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탈라리코는 “그리스도교를 좌파를 위해 되찾고 싶다”고 말한다. 이것은 현재 텍사스에서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한 탈라리코와 진행된 뉴욕타임스 인터뷰의 제목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표현 자체가 많은 것을 드러낸다. 사람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되찾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진보적 주류 교회가 무엇이든 간에, 생명력 있고 살아 있는 그리스도교를 오랫동안 실제로 소유하고 있었던 적은 없다. 뉴욕타임스가 이런 방식으로 질문을 제기했다는 사실 자체가, 적어도 아이러니하면서도 솔직한 패배의 인정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탈라리코 개인의 재능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는 분명히 매우 뛰어난 능력을 지닌 인물이다. 그는 한 세대 동안 진보적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등장한 가장 타고난 소통 능력을 가진 인물 가운데 하나다. 지나치게 감상적이지 않으면서도 따뜻하고, 공격적이지 않으면서도 핵심을 찌르며, 오늘날의 민주당 정치인이나 관료들이 거의 구사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성경의 언어에 능숙하다.
그는 믿음과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신학생처럼 자연스럽게 언급하며 이야기한다. 에즈라 클라인은 그에게 분명히 매료된 모습이었다. 만약 앞으로 10년 동안 진보적 그리스도인들이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영향력을 얻고자 한다면, 탈라리코야말로 그들이 선택할 바로 그런 그릇일 것이다.
문제는 그릇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내용이다.
겉치레와 틱톡에서의 바이럴 인기를 걷어내고 보면, 탈라리코가 제시하는 것은 1960년대 이후 미국 주류 교회 좌파가 계속 제시해 온 바로 그 프로그램이다. 그것은 교리적 실체가 제거된 그리스도교를 민주당 전국위원회(DNC)의 우선순위로 다시 채워 넣는 것이다. (혹은 민주사회주의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조 로건에게 하느님께서 강생 이전에 마리아에게 “동의(consent)”를 구하셨다고 말하며, 이를 성경이 낙태를 승인한다는 증거로 제시한다. 그는 에즈라 클라인에게 “결혼에 관해 성경은 일관성이 없다”고 말하며, 갈라티아서 3장 28절에서 바오로 사도가 말한 선언은 “1세기에 비해 꽤 ‘각성(woke)’한 발언”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모든 종교가 그리스도교와 동일한 진리를 담고 있다고 말한다.
이것들은 대담한 새로운 통찰이 아니다. 1984년 프린스턴 신학교 휴게실에서도 들을 수 있었던 바로 그 주장들이다. 그리고 그때도 틀렸고 지금도 틀렸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전달 방식뿐이다.
아이러니는 여기서 더욱 짙어진다. 탈라리코 자신은 장로교 신자, 곧 미국장로교회(PCUSA)의 교인이다. 이 교단은 바로 탈라리코가 제안하는 신학적 프로그램을 끝까지 밀어붙였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주는 거대한 실험이 되어 왔다.
그 결과는 재앙적이다. PCUSA는 1965년에 425만 명의 교인을 기록하며 정점을 찍었다. 그러나 올해에는 100만 명 아래로 떨어질 것이다. 2024년 한 해에만 약 4만 9천 명의 교인을 잃었다. 전체 교회의 3분의 2는 교인이 100명 이하이며, 3분의 1은 70세 이상이다. 3억 3천만 명이 사는 미국에서 2024년에 새로 개척된 교회는 단 네 곳이었다. 이 교단은 단순히 쇠퇴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상 제도적 호스피스 상태에 있다.
그리고 바로 탈라리코가 지금 제안하는 방식 - 성경의 권위를 세속적 진보주의의 도덕적 직관 아래에 두고 그 결과를 “복음”이라고 부르는 방식 - 으로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반면 탈라리코가 반대하는 신학적 보수 진영은 실제로 성장하고 있다. 또 다른 미국장로교회(PCA)는 2024년에 약 2% 성장했고, 22개의 새로운 교회를 세웠다.
더 넓게 보면 새로운 그리스도교 우파 - 전국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고전적 그리스도교 학교들, 개신교 사회 교리와 소명 신학을 회복하려는 기관들 - 은 21세기 미국의 실제 사회·경제적 조건에 응답하는 현실적인 구조를 구축하고 있다.
