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SA 가톨릭 109] 세상의 종말 앞에서 바르게 기도하기
  • 제이콥 에이키 Jacob Akey is an associate editor at First Things. 부편집장

  • 책의 초반부에서 도널드 해거티 신부는 여름철 성당을 드나드는 관광객들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한다. 그는 그들이 “그 성벽 안에서 단 한마디의 개인적인 기도조차 속삭이지 않은 채 들어왔다가 나간다”고 지적한다.

    해거티 신부가 뉴욕 성 패트릭 대성당에서 설교한다는 사실을 알면, 장면이 바로 그려진다. 매일같이 교외에서 온 관광객들이 성당의 중앙 신랑을 둘러돌며 측면 경당에 걸린 성인들의 전기를 읽고 지나간다. 그들 손에는 아이스 커피와 록펠러 센터 쇼핑백이 들려 있다.

    이들은 잡담하며 사진을 찍는다. 해거티 신부의 말처럼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이들도 있지만, 감실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를 보편적으로 인식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가 말하듯, “하느님께서 당신 집 안에서 모욕당하신다.”

    이러한 탄식은 새롭지 않다. 요제프 라칭거(훗날 베네딕토 16세 교황)는 1958년에, 유럽의 성당들은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지 않은 ‘세례 받은 이교도들’로 채워져 있다고 썼다. 그들은 성사를 받지만 믿지는 않는다. 그리고 해거티 신부는 라칭거처럼 단순히 적대적인 세속 문화의 역풍 그 이상으로 교회 안에서 문제를 본다.

    여러 징후들은 결국 하나의 현상으로 요약될 수 있다. 곧 서구에서의 믿음의 쇠퇴, 노골적인 무신론보다는 무관심으로 드러나는 불신, 그리고 교회의 교리적 진리들에 대한 침묵이다. 해거티 신부는 이러한 징후들을 한 원인으로 귀결시킨다. 많은 위기들이 사실은 하나의 위기다.

    가톨릭 비평가들은 그 원인을 유명무실한 신앙, 기술 지상주의, 국민국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왜곡된 인간학, 성혁명, 심지어 프리메이슨이나 사탄주의자들에게 돌려왔다. 그러나 해거티 신부의 진단은 다르다. 이 위기는 세상의 종말을 알리는 표징이자 증상이라는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마지막 심판에 앞선 시련의 때’로 들어섰다는 것이다.

    해거티 신부는 종말의 시간표를 예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는 인류가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고 믿으며, 그의 책은 영적 준비를 위한 안내서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교회는 고난을 겪고, 모욕을 당하며, 영적으로 순교하는 소수의 남은 무리와 믿음을 저버린 다수로 나뉠 것이다.

    반(反)그리스도의 세력은 교회의 최고위층까지 침투할 것이다. 어두운 전망이다. 종말론적 성찰은 동시에 교계 제도에 대한 함축적 비판과 뒤섞인다. 예를 들어, 그는 “종교적 다원성이 하느님의 긍정적 의지라는 믿음은 성공적인 사탄적 책략”이라고 단언한다. 이는 이미 고(故) 프란치스코 교황이 언급한 바 있는 입장이다. (이 장의 제목은 ‘교회적 긴장’이다.)

    책의 후반부는 사목 경험에서 비롯한 자전적 이야기와 일화적 성찰이 담겨 있지만, 그 핵심은 전적으로 영적이다. 곧 영성 생활의 긍정적 묘사와 규범적 권고가 결합되어 있다. 여기서 두 가지 주제가 드러난다.

    첫째, 인간은 하느님을 상처 입힐 수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당신의 인성 안에서 인간을 사랑하시어 스스로 상처받을 수 있는 취약성을 떠안으셨다. 이는 C. S. 루이스가 하느님의 ‘증여적 사랑(gift-love)’ 안에서 본 특성이다.

    루이스는 “사랑한다는 것은 곧 vulnerable(상처받을 수 있음)이 되는 것”이라 했고, 해거티 신부는 “우리가 사랑을 위해 고통받기를 거부하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사랑에 전적으로 헌신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하느님의 취약성은 오늘날에도 이어진다. 역사는 십자가의 형상 안에서 드러나며, 그 안에 사는 이들은 십자가에 참여한다. 골고타에서의 고통이 육체적 상처로 드러났듯이, 해거티 신부는 그리스도의 고통이 심리적·영적 차원에서도 있었다고 강조한다. 인간은 무관심으로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를 상처 입힌다.

    연인의 귀에는 침묵보다 더 가혹한 것이 없고, 눈에는 외면보다 더 잔인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그는 권고한다. 우리는 기도와 행동 안에서 하느님을 기쁘게 하거나 그분의 성심을 찌를 수 있다. 전자를 택하라.

    둘째, 영성 생활은 단순히 ‘영적 체험’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은 당신 뜻대로 숨으시고, 단순하면서도 끈기 있게 그분을 갈망하는 데 큰 가치가 있다. 그리스도인은 영적 향락주의자가 아니다. 오히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 놓고서, 혼인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되어라. 주인이 와서 문을 두드리면 곧장 열어 줄 수 있도록”(루카 12,35-36) 깨어 있어야 한다. 해거티 신부는 이 어둠의 영적 밤, 기다림의 시기를 가볍게 넘기지 않는다. 그것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해거티 신부의 종말론적 전망은 지나치게 비관적인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사실 그는 성덕을 이룬 교부들과 신학자들의 전통을 따른다. 뉴먼 추기경은 이렇게 썼다.

    “교회의 초세기에는 [임박한 파국에 대한] 기대가 학자와 성인들에게까지 확장되었다. 그것은 고백자들과 교부들의 정신적 자세였다. 6세기의 성 그레고리오가 적그리스도를 기다렸듯이, 2세기의 리옹의 순교자들, 3세기의 성 치프리아노, 4세기의 성 힐라리와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5세기의 성 예로니모도 그러했다. 세상이 회복되기에는 너무 타락했고, 멸망이 임박했다는 것이 가장 지혜롭고 가장 자애로운 이들의 신중한 판단이었다.”

    《시련의 시간(The Hour of Testing)》은 종말이 다가온다는 과장된 선동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강력한 영적 지침을 제공한다. 그것은 정통성과 전통의 수도원적 경계 안에서 형성되었기에 당연히 그렇게 할 수 있었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
  • 글쓴날 : [25-09-07 08:14]
    • 리베르타임즈 기자[libertimes.k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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