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지 클랜시 사건은 온라인상에서 기묘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클랜시는 2023년 매사추세츠주 덕스베리에 있는 자택에서 자신의 자녀들이 목이 졸린 채 발견된 사건과 관련해 세 건의 1급 살인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그녀는 아이들을 죽였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7월 재판이 시작된 이후, 인터넷에서는—겉보기에는 전부 여성들로 이루어진 듯한—상당한 규모의 사람들이 클랜시를 중심으로 결집해, 그녀가 남편 패트릭에 의해 누명을 썼다고 확신하고 있다.
공식 사건 시간표상 살인이 벌어진 시각에 패트릭이 가족을 위해 심부름하러 다니는 모습이 담긴 감시카메라 영상을 보여 주는 인스타그램 게시물에는 “남편이 한 짓이다”라는 댓글이 달렸다. 또 다른 사람은 “신발을 봐라. 서로 다르다”고 덧붙인다.
이 현상을 범죄 실화 다큐멘터리를 지나치게 많이 본 탓으로 돌리기는 쉽다. 하지만 더 흥미로운 가능성은 이 여성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어떤 문제를 감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사건을 둘러싼 격렬한 반응은 오늘날의 부모됨이 과연 무엇이 되어 버렸는지를 둘러싼 훨씬 더 깊은 양가감정을 전면에 드러낸다.
패트릭을 의심하는 논리는 단순한 비난에서 시작된다. 그는 나쁜 아버지이자 나쁜 남편이었다는 것이다. 많은 여성들은 클랜시 부부의 결혼생활에서 익숙한 모습을 발견한다. 남편은 지나치게 자주 출장을 떠나고, 편안하게 브런치를 즐기는 시간도 많으며, 아내에게 너무 많은 짐을 떠넘긴다는 것이다. 클랜시의 일기에는 어머니로서 겪었던, 너무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고충들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작가 레슈마 사우자니는 이렇게 쓴다. “당신이 어머니라면, 이 고백들 가운데 어느 것이라도 직접 썼을 법하다.”
그녀는 이어 말한다. “우리는 여성들에게 그들의 인생에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가장 힘든 일을 하라고 요구하면서도, 다른 모든 부유한 국가들이 결코 양보할 수 없는 필수조건으로 여기는 사회적 기반은 전혀 제공하지 않는다.”
또 다른 논평자는 《Parents》 잡지에서 린지는 진심으로 최선을 다하려 했던 사랑 많은 어머니였다고 쓴다. “이제 우리 삶 속의 새로운 부모들을 돕기 위해 더 잘해야 하고, 더 많은 것을 해야 할 때다.”
이렇게 클랜시는 자신들이 모든 것을, 그것도 그 이상을 감당하고 있다고 믿으며 남편과 사회로부터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억울한 어머니들의 상징이 된다. 버림받았다는 감정에 관한 한, 어디에 사는 어머니든 자신의 모습을 그녀에게 투영할 수 있다. 그 동일시가 너무도 강렬하기 때문에, 이들은 린지가 동시에 살인자일 수는 없다고 확신한다. 살인이란 자신들이 공감할 수 없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편이 한 짓이다”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심지어 클랜시의 변호인조차 제기하지 않는 주장이다.
모든 증언을 종합하면 린지는 “좋은 어머니”였다. 그렇다면 그 ‘좋은 어머니됨’이란 무엇을 의미했을까?
이 가족의 전직 보모는 그녀를 아이들의 안전과 수면 시간표, 그리고 무엇을 먹는지에 극도로 신경 쓰는 “훌륭한 어머니”로 묘사했다. 법정에서 낭독된 린지의 일기에는 생후 8개월 된 아기의 낮잠 시간을 “분 단위로” 집착하듯 관리하고, 아이가 발달 단계별 기준을 제대로 충족하고 있는지, 첫 두 아이에게 했던 것만큼 세 번째 아이에게도 집중적인 양육을 할 수 있는지를 끊임없이 걱정했던 한 여성의 생각이 담겨 있다.
그녀는 수면 훈련 때문에 죄책감에 시달렸고, 모유수유를 계속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괴로워했으며, 충분한 돈을 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과 이러한 온갖 걱정 속에서 남편과 충분히 정서적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자책했다.
아이들이 살해되기 몇 달 전, 그녀는 이렇게 썼다.
“우리 세대는 양육의 모든 측면과, 제대로 하지 않았을 때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잘못된 일들에 관한 정보에 압도당하고 있다.”
그리고 또 이렇게 적었다. “지난 5년 동안 나는 내 머릿속을 온통 양육에 관한 것들로만 채웠고, 이건 건강하지 않다.” 그녀는 자신이 “무언가를 잘못해서 아이들의 발달을 망칠까 봐” 두렵다고 썼다.