여기서 탈라리코의 주장 가운데 가장 중요한 전도(顚倒)가 드러난다. 그는 자신의 정치가 약자들과의 연대를 대표하며, 반대자들은 지배 세력의 편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은 우리 전통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리스도교 민족주의나 종교 우파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다.
탈라리코가 속한 정치 연합은 수십 년 동안 미국 노동계급을 체계적으로 약화시키는 노동 정책을 추진해 왔다. 사실 NAFTA에서 중국의 WTO 가입, 제조업 해외 이전에 이르기까지 이어진 초당적 무역 합의는 바로 그 결과를 낳았다.
새로운 그리스도교 우파는 이러한 정책을 이미 잘못이었다고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탈라리코의 설교 같은 발언을 환호하는 진보적 세계주의자들은 그렇지 않다.
이 정책들은 수백만 개의 일자리를 해외로 이전시켰다. 그곳 노동자들은 미국 어느 주에서도 불법이 될 조건에서 일한다. 노동조합 결성 권리도 없고, 안전 보호도 없으며, 학대에 대해 항의할 수 있는 수단도 없다.
같은 정치 연합은 또 하나의 정책을 추진해 왔다. 그것은 사실상 국내 노동 하층계급을 만들어내는 이민 정책이다. 수백만 명의 노동자가 미국 노동법 보호 밖에 존재하는 상태에 놓여 있다. 그들은 노조를 만들 수도 없고, 감독 기관에 항의할 수도 없으며, 최저임금을 요구할 수도 없다. 심지어 많은 경우 자신들이 세금으로 낸 혜택조차 받을 수 없다.
이것은 정의를 만드는 정책이 아니다. 또한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정책도 아니다. 이것은 임금을 낮추는 그림자 노동력을 만들어 낼 뿐이다. 그 결과는 이민 노동자와 토착 노동자 모두에게 피해를 주고, 대신 진보적 그리스도교가 충실히 대변해 온 관리 엘리트 계층을 더 부유하게 만든다.
이 현실을 외면하는 그리스도교 - 제조업 공동체의 붕괴를 더 높은 도덕적 비전의 부작용 정도로 치부하는 그리스도교 - 는 경제적 삶에 대해 도덕적으로 판단할 능력을 잃어버린 신앙이다. 반면 새로운 그리스도교 우파는 실제로 전체적인 정의의 비전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원칙을 주장한다. 무역 정책은 미국 노동자의 존엄성을 고려해야 한다. 이민 정책은 먼저 기존 정치 공동체의 공동선에 봉사해야 한다.
이들은 개신교 사회 사상의 깊은 전통에서 영감을 얻는다. 종교개혁이 강조한 통치자의 보호 책임, 소명의 개혁파 신학, 자연법 전통이 이해하는 공동선 등 이 모든 전통은 자유지상주의도, 진보주의도 아닌 - 참된 의미에서 그리스도교적인 - 정치적 입장을 형성하는 데 이미 활용되고 있다.
탈라리코는 하워드 서먼의 『예수와 버림받은 사람들』을 추천하며, 그리스도교가 정의를 위한 비폭력 사회 변화를 이끌 수 있는 영적 원천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오늘날 진정으로 버림받은 사람들은 틱톡에서 바이럴되는 설교로 자신들을 해방시켜 줄 진보적 장로교인을 기다리고 있지 않다.
그들은 탈산업화된 미국에서 잊혀진 남녀들이다. 오피오이드 중독으로 붕괴된 가정들, 저임금과 부채 속에서 허덕이는 젊은 세대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사랑의 종교는 모두 같은 진리를 가리킨다”고 말하는 그리스도교가 아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진리를 말하는 그리스도교다.
하느님에 대한 진리, 인간 자신과 구원에 대한 진리, 인간의 몸의 의미에 대한 진리, 세상의 도덕 질서에 대한 진리, 그리고 신학적 확신과 같은 열정으로 그들의 물질적 존엄을 위해 싸우는 진리다.
새로운 그리스도교 우파는 모든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런 그리스도교가 되려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탈라리코가 제시하는 대안은 겉만 하얗게 칠한 무덤일 뿐이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