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는 ‘투쟁’이었고, 지금부터는 ‘건설’이다!

2024.04.25 01:18:35

- 노재봉 전 국무총리의 마지막 당부
- 윤석열 정부의 출범에 제자들을 다그치며..

 

한국 국제정치학계의 태두이자 자유민주주의 정치사상가 겸 정치인이었던 노재봉 전 국무총리가 지난 23일 타계했다.

 

지난 1년 전부터 혈액암으로 투병해온 노 전 총리는 서울의 한 요양병원에 입원해 혈액투석 등 치료를 받아오다 23일 급격히 병세가 악화되어 끝내 유명을 달리했다.

 

노 전 총리는 병상에서도 제자들과의 정치학적 대화를 이어나간 것으로 알려졌다. 고인의 관심과 걱정은 오로지 대한민국에 향해 있었다.

 

또한 고인은 박근혜 정부에 대한 탄핵시도가 ‘사기탄핵’을 넘어 대한민국을 전복하려는 ‘체제탄핵’이라는 주장을 처음으로 제기하며, 제자그룹들을 중심으로 ‘한국자유회의’라는 지식인 조직을 설립했다.

 

한국자유회의는 문재인 정부시절 내내 각종 세미나와 시국집회, 출판사업에 매진했으며, 윤석열 정부 출범이후 애국시민사회단체인 ‘자유대한연대’와 청년단체인 ‘트루스포럼’등과 함께 ‘자유대한포럼’을 조직하여 지금까지 20회가 넘게 시국강연을 진행했다.

 

다음은 ‘한국자유회의’가 ‘스승의 날’을 맞아 생전의 고인에게 바쳤던 ‘서사(書史)’이다.

 

                            < 노재봉(盧在鳳, 1936.02.08.~) 선생님께 >

 

1. 태어나자마자 전란의 시대였습니다.

 

노재봉 선생님은 1936년 태어나셨습니다. 일제시대였습니다. 그냥 식민치하이기만 한 게 아니었습니다. 전란(戰亂)의 시대였습니다.

 

일제가 1931년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일으킨 지 6년째 되는 해였습니다. 만주사변은 1945년까지 계속된 중국과의 15년 전쟁의 시작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 태어나신 이듬해인 1937년 중일전쟁(中日戰爭)이 일어났습니다.

 

전쟁은 아시아에서만 일어난 게 아니었습니다. 유럽에서도 이미 전운(戰雲)이 짙어가고 있었습니다. 중일전쟁 이듬해인 1938년 3월 나치독일은 오스트리아를 병합한데 이어 9월부터는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39년 9월 1일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습니다.

 

1940년 9월 27일 일본은 나치독일, 이탈리아와 삼국동맹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1941년 12월 7일 일본은 진주만 공습을 했습니다. 미국은 다음날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태평양전쟁의 시작이었습니다.

 

전례 없는 세계대전이었습니다. 유럽에서 아시아에 이르는 유라시아 대륙 전체와 대서양 태평양의 양(兩) 대양(大洋) 모두, 세계의 땅과 바다 전역이 전란에 휩싸이게 됐습니다. 땅과 바다만이 아니었습니다. 하늘도 전장이 됐습니다.

 

선생님은 그렇게 전하대란의 전란 속에서 유년기를 보내야 했습니다.

 

2. 6.25전쟁 속에서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어야 했던 청소년기

 

1945년 5월 8일, 나치독일의 항복으로 유럽에서의 대전은 끝을 맺었습니다. 이어 1945년 8월 15일, 선생님이 9살 나던 해, 일본도 미국의 원자탄 공격에 굴복하여 무조건 항복을 했습니다.

 

세계대전은 끝났습니다. 그리고 한반도도 일제치하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해방이 오고 새로운 나라가 서게 되리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새나라는 쉽게 오지 않았습니다. 소련군이 한반도 북부로 진주해 들어와 점령했습니다. 38선이 그어졌습니다. 분단이었습니다. 그때부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건국될 때까지 3년간 이 땅은 격통의 시기를 보내야 했습니다. 위태로운 시대였습니다. 소련을 등에 업은 공산세력은 38선 이북에 이미 사실상 정권을 수립했지만 남쪽에선 분열과 진통이 거듭됐습니다.

