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필자의 의붓아버지의 이야기는 톰 브로코우의 기념비적 저서 위대한 세대(The Greatest Generation, 1998)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충분히 실릴 만한 이야기였다. 다른 이들처럼,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의 체험으로 깊이 형성된 인물이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단순히 전쟁세대가 이제 거의 사라져 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공유할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당시에는 거의 알지 못했으나, 그는 말없이 더 큰 교훈―고난과 때로는 노골적인 악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 은총 안에 살아가는 법―을 전해주었다.
이제 그를 기리는 방법은 말뿐이다. 전쟁 시절을 거의 말하지 않으셨던 그의 뜻을 존중하여, 여기서는 그분의 이름을 간단히만 기록하겠다. 로이. 내가 아버지라 불렀던 분이다.
로이의 젊은 시절
장차 ‘일병 로이’가 될 그는 1926년, 대공황 직전 뉴욕 주 오네이다 카운티 북동부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프랑스계 캐나다인 혈통의 가정이었다. 그는 애디론댁 산맥 아래 자리한 작은 마을 슈투벤에서 자랐다. 이 마을은 미국 독립전쟁 당시 조지 워싱턴이 대륙군 훈련 책임자로 임명한 프로이센 장교, 슈투벤 남작의 이름을 따서 세워졌으며, 신생 미국 정부가 그에게 하사한 16,000에이커 땅에 속해 있었다. 지금도 그의 기념비와 무덤은 로이가 자란 가족 농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로이의 어머니는 결혼 전 록펠러 가문의 저택(카이킷)에서 하녀로 일했다고 전해졌다. 그녀는 1918년 스페인 독감으로 첫 남편을 잃고 어린 두 아들과 홀로 남겨졌으며, 재혼 후 로이를 비롯해 아들 하나와 딸 둘을 더 낳았다. 부모는 영어 대신 서투른 불어를 주로 사용했고, 아이들은 외딴 시골에 있던 단칸 교실에서 수업을 받았다. 한겨울이면 눈신발이나 손수 만든 스키를 타고 등교해야 했다.
농장에는 한동안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고, 겨울철에는 호수에서 불어오는 눈이 반년 가까이 쌓였다. 아이들은 새벽 네 시에 다락방에서 내려와 젖소를 짜고 가축을 먹였다. 어머니는 곧 내려와 직접 음식을 준비했다. 늘 그렇듯 인디언들의 조리법에서 유래한 ‘조니케이크’를 구워 아침을 시작하곤 했다. (그는 어머니가 TV를 끝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늘 말했다. “내가 저들을 볼 수 있으면, 저들도 나를 볼 수 있다”는 확신 때문에, 평소에도 ‘주일 최상의 복장’으로 단정히 차려입어야만 TV 앞에 앉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 시절 집의 교통수단은 마차에 연결된 말 한 필이었고, 나중에야 포드 모델 T를 구입할 수 있었다. 일요일이면 아이들은 치즈 한 덩이를 사기 위해 인근 마을로 갔다. 이 지역은 낙농업이 중심 산업이었으므로 가족 운영 치즈 공장이 흔했다.
이렇듯 그의 가정은 20세기 미국 가정이라기보다는 19세기 개척자들의 삶과 흡사했다. 그러나 그의 세대 가운데 어느 누구도 제2차 세계대전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징집과 훈련
1944년 4월, 열여덟 번째 생일 바로 다음 날, 그리고 오키나와 상륙작전이 벌어지기 불과 1년 전, 그는 징집을 받았다. 등록카드에 따르면 키는 180cm, 체중은 71kg, 갈색 머리와 회색 눈을 지녔다. 그는 1944년 12월 19일 입대하여 기본 훈련을 마친 후 하와이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추가 훈련을 받은 뒤 태평양 전선으로 파병되었다.
회고록 ‘82일간의 오키나와’에서 아트 쇼 대령은 당시의 훈련을 이렇게 묘사했다.
“군대는 우리를 단 13주 만에 살상 기계로 바꾸어 놓았다. 이제 우리는 인간 어뢰요, 도살자들이며, 총잡이였다.”
오키나와의 지옥
1945년, 일본 본토에서 불과 640km 떨어진 섬에서 지옥의 화염이 타올랐다. 역사가 사울 데이비드는 저서 ‘지옥의 도가니(Crucible of Hell)’에서 이 전투의 실상을 제목 그대로 요약했다. 어떤 추산에 따르면 하루에 약 3,000명이 죽어나갔다. 조셉 휠런은 핏빛 오키나와에서 4월 20일 하루 동안만도 제27사단(로이의 부대)이 506명을 잃었다고 기록한다. 이는 단일 사단이 한 전투에서 겪은 가장 큰 손실이었다.
