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말, 필자가 뉴욕 주 중부의 한 시골 공립 고등학교에 다닐 무렵, 점점 더 많은 또래들이 이혼한 부모와 새아버지 밑에서 살고 있었다. 어머니에게 양육권이 거의 항상 주어졌으므로, 대체로 의붓아버지와 함께 산다는 뜻이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TV 드라마 브래디 번치 같은 “재혼가정 미화”의 포장을 벗겨내곤 했다.
어떤 새아버지들은 형편없이 나빴고, 극소수는 괴물과도 같았다. 사회학이 아이들에게 있어 온전한 가정의 중요성을 이론적으로 가르쳐주기 훨씬 전부터, 내 친구들 중 몇몇의 황폐한 삶은 이미 그 자체로서 하나의 ‘Q.E.D.(quod erat demonstrandum) 수학에서 증명을 마칠 때 쓰는 라틴어 기호’ 같은 증거였다.
그러나 통계는 모든 진실을 드러내지 않는다. 필자의 부모 역시 내가 태어난 직후 이혼했다. 다섯 살 때 어머니는 재혼하셨고, 그 결과 필자는 어린 시절과 청소년 시기의 대부분을 의붓아버지와 함께 보냈다. 그러나 그는 어떤 남자가 괴물일 수 있는지와는 정반대되는 인물이었다.
필자의 새아버지는 놀라울 만큼 유머와 평정심을 지닌 분이었다. 그의 삶은 수많은 시련으로 점철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는 원시적인 농가에서 가난 속에 자랐고, 젊어서 첫 아내를 암으로 잃었다. 수십 년 동안 육체노동으로 인내심을 단련해야 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가혹한 시험이 있었다. 그는 12,513명의 미군 전우들이 목숨을 잃은 제2차 세계대전의 82일간의 오키나와 전투에서 살아남았다. 올해는 그 전투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80주년이 동시에 다가오는 해이다.
태평양 전쟁에서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전투였던 오키나와 전투는, 그 바다에서 감행된 가장 대규모 상륙작전이었으며, 인류 전쟁사 전체에서도 손꼽히는 규모였다. ‘아이스버그 작전(Operation Iceberg)’은 1945년 4월 1일, 바로 그해의 부활주일에 개시되었다. 무려 82일 동안, 미 육군 4개 사단과 해병대 2개 사단이 투입되었고, 1,300척의 미군 함정과 251대의 영국 해군 항공기, 그리고 호주·뉴질랜드·캐나다 함정 및 인력이 포함된 영연방 함대가 동원되었다.
또한 오키나와 전투는 일본군의 가미카제(자살특공) 공격이 가장 많이 일어난 전투이기도 했다. 26척 이상의 미군 함정이 격침되고, 168척이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미군 전사자 가운데 약 40%가 해상에서 가미카제 공격으로 희생된 수병들이었다.
역사가 빅터 데이비스 핸슨은 해병 참전자 E. B. 슬레지의 회고록 ‘Old Breed와 함께’ 서문에서 이렇게 기록한다.
“오키나와는 태평양 전쟁 전체에서 가장 악몽 같은 경험이었다. 1만 2,500명 이상의 장병이 전사했고, 단일 미군 전투에서 기록된 ‘전투 신경쇠약(Combat fatigue)’ 사례의 최대치를 낳았다.”
거의 석 달 동안 5만 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연합군은 섬 곳곳을 한 치씩 빼앗아 나가야 하는 잔혹한 전투를 치렀다. 일본군은 가파른 능선의 동굴과 터널 속으로 숨어들어 소모전을 펼쳤다. 이는 역사상 가장 치열한 소모전 중 하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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