 

그러나 이승만 박사의 지도력과 결단이 그 시련을 이겨내고 마침내 대한민국이 탄생하게 했습니다. 1948년 8월 15일 한반도에 자유가 강림(降臨)했습니다. 비록 38선 이남 절반이었지만 이제 비로소 한국인들은 신민(臣民)이 아닌 국민(國民)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이 소년기에 접어든 때였습니다. 일제시대 식민치하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냈던 분이 새 나라의 소년이 되었습니다. 이제 새 나라와 함께 소년도 새로운 꿈을 품고 함께 커나가는 시대일 수 있을 터였습니다. 하지만 노재봉 소년 앞에는 또 무서운 시련의 시대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6.25전쟁이 발발했습니다. 무서운 전쟁이었습니다. 선생님은 6.25 발발 당시 서울에 올라와 있었습니다. 노재봉 소년은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그 피난길의 와중에 생사를 넘나드는 경험을 했었습니다. 수많은 죽음을 목격했으며 소년 노재봉 스스로도 가까스로 죽음의 고비를 넘기는 경험을 하기도 했습니다.

 

3. 대학, 그리고 유학 시절

 

선생님의 마산고등학교 고교시절은 그렇게 6.25전쟁의 기간이었습니다. 1953년 마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문리대에 진학하여 1957년 정치학과를 졸업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58년 청년 노재봉은 미국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미국 유학생활은 가난 속에서 천신만고의 노력으로 이겨내야 하는 생활의 연속이었습니다.

 

고국에서 부친께서 생활비를 보내주시기도 했지만 여의치 않았습니다. 부친 노준용님은 라전모방 창업주이십니다. 그러나 가난한 나라의, 거기다 6.25라는 대전란으로 폐허가 된 나라의, 기업을 일으키기 위해 처절한 노력을 해야 하는 가난한 기업인일 뿐이었습니다. 넉넉한 지원은 꿈꿀 수가 없었습니다. 고국에서 부친이 때로 생활비를 지원을 해주실 때면 어린 따님의 우유 값을 빼고는 다 털어 책을 사보시곤 했습니다. 가난한 유학생 청년 노재봉은 빈민가에서 버텨야했습니다. 온갖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치열하게 공부를 해내셨습니다.

 

1960년 고국 대한민국에서 정치적 격변이 일어났습니다. 4.19였습니다. 청년 유학생 노재봉은 미국에서 4.19를 맞게 되었습니다. 그때 노재봉 유학생은 유학지에서 4.19와 함께 하는 시위를 하고 성명서를 내기도 했었습니다. 선생님은 그때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의 정치를 비판했습니다. 선생님은 이승만 대통령을 존경했지만 그때는 그래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선생님은 이승만 대통령을 온전히 헤아리게 되는 데는 더 많은 공부와 세월이 필요했다고 회고하곤 하십니다.

 

그렇게 유학생활을 보낸 선생님은 1967년 뉴욕 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으셨습니다. 1950~60년대 당시 정치학으로 학위를 받던 상당수 유학생들은 한국 문제를 주제로 논문을 썼습니다. 그러나 노재봉 선생님은 19세기 프랑스 정치사상가 알렉시스 토크빌(Alexis Tocqueville)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4. 8년간 교수임용을 못 받았지만

 

토크빌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신 선생님은 귀국하여 1967년부터 1988년까지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교수로 재직하셨습니다. 하지만 1975년까지 8년간을 정식교수로 임용되지 못하고 강사로 강의를 하셨습니다. 당시의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보이셨던 게 이유였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노재봉 선생님은 여느 反박정희 민주팔이 지식인들과는 달랐습니다.