결국 오키나와에서는 25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연합군의 손실도 참담했지만, 일본군과 그 통제 아래 있던 오키나와 주민의 희생은 훨씬 더 컸다. 일본군 10만 명 이상이 전사하거나 자결했고, 민간인 역시 비슷한 수가 목숨을 잃었다.
단순한 통계로는 오키나와의 참상을 담아낼 수 없다. 수십만의 병력이 민간인과 뒤섞여 좁은 섬에서 치열하게 맞섰고, 폭우와 열기, 진흙과 구더기, 시체가 썩어가는 악취가 끊임없이 뒤섞였다. 한 미 해병 하사가 “우리는 거대한 오물 구덩이에서 싸우고 잠을 잤다. 그 속에는 인간의 부패한 시신 냄새까지 배어 있었다”고 기록했을 정도였다.
새로 묻은 시체가 포격으로 파헤쳐져 구더기가 들끓는 사체 조각이 병사들 위로 흩날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슬레지는 이렇게 증언했다.
“그런 일들은 말할 수도 없었다. 노련한 참전용사들조차 비명을 지를 만큼 참혹했다. 사람이 그런 상황 속에서 밤낮으로 전투를 벌이며 살아남는다는 건 도저히 말이 되지 않았다.”
죽음은 땅속과 지상과 하늘, 바다 어디에나 도사리고 있었다. 가미카제 전투기와 자살 보트는 연합군 함대를 끊임없이 위협했고, 지상에서는 병사들이 상상조차 어려운 일을 보았고 또 저질러야 했다.
전쟁 이후의 귀환과 가정
전쟁이 끝난 뒤에도 참화의 흔적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핏빛 오키나와’의 조셉 휠런은 전투가 끝난 지 수십 년이 지나도록 농부들과 건설노동자들이 여전히 땅속에서 시신을 발견했다고 기록한다.
필자의 의붓아버지는 바로 그 지옥 속으로, 1945년 부활주일에 뛰어들었다가 다시 평화의 땅으로 돌아왔다. 9월 2일 전쟁이 끝나자, 1,200만 명의 미군이 집으로 귀환했고, 전사들이 다시 가장으로 돌아갔다. 결혼과 출산의 ‘붐’이 일어났고, 하얀 울타리로 상징되는 전후의 안정된 가정생활이 전쟁의 상흔을 덮었다. 브로코우의 말처럼 “많은 참전용사들에게 전쟁의 세월은 평생에 충분할 모험”이었다.
필자의 아버지 역시 ‘위대한 세대’의 전형적인 궤적을 따랐다. 1946년 고향 뉴욕 주로 돌아온 그는 고등학교 시절 연인이었던 첫 아내와 결혼해 다섯 아이를 낳았다. 그중 쌍둥이 아들 둘은 훗날 베트남 전쟁에 징집되었다. 젊은 참전용사였던 그는 오리건에서 벌목공으로 일하며 50개 주 중 48개 주를 여행했고, 늘 크레이터 호수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 말했다. 그러나 사고로 몇 개의 뼈가 부러지면서 벌목 일을 접어야 했고, 결국 고향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 무렵 첫 아내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는 비극을 맞이했다.
1960년대 초, 그는 어린 두 딸을 둔 이혼 여성(간호사였던 나의 어머니)을 만나 결혼했다. 이후 세 아들을 더 낳았고, 그중 또 다른 쌍둥이 아들 하나는 해병대 장교로 군 생활을 이어갔다. 그는 이후 30여 년 동안 수많은 직업을 전전했다. 자동차 정비공, 목수, 전기공, 석공, 바텐더, 잡역부 등 거의 모든 ‘블루칼라’ 일을 해냈다. 어떤 일이든 손재주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은 경이로울 정도였다.
지역사회와 가족, 그리고 신앙
브로코우가 강조한 자립심과 감사는 의붓아버지의 삶에도 분명 드러났다. 그는 동시에 즉흥적 재능을 지녔고, 언제나 사회적 활동에 열정적이었다. 그는 아마추어 자동차 경주에 나섰고, 모터사이클 애호가였으며, 농구·야구·무도회 등에서 늘 활발했다. 특히 그는 자녀들과 함께 리틀리그 야구팀과 소프트볼팀을 지도하며 이웃 공동체 안에서 아버지의 역할을 온전히 수행했다.
