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호(口號)는 사람들을 빈곤에서 구하지 못합니다.” ― 교황 레오 14세는 첫 주요 문헌이 발표된 지 정확히 일주일 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Dilexi Te(나는 너를 사랑하였다)』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을 주제로 한 교황 권고문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을 빈곤에서 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는 기독교 전통이 본래 던져온 질문은 아니며, 『Dilexi Te』 안의 교황 역시 그 질문을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이 문헌은 레오 14세가 즉위명으로 삼은 교황 레오 13세보다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노선에 훨씬 더 가깝다. 사실 『Dilexi Te』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문헌에 가깝고, 레오 14세가 이를 “자기 것으로 만든” 형식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이 그의 고유한 신학적 접근을 얼마나 반영하는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새 교황이 전임자의 초안을 첫 문헌으로 발표한 것은 이번이 세 번째다. 2005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선종했을 때, ‘사랑에 관한 회칙’ 초안이 이미 작성 중이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이를 이어받아 자신의 첫 회칙인 『Deus Caritas Est(하느님은 사랑이시다)』의 제2부로 포함시켰으며, 제1부에는 삼위일체적 사랑이 그리스도 안에 성육된 신비에 관한 심오한 신학적 서술을 덧붙였다.
2013년 베네딕토 교황이 사임할 당시, 그는 신학적 덕목에 관한 교황 권위 삼부작의 마지막 부분인 신앙에 관한 회칙 초안을 완성한 상태였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 초안을 약간만 수정하여 자신의 첫 회칙으로 발표했는데, 그것이 『Lumen Fidei(믿음의 빛)』이다. 그러나 『Deus Caritas Est』와 달리, 『Lumen Fidei』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교황직 전반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았다. 프란치스코의 고유한 비전은 그해 말 『Evangelii Gaudium(복음의 기쁨)』을 통해서야 비로소 드러났다.
『Dilexi Te』는 전자보다는 후자와 유사하다. 이는 전형적인 “프란치스코 스타일”의 권고문으로, 『Laudate Deum』(기후변화에 관한 권고)처럼 통계적·정책적 분석까지 아우르는 접근을 보인다. 두 문헌 모두 10월 4일, 성 프란치스코 축일에 서명되었다. 또한 『Dilexi Te』는 레오 13세를 단 한 차례만 언급하며 그의 가르침을 인용하지 않는다.
레오 13세는 경제·정치·문화 전반에서 가톨릭 사회교리의 아버지로 평가받는다. 이후의 모든 교황은 그가 제시한 독창성을 얼마나 계승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했다. 많은 이들이 입으로는 그를 찬미했지만, 실제 교도권의 중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필자는 레오 14세 선출 당시 이렇게 쓴 바 있다.
“레오 13세 이후 교도권은 경제 문제에 대해 두 가지 길을 걸어왔다.”
첫째는 ‘자유의 길’(the liberty path) 이다. 여기서 노동자의 처지를 개선하는 방법은 경제적 자유와 창의적 역량을 확장하는 데 있다. 인간은 자기 자신 안에 가장 위대한 창조적 자원을 지니고 있다는 인간학적 전제 위에 선다. 가난한 이들은 그들 자신의 창의력과 생산성을 통해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정치·경제 체제의 의무는 이를 조성하는 것이다. 요한 바오로 2세는 100년 후 이 ‘자유–창의–생산’의 길 위에 확고히 서 있었다.
레오 13세와 요한 바오로 2세는 예외였다. 그 외의 교황들은 대체로 사회정의와 재분배를 빈곤의 해답으로 강조했다.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그랬고, 『Dilexi Te』도 그러하다. 따라서 만일 『Dilexi Te』가 레오 14세의 사고를 반영한다면, 그는 경제적 문제에 있어서 레오 13세의 유산을 계승하지 않은 셈이다. 다만, 이러한 판단은 시간이 더 필요하다.
모세오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긴 기독교 전통은 가난한 이를 위한 구체적 돌봄이 선택이 아니라 의무임을 분명히 한다. 찰스 차퓌 주교(Archbishop Charles Chaput)의 단호한 표현을 빌리면, “가난한 이를 외면한다면 우리는 지옥에 갈 것이다.” 복음서는 가난한 이를 향한 사랑과 자비의 육체적 행위(corporal works of mercy)를 구원의 기준으로 제시한다(루카 16장의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 마태 25장의 심판 기준 참조).
