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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A 가톨릭 331] 왜 하필 나인가? ②

2026-05-07 07:56 | 입력 : 리베르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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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프라임 래드너 Ephraim Radner is Professor Emeritus of Historical Theology at Wycliffe College. 역사신학 명예교수


고통받는 이의 전형인 욥은 여기서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왜 하필 나인가?”라는 말은 흔히 욥의 탄식과 연결되어 왔다. “어찌하여 저를 당신의 과녁으로 삼으시어 제가 저 자신에게 짐이 되게 하십니까?”(욥 7,20).

그러나 이것은 고립된 말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이, 곧 하느님께 건네는 말이다. 책이 전개되면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욥의 독특한 존재가 생명력 있는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광대한 창조 세계를 펼쳐 보이시는 것을 발견한다. 하느님의 창조는 넓고, 두려우면서도 아름답고, 동물과 민족들, 바다와 별들, 지혜와 질문들, 영광으로 충만하다.

욥의 고통 한가운데 그의 인간관계의 상실이 놓여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가족, 자녀들, 종들, 그리고 재산의 파괴와 함께 이웃과 동료들에게 이어져 있던 관계의 실타래가 끊어진 것이다. 그러나 욥의 친구들은, 독자들에게 흔히 편협한 도덕주의자라고 폄하되지만, 욥 곁으로 다가온다. 그들은 욥의 곤경이 질식시킨 것처럼 보였던 그 관계들의 무리 속에서 다시 들어 올려진 존재들이다.

그들이 거기에 있다. 그리고 욥기는 하느님과의 대화인 만큼이나 그들과의 대화이기도 하다. 모든 말이 끝나고, 그의 눈이 열렸을 때, 비록 그의 마음은 여전히 부서져 있었겠지만, 욥은 그릇된 길을 간 이 동료들을 위해 기도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참된 고통의 드러남을 알아본다. 곧 다른 사람들이 이루고 있는 풍요로움이다(욥 42,10).

대 그레고리오 교황은 그의 놀라운 저작 『욥기 도덕 해설』 에서 이 “왜 하필 나인가?”의 구절을 이렇게 설명한다. 하느님께서는 욥의 고통, 곧 의로운 개인의 고통을 사용하시어 “다른 이들” 앞에서 덕의 삶을 “드러내신다.” 욥은 이제 가까운 이들과 먼 이들의 눈과 마음 앞에서 “공개적인 시련에 노출”된다.

그레고리오는 더 나아가 욥을 하느님 질서의 전체 파노라마 안에 놓는다. “의인들의 삶은 사람들과 천사들에게 구경거리로 세워진다. 그들은 채찍으로 맞을 때, 모든 이에게 알려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통받는 이들에 대해 이런 말을 거의 듣지 못한다. 하물며 우리 자신에게 그것을 감히 믿으려 하기에는 더욱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충분히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천사들의 삶에까지 닿았다.” 내가 황량하게도 “오직 나뿐”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그 ‘나’와, 어떤 방식으로든 연결되어 있는 다른 이들은 언제나 존재한다. “왜 저를 따로 골라내셨습니까?”라는 물음은 결국 욥이 자기 개별성의 결여가 아니라, 그 개별성이 하느님 자신의 손으로 이루어진 경이의 장관 안에서 얼마나 섬세하게 짜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인식하게 되는 영역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된다.

이 삶을 “견딘다”는 것, 곧 그것을 고통으로 겪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넘치고 감싸 안는 창조 선물들의 영역 안에서 살아간다는 뜻이다. 고통을 받아들인다는 것, 곧 나의 삶이든 다른 이의 삶이든 그 삶의 형태를 짊어진다는 것은 하늘 앞에서 하느님 아름다움의 폭을 드러내는 것이다. 내 존재의 주름과 접힘은 수많은 이들의 다양한 그물망과 덩굴손 속으로 뻗어 나간다.

이것은 거짓으로 명랑하게 들릴 수도 있고, 음울하게 침울한 말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들리는 것은 오직 우리 시대의 귀에만 그럴 것이다. 우리 시대는 삶의 성격을 왜소하고 고립된 경험으로 짓밟아 버렸기에, 법적으로 허용되는 이른바 “조력” 자살 같은 것이 현대적 덕목인 “보편적 선의”를 표현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게 되었다.

내 친구의 슬픈 삶은, 그가 보기에 그러했듯이, 결코 다른 이들과 함께하는 삶이 아닌 적이 없었다. 가족, 배우자, 동료들, 학생들, 슈퍼마켓 직원들, 줄 서 있던 사람들, 의사들, 서점 직원들, 사제들, 기도 속의 침묵하는 동반자들. 그렇다면 그것은 “슬픈” 삶인가? 아니면 풍요로운 삶인가? “왜 하필 나인가?”라는 질문은, 굳이 던져야 한다면, 아마도 “왜 하필 우리인가?”로 제기되는 편이 더 적절할 것이다.

그 질문만으로도 충분히 어렵다. 그러나 그것은 이스라엘의 질문이지, 고립된 한 이스라엘 사람의 질문이 아니다. 다윗의 시편들은 겉으로는 온통 개인적 탄식처럼 보이지만 그의 백성을 위해 쓰인 것이다. 그리고 이 찬가들을 당신 자신의 것으로 삼으시는 그리스도께서는 일차적으로 자신의 육체적 고통을 “겪으시는” 분이 아니라, 당신 민족의 고통, 참으로 아담의 온 후손이 겪는 고통을 짊어지시는 분이다.

고통의 질문을 규정하는 것은 ‘나’임이 아니라 ‘함께 있음’이다. 일단 이런 방식으로 질문이 제기되면, 개인적 계산법은 지각변동처럼 바뀌어야 한다. 고통은 언제나 다른 이들과 함께, 다른 이들을 위하여 겪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고통은 언제나 우리의 몸을 열어젖혀, 하느님 창조 선물 자체의 현실을 마주하게 한다. 그것은 현존하는 가장 순수한 형태의 자연신학이다.

존 던의 유명한 묵상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 누구도 섬이 아니다. 그 자체로 완전한 섬은 없다. 각자는 대륙의 한 조각이며, 본토의 일부이다.” 여기서 던은 땅이라는 지상적 은유를 사용한다. 우리 각자는 그 땅의 “흙덩이”이거나 “곶”이다. 한 생명을 잃는 것은 전체를 “줄어들게” 한다. 참으로 옳은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양적인 비유이고, 고통의 성격은 측정될 수 없다. 그것은 흙덩이가 아니라 살아 있는 존재들의 관점에서 보는 편이 더 낫다.

다시 말해 고통은 “생명적인”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살아가고, 그럼으로써 고통을 겪는다. 교회 안에서 가장 강렬하고 친밀하게 그러하며, 동시에 아담의 후손 전체의 모든 지체들 속으로 뻗어 나가며 그렇게 한다.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받을 자격이 없는 은총이다. 그러나 분명 은총이다. <끝>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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