교회 역시 그의 삶에서 중요한 자리였다. 그는 흔히 미사에 참석하지는 않았지만, 자녀들을 성당에 데리고 가도록 했고, 대축일에는 반드시 참여하도록 했다. 형제들은 제대 봉사를 했고, 자매들은 성가대에서 노래했다. 우리 집의 삶은, 부모가 반드시 모범을 보이지 않더라도 자녀들은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전통적 가톨릭 가정의 패러다임 속에 있었다. 나중에야 깨달았지만, 그것은 사실 흔치 않은 모습이었다.
그는 전후 세대의 종교적 열풍과는 조금 달랐다. “여러 해 동안 미사에 나가지 않았다”는 어머니의 고백처럼, 부모님은 제도적 교회에 자주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늘 이렇게만 설명했다. “하느님과 나는 참호 속에서 합의했다.” 이 말은 결코 불신앙의 고백이 아니라, 참호전 속에서 체험한 신비적 만남에 대한 은유였다. 비록 겉으로는 신심생활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는 자녀들이 교회의 가르침 안에서 자라도록 늘 확실히 지켜주었다.
상흔과 용서, 그리고 차별 없는 사랑
전쟁은 그에게 세 번의 부상을 남겼다. 파편과 총알이 손을 관통하기도 했지만, 평생 그를 괴롭힌 것은 ‘참호발(Trench foot)’로 인한 만성 피부질환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전쟁의 상흔을 분노나 증오로 풀지 않았다. 당시 많은 참전용사들이 일본인을 극도로 혐오했지만, 그는 오히려 그들의 절도와 용기를 존중했다. 일본 병사의 무기를 전리품으로 삼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다.
또한 그는 흑인 병사 ‘조지’에 대한 존경을 늘 표현했다. 조지는 무기 대신 들것을 짊어진 채 부상자들을 구해냈던 흑인 지원병이었다. 의붓아버지는 흑인 병사들이 전투에 정식으로 배치되지 못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그들도 무장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그가 훗날 흑인·히스패닉 청소년들을 멘토로 돌보게 된 데는 아마 이 경험이 밑바탕에 있었을 것이다.
‘타인을 위한 사람’
1970년대 중반, 그는 청소년 교정시설 겸 수련원에서 정비공으로 일했다. 대부분 아버지 없는 흑인·히스패닉 청소년들이었고, 뉴욕시에서 범죄로 보내진 아이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멸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차고 안에서 직접 기계를 가르치고, 우리 가정으로 불러 함께 식사하게 했다. 어떤 아이는 생일 케이크를 처음 받아보고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는 아마 “타인을 위한 사람(Man for Others)”이라는 예수회의 모토를 들어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정신을 그대로 살아냈다. 생애 마지막 순간에도 그는 담담했다. 투석을 중단하기로 결정하면서도 “이번 주 나는 천국에 간다”고 말하며, 가족과 친구들 곁에서 은총 속에 떠났다.
속죄와 은총의 신비
전쟁 후유증을 다룬 고전 ‘전사들’에서 J. 글렌 그레이는 ‘죄책의 고통(ache of guilt)’을 지적한다. 어떤 이는 미쳐버리고, 어떤 이는 쾌락에 도피하며, 어떤 이는 죽음을 갈망한다. 그러나 강한 이는 ‘속죄(atone)’의 길을 택한다고 한다. 즉, 신앙의 행위로서가 아니라, 인생 전체를 속죄의 삶으로 살아내는 것이다.
필자의 아버지가 바로 그러했다. 속죄는 은총을 불러오고, 은총은 눈에 보이지 않는 끈처럼 그의 삶을 지탱했다. 덕분에 버려진 청소년들은 사회로 돌아올 기회를 얻었고, 한 이혼 여성은 가정을 다시 꾸릴 수 있었으며, 친자가 아닌 두 딸도 친아버지 같은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톰 브로코우의 ‘위대한 세대’는 이런 차원을 놓치고 있다. 그들의 업적은 단순히 인간적 강인함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오히려 “죄가 많은 곳에 은총이 더욱 풍성하였다”(로마 5,20)는 사도적 진리가 전쟁의 참화를 뚫고 드러난 것이다.
결국 마지막 교훈은 이렇다. 우리 모두는 전투에 나서진 않았더라도 죄인들의 공동체 안에서 속죄와 사랑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바로 그 사랑, 곧 십자가의 대속(代贖, propitiatio) 안에서만 우리는 참된 승리, 곧 구속(救贖, redemption)에 다가갈 수 있다. <끝>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