이 진리를 교도권 문헌 중 가장 간결하게 표현한 이는 베네딕토 16세였다. 그는 『Deus Caritas Est』에서 이렇게 썼다.
“교회의 가장 깊은 본질은 세 가지 책임 속에 드러난다. 곧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케리그마–증언, kerygma–martyria), 성사를 거행하는 일(전례, leitourgia), 그리고 사랑의 봉사를 실천하는 일(봉사, diakonia)이다. 이 세 가지는 서로를 전제하며 분리될 수 없다. 교회에게 자선은 다른 기관에 맡길 수 있는 사회복지활동이 아니라, 교회의 본성 그 자체의 불가결한 표현이다.”
이처럼 사랑의 사도직을 전례와 동등한 중요성의 본질적 사명으로 천명한 베네딕토의 명문을 『Dilexi Te』가 인용하지 않은 것은 의아하다. 베네딕토는 교부들의 사상,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의 가르침에 깊이 뿌리내려 있었으며, 하느님을 경배하면서도 가난한 이를 돕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그들의 예리한 비판을 온전히 흡수하였다.
『Dilexi Te』는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의 유명한 교훈 ― “가난한 이에게 주지 않는 것은 그들의 것을 훔치는 것이다” ― 을 인용하고,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을 요약한다. “가난한 이는 단순히 도와야 할 대상이 아니라, 주님의 성사적 현존(sacramental presence)이다.” 권고문은 이러한 교부적 전통의 본문들을 상세히 추적하며, 아우구스티누스적 영성과 지성에 형성된 교황의 면모를 드러낸다.
마태 25장의 말씀을 더 충실히 살라는 호소는 언제나 시의적절하다. 특히 부유한 나라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렇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전통적이며 논쟁의 여지가 없는 주제이기도 하다. 이는 의도적으로 교회 내 논쟁의 열기를 낮추고 일치를 우선시하려는 새 교황에게 알맞은 첫 메시지일 수 있다.
가난한 이를 사랑하고 돌보아야 한다는 데에는 그리스도인 누구도 이견이 없다. 그러나 사회교리의 차원에서, 그리스도인은 빈곤을 근본적으로 줄이는 조건에 대해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또 다른 차원이다.
예컨대 지난 100년간 빈곤과 기아를 가장 크게 줄인 요인은 재분배나 자선이 아니라 기술적·정치적 변화였다. 20세기 중엽의 ‘녹색혁명’(Green Revolution)은 농업 생산성을 비약적으로 향상시켜 식량 공급을 늘렸고, 중국과 인도에서 국가계획경제를 시장경제(요한 바오로 2세가 “자유경제”라 부른 체제)로 전환한 정책 변화는 수십억 명을 절대빈곤에서 해방시켰다.
레오 13세는 사회주의가 실패할 것이라 예견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가난한 이들로 하여금 자기 발전의 주체가 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었다. 이는 19세기 말 기독교 사상에 있어서 진정한 “새로운 것”(Rerum Novarum)이었다. 창의적 생산성을 통해 빈곤이 완화될 뿐 아니라 근본적으로 제거될 수 있다는 생각은 지속적 경제성장이 가능하다는 역사적 경험 없이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이런 관점은 성경이나 교부 문헌에서 찾기 어렵다. 지속적 경제성장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에, 빈곤에 대한 유일한 해법은 재분배였기 때문이다.
결국 『Dilexi Te』는 빈곤에 대한 기독교적 재분배 전통의 연장선에 서 있다. 레오 14세가 FAO 연설에서 “그들은 우리의 구체적 행동을 통해 그들의 비참함에서 벗어날 희망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듯이 말이다.
레위기에서 크리소스토무스, 그리고 성 요한 23세와 성 바오로 6세(『Dilexi Te』는 이 둘을 레오 13세나 요한 바오로 2세보다 더 자주 인용한다)에 이르기까지, 가난한 이는 부유한 이들이 “그들의 비참함에서 구출해줄” 것을 의존한다는 사고는 기독교의 기본입장이었다.
반면 레오 13세는 그와 다른 접근을 그려냈고,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를 현대 자유경제의 가능성 속에서 더 확장시켰다. 만약 레오 14세가 이에 동의한다면, 『Dilexi Te』에서는 그 흔적을 찾기 어렵다. 아마도 그는 프란치스코 교황처럼 그 길에 동의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