돌아와 견진을 받았기 때문이다. 피플은 그 사건에 기사를 한 편 할애했다.

겉으로는 세속적인 이 잡지가 갑자기 경건함의 물결에 휩싸이기라도 한 것일까? 필자들은 부활의 일을 완성하신 성령께서 성령 강림 대축일에 그러하셨듯, 세례로 다시 태어난 하느님의 자녀의 마음에 자신의 인호(印號)를 새기는 모습에 감동을 받은 것일까? 또 한 명의 그리스도 증인이 이 땅에서 교회를 건설하도록 준비되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뜨거워졌던 것일까? 혹은 성 토마스 아퀴나스처럼, 영적 전투를 위해 무장한 또 한 명의 ‘그리스도의 군사’를 떠올리며 전율했던 것일까?

피플의 동기는, 안타깝게도, 다른 곳에 있었던 듯하다. 견진성사를 받은 지오 베니테즈는 공개적으로 동성애자이며, 시민적 결혼을 했고, 그의 “남편”을 대부로 삼아 견진을 받았다.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글에는 “있는 그대로의 나(Exactly as I am)”라는 문구가 눈에 띄었다.

이 견진은 쉽게 답할 수 없는 많은 질문을 일으키며, 애초부터 그러한 목적이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제대 주변의 팀은 평범한 본당 성직자보다 훨씬 더 ‘미디어 감각’이 뛰어났다. 이 예식은 스캔들을 일으키려는 것이었는가.

즉, 그리스도교 신앙이 죄로 간주하는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의도였는가? 성사가 보다 큰 정치적·문화적 의제를 위해 도구화되고 있었는가?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상황에서 사는 동성 커플을 성사에 참여시키는 반면, 동일한 상황의 이성 커플은 성사를 거부당하는 것이 차별인가? 아니면 역으로, 베니테즈가 ‘자기확인(self-affirmation)’이라는 묽어진 신조 때문에 회개와 진정한 영적 재탄생의 가능성을 박탈당한 것인가?

이러한 ‘토끼굴’ 같은 논쟁은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려 한다. 피플과 달리 필자는 성 문제보다 견진성사 자체에 훨씬 더 관심이 있다. 또한 어떤 연예인의 견진보다 더 우려되는 것은, 가톨릭 교회에서 견진이 사실상 ‘가톨릭 졸업식’이 되어버린 더 일반적인 현상이다.

이런 현상이 발생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입문성사의 집전 순서도 그중 하나다. 그러나 문제의 뿌리는—그리고 매우 깊은 뿌리인데—입문성사들이 회심(conversion)이라는 개념과 단절되어버렸다는 점에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지난 교황 시대나 1960년대, 또는 근대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사실 이는 중세적 문제다.

교부 시대에는 그리스도교 입문은 매우 험준하고 요구가 많은 과정이었으며, 세례·견진·성체성사의 수령은 삶을 바꾸는 사건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적대적인 이교 사회 한가운데에서 모호하거나 흐릿한 그리스도인 정체성은 다수 문화의 공격적 흐름 속에서 신앙의 해체를 보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교 세계가 형성되면서 바뀌었다. 사실상 모두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성사 준비—그리고 성사 후의 신비 교육(mystagogy)—은 최소한이거나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거의 모든 이가 태어나자마자 자동적으로 세례를 받았기에, 첫 성사는 ‘재탄생’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주변의 그리스도교 문화 덕분에 신앙 형성은 여전히 이루어졌지만, 대부분은 문화적 삼투(osmosis)를 통해서였다. 그저 그리스도교 사회에서 자라나는 것만으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공식 신학이 변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성사들은 대중적 상상 속에서 사회적 소속의 의례가 될 수 있었다. 다수에게 성사는 사회·가족·인생의 이정표를 나타내는 의식이 되었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자신을 일치시키는 의식이 아니었다.

오늘 우리는 초기 교회를 둘러싸던 이교적 다원주의와 닮아 있는 문화를 살고 있지만, 우리의 성사 실천 체계는 대부분 여전히 그리스도교 세계의 틀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별로 잘 작동하지 않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 새로운(그리고 오래된) 현실에 대응할 적어도 두 가지 도구를 제시했다. 하나는 광범위한 교리교육 기간을 포함한 성인 예비신자 입교 예식(OCIA)—아직 그 잠재력을 충분히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이며, 다른 하나는 거의 보편적으로 오해되고 있는 전례 참여의 신학이다.

성 레오(레오 1세) 대교황이 승천 대축일 강론에서 말했듯, 지상에서 걸어 다니시던 예수님 안에서 한때 눈에 보였던 것이 성사 안에서 우리에게 현존한다. 성사의 고유한 은총은 자기확인도, 보상도 아니라, 강생하신 그리스도의 신적 행위에 우리가 참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신학은, 다시 말해, 성사에 냉담하거나 회심되지 않은 이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논거가 겉보기에는 경건해 보이나 실제로는 미신적임을 설명해 준다. 필자는 다음과 같은 논변을 수도 없이 들었다. “아직 준비가 안 되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성사의 은총이…”

그러나 성사 은총은 우리의 의지에 반하거나 우리의 협력 없이 작용하지 않는다. 성사 은총은 우리가 참여할 수 있도록 허락하기 때문에 작동하며, 우리에게 협력할 가능성을 열어 주기 때문에 작동한다.

아직 그리스도와의 친교 안에서 살 준비도, 그분의 파스카 신비에 일치할 의지도 되어 있지 않은 이들에게 성사를 집전하는 것은, 암으로 고통받는 사람에게 항암 치료 대신 위약(placebo)을 주는 것과 비슷하다. 의사와 환자 모두 잠시 위안을 얻을 수는 있지만, 참된 치유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 방식이 피플의 의제에는 부합할지 모르지만, 교회의 사명에 있어 정말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충만함으로의 입문이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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