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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전의 쉬자툰(许家屯) 모습 - 독자 제공 |
1989년 6월 4일,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벌어진 유혈 진압은 중국 현대사의 분수령이었다. 학생들의 민주화 요구는 탱크와 총칼 앞에 무너졌고, 그 충격은 중국 내부뿐 아니라 중국 공산당 체제의 심장부까지 파고들었다.
학살 이후, 학운을 동정하거나 개혁 노선을 공유했던 일부 고위 관료들은 체제 내부에서 ‘위험 인물’로 낙인찍혔고, 그중 가장 상징적인 인물이 바로 쉬자툰(许家屯)이었다.
홍콩 주재 ‘친차대신’, 개방적 관료의 이력
1916년 장쑤성 루가오 출신인 쉬자툰은 신사군 출신 혁명 1세대로, 장쑤성 당서기, 중앙위원,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을 지낸 정성부급 고위 관료였다.
1983년 그는 중국 공산당의 홍콩 최고 대표 자리인 신화사 홍콩지사 사장 겸 홍콩·마카오 공위 서기로 임명됐다. 당시 홍콩 반환을 앞두고 중영 협상이 진행 중이던 민감한 시기였다.
쉬자툰은 강압보다 설득을 중시하는 방식으로 홍콩 정·재계와 폭넓게 교류했고, 이는 그를 “개방적인 공산당 관료”로 각인시켰다.
1989년 봄, 베이징에서 “반부패·민주·인권”을 외친 학생운동이 확산되자 쉬자툰은 이를 애국적 개혁운동으로 인식했다. 그는 당시 총서기였던 자오쯔양과 인식을 공유했고, 학생운동에 대한 강경 진압에 반대했다.
계엄령 선포 이후, 신화통신 홍콩지사 일부 간부들은 6·4 학살을 규탄하고 희생자를 추모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는 베이징 지도부를 격분시켰고, 쉬자툰은 더 이상 ‘신뢰 가능한 인물’이 아니게 됐다. 그가 서 있던 자리는 순식간에 정치적 표적으로 바뀌었다.
“앉아서 죽느니 떠난다”
1990년 봄, 쉬자툰은 자신에게 닥쳐올 운명을 감지했다. 장쩌민 체제하에서 숙청이 본격화되고, 리펑 라인이 주도한 강경 노선이 굳어지자, 그는 ‘조사’라는 이름의 연금과 심문이 임박했음을 직감했다.
급여 중단, 거처 회수, 전담 조사팀 구성. 이는 체제 내부에서 흔히 사용되던 정리 절차였다. 쉬자툰은 “자오쯔양처럼 가택연금으로 생을 마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1990년 4월 말, 그는 홍콩 언론계 인사 김요여의 도움으로 극비리에 홍콩을 거쳐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중국 공산당 수립 이후 최고위급 관료의 최초 성공적 해외 탈출이었다.
미국 도착 직후, 쉬자툰은 덩샤오핑과 당 지도부에 편지를 보내 “정치적 망명을 신청하지 않으며, 기밀을 누설하지 않고, 언론·민주 인사와 접촉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단, 자신과 가족에 대한 보복이 있을 경우 약속을 지킬 수 없다고 명시했다. 그의 선택은 체제 전복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탈출이었다.
당적 박탈과 ‘해외 적대세력’ 낙인
중국 공산당은 이를 ‘배신’으로 규정했다. 1991년, 정치국 승인 아래 쉬자툰은 중앙위원직·당적·전인대 상무위원직에서 모두 박탈됐다. 공식 발표문은 그를 “해외 반공 세력과 결탁한 인물”로 묘사했다.
망명 이후 쉬자툰은 홍콩 시절 자신이 통일전선·정보 네트워크의 총괄 책임자였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끝내 구체적 인물이나 조직을 공개하지 않았다. “나는 사람을 팔지 않는다.”
이 침묵은 그가 끝까지 지킨 마지막 ‘당 규율’이자,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더욱 고독하게 만들었다.
돌아갈 수 없는 고향
미국 망명 후 쉬자툰은 여러 차례 귀국을 신청했다. 후진타오 체제에서도, 가족의 탄원과 옛 전우들의 중재에도 베이징의 답은 없었다. 아내의 장례조차 중국 땅에서 치르지 못했다.
2016년 6월 29일, 쉬자툰은 로스앤젤레스 자택에서 100세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끝내 ‘반체제 인사’도, ‘복권된 개혁파’도 되지 못한 채 체제 밖으로 밀려난 혁명 원로로 남았다.
쉬자툰의 삶은 중국 공산당 내부에도 선택의 순간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그는 민주화를 외치지 않았고, 체제 전복을 시도하지도 않았다. 다만 학살에 침묵하지 않았고, 그 대가는 영구 추방이었다.
그의 망명은 탈출이었고, 그의 죽음은 귀환 없는 종결이었다. 중국 현대사는 여전히 그 질문을 피하지 못한다. “6·4 이후, 누가 옳았는가.”
장·춘 <취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