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연방대법원이 캔자스주의 부분출산낙태(partial birth abortion) 금지법을 유지한 판결 이후, 시카고대학교 법학 교수 제프리 스톤은 악명 높게도 이렇게 묻고 스스로 답했다.
“그렇다면 이 판결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몹시도 불편한 관찰 하나를 제시하겠다. 곤잘레스 사건의 다수의견에 속한 다섯 명의 대법관은 모두 가톨릭 신자다.” 그는 그들의 판단이 “종교적 신념과 도덕 사이의 근본적 차이를 존중하지 못했을 때에만” 이해될 수 있다고 추론했다.
가톨릭 신자 대법관들이 자신의 종교적 견해에 따라 판결을 내렸다는 이러한 암시는 당시 안토닌 스칼리아 대법관을 격분시킨 것으로 전해진다. 이러한 맥락을 고려하면, 최근 출생시민권에 관해 미국 가톨릭 주교회의(USCCB)가 제출한 법정의견서는 더욱 충격적이다. 그 의견서는 말 그대로 연방대법원에 헌법 해석에서 가톨릭 신학을 채택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USCCB가 트럼프 대통령의 출생시민권 제한 시도에 반대 입장을 표명한 것 자체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민과 국경 문제에 있어서 USCCB는 악명 높을 정도로 좌파적 입장을 취해 왔다. 예컨대 2024년, 필자가 민주당의 크리스 머피 및 척 슈머와 함께 협상에 참여했던 국경법(Border Act)에 대해, 그것이 지나치게 엄격하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이민 문제에서 그 두 인물보다 더 좌측에 선다면, 이는 이미 주류에서 한참 벗어난 위치다.
그러나 국경법과 같은 입법 사안에서 USCCB는 선출직 대표자들에게 정책적 입장을 표명하고 있을 뿐이며, 그것 자체가 반드시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들의 신학적 원리의 신중한 적용에 동의하지 않을 수는 있겠지만, 입법 과정에서 종교적 증언을 제시하는 권리를 문제 삼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벌거벗은 공적 광장(naked public square)”을 원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출생시민권은 다른 문제다. 이는 수정 헌법 제14조의 올바른 해석에 관한 법적 사건이다. 다시 말해, 트럼프 대통령의 행정명령이 유지되어야 하는지는 법적 분석을 통해 해결되어야 할 법률적 질문이다. 이는 정책 옹호가 아니다.
그 법적 분석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수정헌법 제14조가 비준될 당시 그 조항의 본래적 공적 의미는 무엇이었는가? 동시대 및 유사한 시민권 제도들은 어떠했는가? 제14조의 용어를 적용함에 있어 의회의 역할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에 답함에 있어 연방대법원 판례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 이러한 문제들은 정직하게 직면할 경우 결코 쉽지 않으며, 대법원은 결코 가벼운 과제를 맡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대법원이 묻지 않을 것이며 또 묻지 말아야 할 것은, 출생시민권이 도덕적인지 여부, 혹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의해 요구되는지 여부다. 그러나 USCCB는 달리 생각하는 듯하다. 그들이 제시한 주장 일부를 보라. “서구 전통과 헌법, 그리고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은 출생시민권을 지지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모든 인간의 동등한 존엄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출생시민권은 모든 인간의 고유한 존엄에 관한 교회의 근본 교도와 일치한다.” “출생시민권은 보조성의 원리에 부합한다.” “이 행정명령은 비도덕적이다.” 좋다, 논증을 위해 그렇다고 치자. 그렇다면 어쩌란 말인가? 그러한 주장들은 수정헌법 제14조의 본래적 공적 의미나 판례의 역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 문제는 그들이 인용한 권위들에서도 반복된다. 그들은 단 다섯 건의 법률 사건과 두 개의 헌법 조항만을 인용한다. 반면 “성경”에 대해서는 열한 개의 항목을 제시하고, 토마스 아퀴나스와 아우구스티누스를 인용한다. 또한 교회법전, 교황청 평의회 하나, 그리고 서로 다른 아홉 명의 교황에 대한 언급도 포함되어 있다. 교황 프란치스코의 관점을 통해 수정헌법 제14조를 해석한다는 것은, 신선하다 못해 전례 없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이를 ‘비판적 가톨릭 이론(Critical Catholic Theory)’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의견서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보아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는다. “출생시민권은 인간이 사회적 존재로 창조되었으며, 정치 권위는 공동체 안의 모든 인간의 고유한 존엄을 확인하고 보호해야 할 도덕적 의무를 지닌다는 교회의 가르침과 부합한다.” 그러나 이는 반증 가능한 비약이다. 인간의 사회적 본성과 고유한 존엄은 보편적이고 양도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모든 국가가 출생시민권을 가져야 한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먼저 교황청 국가의 법부터 바꾸는 것이 어떻겠는가.
의견서는 이어 말한다. “나아가 출생시민권은, 출생과 동시에 사람을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인정함으로써 그들의 시민적 삶 참여를 가능하게 하고 국가 권력이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섬기도록 보장한다는 점에서, 가톨릭의 보조성 원리를 반영한다.” 그러나 보조성 원리—즉 결정은 가장 낮은 책임 단위에서 내려져야 한다는 원칙—가 출생시민권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는 수수께끼에 싸인 의문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출생시민권이 “어린이를 특정 정치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인정”하고 “모든 인간의 내재적 가치를 승인”한다는 점과 관련된 듯하다. 그러나 쟁점의 본질은 바로 그 어린이들이 법적으로 미국 정치 공동체의 일부인가 하는 것이다. 이는 보조성과 아무 관련이 없다. 더욱이 보조성 자체도 헌법 해석에 실질적 근거를 제공하지 않는다.
의견서의 결론은 그 의도를 분명히 드러낸다. “이 사건은 본질적으로 단지 시민권 지위나 수정헌법 제14조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이는 법이 우리 공동체 안에서 태어난 이들의 동등한 가치를 인정할 것인지, 아니면 부정할 것인지에 관한 문제이며, 법이 하느님의 모든 자녀의 인간 존엄을 보호할 것인지에 관한 문제다.” 이는 사법적 가톨릭 행동주의를 노골적으로 지지하는 가운데 제시된, 신학적으로도 일관성을 결여한 주장이다.
이는 법에 대한 비참한 접근일 뿐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교회가 축적해 온 법적 신뢰를 소모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가톨릭 신학의 권위 있는 견해가 실질적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사안들도 있다. 예컨대 종교 자유나 교회의 자율성에 관한 사건들이다.
특히 연방대법원에서는 신뢰성이야말로 통용되는 화폐다. 그럼에도 USCCB가 일종의 신정적 브랜다이스 의견서(theocratic Brandeis brief)를 통해 그 신뢰를 스스로 허비하는 모습은 실로 유감스럽다.
<Brandeis brief: 미국 연방대법원 판사였던 루이스 브랜다이스가 1908년 Muller v. Oregon 사건에서 제출한 의견서에서 유래한 표현으로, 순수한 법리 논증을 넘어 사회과학 자료·도덕적 주장·정책적 근거 등을 광범위하게 동원하는 유형의 법정 의견서를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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