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우리는 자신이 내린 예측이 틀리기를 간절히 바란다. 14년 전 필자는 인격 살해가 결국 실제 살해로 대체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라고 경고했다. 그리고 그것은 크게 현실이 되었다.
보수 활동가 찰리 커크의 정치적 암살은 어떤 이들에게는 “전환점”으로 불리지만, 이미 정치적 살해와 살해 기도는 상당히 많았다. 그리고 결코 “양쪽 모두의 잘못이 똑같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이 불편한 사실 때문에 정의를 실현하려는 시도가 곧잘 당파적으로 보이는 불행한 결과가 발생한다.
필자는 1년 후 교단에서 은퇴할 예정이다. 지금 필자의 학생들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말해보자. 최근 몇 년 사이 도덕적 상대주의자들의 수가 약간 줄어든 듯 보이지만, 이제는 놀랄 만큼 많은 학생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폭동, 방화, 폭력을 ‘의로운 행위’라 여긴다.
“선한 결과를 위해 결코 악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는 교회의 기본적 도덕 원리를 받아들이게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정당한 전쟁 교리(Just War principle)에서 비전투원은 결코 의도적으로 공격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며, 10월 7일 음악 축제에서 남녀노소를 강간하고 살해하고 고문한 테러리스트들을 비판했을 때, 한 학생은 분노하며 음악 애호가들이 “그럴 만했다”고 말했다.
문제는 우리가 도덕적 존재가 아니라는 데 있지 않고, 오히려 도덕적 존재라는 데 있다. 양심은 우리 행위에 대한 정당화를 요구한다. 만일 중대한 악행을 회개하거나 부인하기를 거부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합리화하기 위해 더욱 극단적인 궤변을 만들어내야 하고, 그것은 결국 타락한 전제에서 비롯된 새로운 악행을 낳게 된다. 블루스카이(BlueSky)에 달린 댓글들을 읽어보라. 우리 정치인들의 연설을 들어보라.
유타 주 정부는 커크의 암살자에게 사형을 구형하려고 하고 있다. 그렇다면 신앙인으로서 가톨릭 신자는 사형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먼저 흔히 들려오는 진부한 주장들을 정리해 보자.
* “폭력은 결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고 한다. 이 말은 지나치게 포괄적이다. 폭력은 인간 죄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하지만, 공권력이 정당한 힘을 사용하면 다른 폭력으로부터 사회를 보호하고 도덕법에 대한 존중을 강화한다.
* “원수 갚음은 하느님께 속한 것”이라 한다. 맞다. 그러나 성 바오로는 통치 권력이 “헛되이 칼을 차지 않았다”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불의를 행하는 자에게 정당한 보복을 가할 때, 그것은 하느님의 사업을 수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사형으로 죽은 자가 되살아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가벼운 형벌로도 마찬가지다. 형벌의 목적은 정의 실현이지, 죽음을 되돌리는 것이 아니다.
* “뺨을 치면 다른 뺨도 내어주라”는 복음의 말씀도 있다. 그렇다. 누군가 나를 때리면 인내해야 한다. 그러나 그가 내 가족을 쏘려 한다면, 반드시 제지해야 한다.
* “인간의 생명은 신성하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창세기 9장 6절은 인간 생명의 신성을 사형제에 대한 반론이 아니라 그 근거로 제시한다. “사람의 피를 흘리는 자는, 사람에 의하여 그의 피가 흘려질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사람을 당신의 모습대로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 “사형은 죄인에게 회개할 기회를 박탈한다”고 한다. 그러나 오히려 사형의 임박함이 완고한 영혼을 회개로 이끄는 유일한 계기가 되기도 하지 않는가? 새뮤얼 존슨은 이렇게 말했다. “두 주일 뒤 교수형에 처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사람의 정신은 놀랍도록 집중된다.”
* “우리는 자비로워야 한다”는 말도 맞다. 우리는 죄인의 회복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어떤 형벌이 정당하다 하더라도 그것을 감경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형벌의 목적이 세 가지라고 말한다. 곧 (1) 죄인의 교정, (2) 다른 이들이 악을 행하지 못하도록 단념시키는 것, (3) 피해자들을 위로하는 것이다. 형벌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피해자는 조롱당하고 모욕당하는 꼴이 된다. 따라서 이러한 세 조건을 해치지 않는 한에서만 형벌을 감경할 수 있다.
사형제 반대에 있어 가장 흥미롭고 신중한 논증은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게서 찾을 수 있다. 교황은 일부 주장과 달리, 교회의 일관된 가르침, 곧 사형제가 원리적으로 부당하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인정하셨다. 그리고 그 교리가 단순히 지워질 수 없다는 점도 지적하셨다. 다만 두 가지 결론을 제시하셨다.
1. 교리적 결론 : 사형은 불가피하게 사회를 지킬 다른 방법이 없을 때에만 제한적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충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필자는 이 가르침을 전적으로 받아들인다.
2. 사목적·실천적 결론 : 교황은 교도소 체제가 개선된 오늘날,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보셨다. 그러나 교회는 동시에 신자들과 공직자들이 교회의 도덕 교리를 준수하는 한, 자신의 판단을 행사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따라서 충실한 가톨릭 신자들은 교황의 의견에 동의할 수도 있지만, 사회적 보호를 위해 사형이 얼마나 필요한지에 관해서는 공손히 이견을 가질 수도 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범죄자가 수감되면 사회가 더 이상 해를 입지 않는다고 가정하신 듯하다. 그러나 사회의 보호란 단순히 육체적 차원만이 아니라 도덕적·영적 차원을 포함한다. 다시 아퀴나스의 세 가지 목적을 돌아보자. 교도소가 죄인을 교정하는가? 사실은 죄수들끼리 범죄를 더 학습하고 더 악해지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출소 후 다시 사회에 해를 끼친다.
또한 가장 흉악한 범죄에도 사형이 집행되지 않는다면, 공동체가 범죄를 가볍게 여기게 되는 것은 아닌가? 추세는 오히려 그 반대로 보인다. 오늘날 심지어 범죄자가 아닌 일반인들조차 암살을 “기념”하기도 한다.
가장 무겁게 사형이 마땅한 범죄에도 이를 시행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피해자들을 기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욕하는 셈이다.
자비, 그렇다. 그러나 정의와 결합된 자비여야 한다. 찰리 커크의 살해범에 대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내가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자비의 조건을 지나치게 가볍게 여긴다면, 우리는 정의를 훼손할 뿐 아니라 자비 자체를 모독하게 된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