 

한국의 대학가와 지식인들 사이에는 이미 좌경적 흐름도 형성돼 있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그에 대해선 명확하게 선을 긋는 입장을 견지하셨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통치에 대해 비판을 할 것은 비판하지만 한국의 대내외적 상황으로 볼 때 근본적으로는 그 정치를 이해해야 한다는 입장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당시 외교학과 교수 시절 동서고금과 한국을 종횡(縱橫)하는 노재봉 선생님의 강의는 타교 학생들까지 와서 듣는 최고의 명강의였습니다.

 

5. 박정희 대통령과의 만남

 

그렇게 교수로 일을 하시던 선생님은 1979년 초 우연하게도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뵙게 되었습니다. 한 시간으로 남짓으로 예정했던 만남은 밤늦은 시간까지 이어졌습니다. 많은 말씀을 나누셨습니다. 노재봉 선생님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과의 만남에 대해 절절하고 애틋한 기억을 갖고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노재봉 선생님은 당시 여러 언론 매체 등에 비판적인 글도 적지 않게 게재하시곤 했었습니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그런 선생님을 이해하고 존중하셨으며, 노재봉 선생님도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 외로움과 고초도 깊게 이해하셨습니다. 박정희 대통령께선 그때 노재봉 선생님과 다음번 또 한 번 만나기를 기약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약속은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6. 제6공화국 시대와 정치 입문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께서 서거하셨습니다. 한국은 또 한 번 정치적 격동으로 접어들었습니다. 1980년이 지나나고 격랑 끝에 전두환 대통령 시대를 맞게 되었습니다. 제5공화국 시대였습니다. 제5공화국 시대는 1987년 6.29선언으로 새로운 시대를 맞게 되었습니다. 1987년 대선에서 민정당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었습니다. 이른바 87년 체제라고 불리는 지금까지 이어지는 제6공화국 시대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87년 체제의 시대는 간단치 않은 또 다른 격통의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마침내 민주화의 시대가 열렸다고 했지만 그 이면에는 오랜 기간 자라나고 발호한 반대한민국적 흐름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길게는 지난 87년 체제의 30여년 동안 짧게는 탄핵난동에서 문재인 정권으로 이어진 5년여 동안 뼈가 저리게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 같은 87년 체제, 제6공화국이 시작하는 노태우 대통령 시대, 노재봉 선생님은 정치에 입문하시게 되었습니다. 1988년 선생님은 노태우 대통령의 정치특보를 맡으셨습니다. 새로운 출발을 하는 나라가 안정 속에서 더한층의 도약을 이룩하는데 힘을 보태겠다는 마음에서였습니다. 선생님은 그때 22년을 봉직해 오셨던 서울대학교에 사표를 내셨습니다. 지금 공직에 입문하면서도 갖은 편법으로 교수직을 고수하는 일부 무리들의 행태와는 근본적으로 자세부터가 달랐습니다.

 

7. 총리사퇴, 그리고

 

그렇게 현실정치에 들어서게 된 노재봉 선생님은 1990년 노태우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그리고 1991년에는 제22대 국무총리가 되셨습니다. 그런데 그 기간은 간단찮은 정치적 진통이 이어지던 시기였습니다. 1990년 3당 합당이 있었습니다. 집권 여당인 민주정의당과 야당인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이 합당을 했습니다. 산업화를 이끌고 성취한 세력과 민주화 세력이 하나가 되는 것으로 일컬어졌습니다. 이 3당 합당 체제가 안정으로 이어져갔으면 한국은 안정 속에서 더한층의 발전과 도약을 이어나갈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김영삼 등은 그 역사적 의의를 헤아리고 체화하기에는 식견과 양식이 부족했습니다.

 

그 와중에 노재봉 선생님은 정치적 갈등과 긴장의 부담을 짊어져야 했습니다. 잠재적 경쟁자로 간주한 세력들의 끊임없는 견제와 공격을 마주해야 했습니다. 총리를 물러나시고 1922~1995년 제14대 국회의원을 지내게 되셨습니다. 하지만 노태우 대통령 다음의 그 시절은 이제 다른 시절로 접어 들어가는 시대였습니다. 중대한 고비의 시대였지만 김영삼 대통령 시절은 산업화 세력과 이른바 민주화 세력이 하나가 된 안정 속의 발전을 이루어내는 길이 허물어진 시대였습니다.