지난 수십 년간 ‘올바른’ 육아를 실천하려 애써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녀가 묘사하는 세상을 알아볼 것이다. “수면 부족은 학습과 행동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식의 헤드라인이나, 모유 수유가 단순히 ‘최선’일 뿐만 아니라 아이들을 더 건강하고 행복하게 만들며, 심지어 성인이 되어서도 더 큰 성공을 거두게 한다는 보고서를 귀담아듣지 않는 부모라면 큰 곤경에 처할 것이다.
애착 유형, 화면 노출에 대한 경고, 감정 조절, 감각 놀이, 배밀이 운동(tummy time)에 관한 정보가 끝도 없이 쏟아지고, 무엇인가를 잘못하면 아이의 미래를 확고히 보장할 수도, 반대로 망칠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따라붙는다.
단지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무해해 보인다. 그러나 그에 따르는 결론은 명백하다. 부모가 어떤 결과에 영향을 줄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부모의 책임이며, 실패할 경우 그것은 부모의 잘못이라는 것이다.
양육서들이 린지 클랜시로 하여금 자신의 아이들을 죽이게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녀가 자신의 고통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언어는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진 하나의 문화적 어휘를 반영한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클랜시의 옹호자들이 본능적으로 연결되는 지점인 듯하다. 실수를 저질러 아이를 망칠지 모른다는 두려움, 끝없는 자기감시, 좋은 어머니란 모든 사소한 위험까지 알고 관리해야 한다는 믿음 말이다.
199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샤론 헤이스는 많은 여성들이 경험하는 현대 모성의 현실을 “문화적 모순”이라고 불렀다. 어머니들은 노동자로서도 치열하게 일할 것을 요구받는 동시에, 자녀에게도 고도로 집중적인 양육을 해야 한다는 기대를 받는다는 것이다.
여기에 사회학자 프랭크 퓨어디가 “부모 결정론(parental determinism)”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해진다. 즉 부모가 자녀의 인생을 사실상 전능하게 결정한다는 문화적 믿음이다. 그 결과 양육은 끊임없는 노력과 최적화를 요구하며 죄책감으로 가득 찬 하나의 프로젝트가 되어 버렸다.
오늘날에는 “그래서 부모가 뭘 했는데?”라는 질문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 사회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 단지 온 마을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현대의 부모됨이라 불리는 이 위태로운 시기를 견뎌 내기 위해서는 수많은 과학자와 전문가, 제도, 인식 개선 운동가들, 그리고 적절하게 조합된 정신과 약물까지 필요한 것처럼 여겨진다.
이렇게 생겨난 부담에 대해 희미하게나마 깨닫는 경우도 있다. 《가디언》은 “인스타그램에 올릴 만한 터무니없는 모성의 기준”을 지적하고, 사우자니는 현대의 모성이 “어느 누구도 혼자 짊어지도록 요구받아서는 안 되는 무게”라고 쓴다.
그러나 여기서 ‘혼자’라는 말은 너무 많은 역할을 떠맡고 있다.
해결책은 현대 부모됨에 대한 문화적 요구가 지나치게 확대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의 손을 동원하는 것—특히 아버지들의 손을 더 많이 동원하는 것—이라고 여겨지는 듯하다.
헤이스 자신도 아버지의 참여가 늘어나면 어머니들의 부담이 줄어들 수 있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 결과란 결국 남성들 역시 현재 여성들을 괴롭히고 있는, 어디까지 늘어날지 상한선조차 분명하지 않은 책임들에 짓눌리게 되는 것일 수 있다고 경고했다.
집중적 모성으로부터의 해방은 결국 집중적 부모됨을 모든 사람에게 보편화하는 것에 불과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패트릭 클랜시가 한 짓이다”라고 주장하는 집단은, 부모됨이라는 똑같은 짓누르는 무게를 지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남편들을 향해 여성들이 얼마나 큰 분노를 품고 있는지를 보여 준다.
그러나 그 해결책은 지쳐 있는 부모들에게 그 짓누르는 무게를 똑같이 나누어 지우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패트릭 클랜시가 살인자라는 망상으로 뛰어드는 것 역시 답이 아니다.
우리는 린지로 하여금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을 저지르게 한 진정한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끝내 알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사건에 대한 온라인의 반응이 현대 부모됨의 어딘가가 망가져 있음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문제를 바로잡는 것이 무고한 한 남성을 박해하는 것보다 우리 문화에 훨씬 더 큰 선을 가져다줄 것이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