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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A 가톨릭 293] 안드레센 vs. 아우구스티노

2026-03-30 07:15 | 입력 : 리베르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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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P. 하먼 Thomas P. Harmon is Professor and Scanlan Foundation Chair of Theology at the University of St. Thomas in Houston, Texas. 세인트 토마스 대학교 신학 교수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벤처 자본가 중 한 명인 마크 안드레센은 최근 한 인터뷰에서 자신에게는 “성찰이 전혀 없다,” 혹은 가능한 한 최소한이라고 말했다.

“앞으로 나아가라. 행동하라.” 그는 성찰을 과거에 머무는 것, 정체되는 것, 그리고 지난 세기의 죄책감 중심 치료 문화와 연결짓는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위대한 창조자들은 아침에 일어나 자신을 돌아보며 시작하지 않는다. 그들은 일어나서 무언가를 만들어낸다. 특히 현대의 치료 문화가 낳은 병리적 현상에 지친 어떤 유형의 미국 독자들에게는 이러한 주장이 단지 그럴듯할 뿐 아니라 오히려 상쾌하게 들릴 것이다.

“그냥 행동하면 된다(You can just do things)”라는 대중적인 표현은 안드레센이 비판하는 무기력이나 마비 상태에 대한 반응이다. 심층 생태주의에서부터 트랜스휴머니즘과 포스트휴머니즘에 이르기까지, 우리 시대는 인간 존재 자체를 의심한다.

이러한 의심은 특히 인간의 행위에까지 확장된다. 어쩌면 우리는 현대 기술을 통해 행사하는 힘에 압도되어 있을지도 모르고, 혹은 인간이 저질러 온 악에 대해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의 행위를 통해 짊어지는 책임과 부담에 지쳐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안드레센의 말은 동시에 혼란스럽거나, 적어도 중요한 점에서 불완전하다. 그는 인간을 자기 안에 가두어 끝없이 숙고하고, 비판하며, 재고하게 만들어 행동을 저해하는 일종의 내면성이 존재한다는 점에서는 옳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가장 깊은 것을 성찰하는 일이 대부분 부담이 된다고 가정한다.

그는 내면성에 대한 더 오래되고 훨씬 더 진지한 이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듯 보인다. 그것은 치료와는 거의 관련이 없고, 자기 집착과는 더욱 거리가 먼 이해이다. 그 오래된 이해에서 내면으로의 전환은 인간이 현실로 돌아오는 과정의 일부이다.

문제는 단순히 프로이트나 1920년대 빈이 아니라, 내면성을 자기 폐쇄적 영역, 즉 개인이 오직 자신의 생각만을 마주하는 밀폐된 공간으로 보는 데카르트적 습관에 있다. 일단 내면성이 이렇게 규정되면, 그것에 대해 조급함을 느끼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는 우리가 세계와 단절되어 있다는 전제를 포함한다.

즉, 이쪽에는 사고하는 실체(res cogitans), 저쪽에는 연장된 실체(res extensa)가 존재한다는 식이다. 그렇다면 왜 그곳에 시간을 낭비해야 하는가? 결국 삶은 자아가 외부 세계와 접촉하는 가운데 쉽고 때로는 즐겁게 이루어지는 것인데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우구스티노가 이해한 방식이 아니다. 아우구스티노는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내적 삶의 위대한 교부이다. 그에게 내면으로의 움직임은 결코 사적인 심리적 극장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영혼은 자신 안에서 절대적 확실성을 찾거나 과거를 되새기기 위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외적인 것과 가시적인 것만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영혼이 참으로 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자신이 놓여 있는 질서를 회복해야 하기 때문에 내면으로 향한다. 아우구스티노에게 외적인 것에서 내적인 것으로의 이동은 동시에 상승 운동이다. 즉, 인간 위에 계신 분, 곧 하느님을 향한 운동이다.

다시 말해, 내면으로의 전환은 자아 안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아를 창조하신 분이시며 오직 그 빛으로만 인간이 자신의 행위를 판단할 수 있는, 자아 위에 계신 창조되지 않은 빛 안에서 완성된다. 인간 정신은 더 큰 존재 질서 안에서만, 그리고 궁극적으로 인간 자신보다 더 인간에게 친밀하신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자신을 알 수 있다. 아우구스티노의 내면성은 심리적이라기보다 적어도 그만큼 신학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도덕적이며 금욕적이다. 가장 깊은 문제는 인간에게 내적 삶이 있어서 그 안에서 길을 잃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죄가 우리의 주의를 무질서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 우리는 더 낮은 것들에 잠식된다. 우리는 자신을 명확히 보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러한 명료함은 우리 자신의 죄와 대면하게 만들고 정화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정신을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절제와 은총을 필요로 한다. 현대의 성찰이 문제인 이유는 그것이 내면으로 향하기 때문이 아니라, 혹은 과거에 머문다는 점 때문도 아니다. 문제는 인간이 무엇인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그리고 자신을 진실하게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 없이 내면으로 향하는 데 있다.

이러한 구분이 분명해지면, 안드레센의 태도는 냉철하다기보다 회피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아마도 그는 자신의 행위를 초월적 기준에 따라 평가받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과거에 얽매일 수 있고, 무익하게 고민하며, 반추를 통해 자신의 상처를 더욱 악화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판단과 책임을 피하기 위해 내면성을 거부할 수도 있다. 그는 끊임없이 움직임으로써 더 어려운 질문들을 회피할 수도 있다. 이런 경우 “앞으로 나아가라”는 말은 강점이 아니라 책임 회피를 위한 조언이 된다.

기술 세계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유혹 중 하나는 인간을 기능적으로 이해하려는 것이다. 무언가가 결과를 만들어낸다면 중요한 일은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면 내면성은 사치스럽거나 퇴폐적인 것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에 대한 매우 빈약한 이해이다.

인간은 단지 세상에서 행동하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판단하고, 회개하며, 기억하고, 사랑의 질서를 바로잡아야 하는 피조물이다. 이러한 질서와 단절된 행위는 자유가 아니라 방향을 잃은 표류가 된다.

안드레센이 감지한 것, 그리고 그의 많은 청중이 함께 느낄 것은, 우리 문화가 내적 삶을 왜곡시켰으며 종종 인간과 그 행위 능력을 혐오하거나 의심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 해답은 영혼에 덜 집중하거나, 우리가 무엇인지 혹은 영원과의 관계 속에서 어디에 서 있는지에 대해 덜 자각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나은 내적 삶에 대한 이해를 회복하는 것이다.

잘못된 성찰에 대한 대안은 끝없는 외향성, 즉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혹은 우리가 한 일의 가치가 무엇인지 묻지 않은 채 프로젝트에서 프로젝트로 흘러가는 삶이 아니다. 그것은 진실한 자기 인식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인간을 다시 하느님 앞에 세우기 때문에, 세상 안에서 선하고 온전히 인간다운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 중 하나이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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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명 |2024.11.14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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