 

노재봉 선생님이 직접적인 현실정치를 마감하시게 된 그 시기는 바로 그런 시대였습니다.

 

8. 공부 또 공부

 

선생님은 이후 다시 공부의 길로 복귀하셨습니다. 그리고 2005년 서울디지털대 총장에서 물러나신 뒤로는 야인(野人)으로 ‘실천적 공부’에 매진하고 있으십니다. 선생님과 함께 하는 제자들은 그렇게 선생님께서 주시는 가르침을 받아가며 공부를 이어 왔습니다.

 

그런데 그때도 지금도 대한민국의 시대는 ‘끝나지 않은 전쟁’ 속에 있는 시대입니다. 선생님이 태어나셨을 때부터 그러했으며 이후로도 그러했습니다. 전란 속에서 시작하여 여전히 전쟁이 끝나지 않은 휴전 상태에, 이제는 북한의 핵공격 위협까지 노골화되고 있는 ‘전쟁을 안고 가는 시대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 이제는 세계적으로 또 다른 천하대란의 위기가 어른거리는 상황입니다.

 

선생님께선 선생님 스스로 그 점을 늘 상기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그 같은 사실을 잊지 말라고 거듭 당부하셨습니다. 선생님과 그리고 저희들 부족한 제자들은 그런 긴장의 마음을 늘 되새기며 공부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노재봉 선생님은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인근에 있는 작은 연구실에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90㎡(약 27평)쯤 규모의 작은 공간입니다. 하지만 수 천여 권의 외국 원서들로 가득한 작은 도서관입니다. 여기서 또 다른 후대의 제자들도 찾아와 감히 함께 공부를 하는 기회를 누리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에 이어 플라톤이 그리고 플라톤이 아케데미아를 열어 공부를 이어갔듯이 공부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9. 노태우 대통령 국가장 추도사

 

지난 2021년 10월 30일 노태우 대통령의 국가장에서 추도사를 하셨습니다. 추도사에서 노재봉 선생님은 6·29 선언에 대해 “이승만 대통령의 건국이념, 박정희 대통령의 산업화 성공, 전두환 대통령의 흑자경제의 성과로 이어진 한국 사회구조의 변화를 확인하는 선언이었습니다. 개인과 국가 간의 직접적 지배와 복종 구조에서, 그간 영글어져 온 ‘시민사회’의 출현에 의한 체제 변화를 확인해준 최소의 선언”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 “지금 우리는 핵으로 위협하는 북한에 대해 ‘적(敵)’ 개념조차 지워버린 실존적 위험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시대착오적 종족적 민족주의에 사로 잡혀, 고통을 겪고 있는 중입니다.(중략) 각하께서 역사적 판단을 내리신 시민사회의 존재도 이제 흔들리고 있습니다.” 라고 지적하셨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위업을 이룩하는데 함께 해오신 모든 분들이 아끼고 사랑했던 대한민국의 체제위기에 대해 안타까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역사는 인간들이 만들면서 그 역사를 인간들이 잘 이해하기는 정녕 어려운가 봅니다. 통치의 도덕성은 절제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각하는 통치에서 절실히 깨닫습니다. 각하께서 역사적 판단을 내리신 시민사회의 존재도 이제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노재봉 선생님은 절망이 아닌 희망을 말씀하시며 추도사를 마무리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절망하지 않습니다. 역사는 언제나 휘어져 진행되지 않습니까.”

 

격동하는 전환의 시기를 감당하셔야 했던 노태우 대통령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도 그리고 지금의 한국인들 모두에게도 그리고 바로 앞으로도 이어져가야 할 우리 대한민국의 앞길에 대해 주시는 장엄한 말씀이셨습니다...

 

김 · 도 · 윤 <취재기자>

김도윤 기자 libertimes.k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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