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중요하지만 그것이 첫째 자리는 아니다. 우리가 “정치”라고 부르는 것조차도 진정한 의미의 첫 정치적 행위는 아니다. 교회의 기도, 강론, 성가, 성체성사, 자선, 그리고 교회적 훈육은 어떤 행정명령이나 “위대한 법안”보다도 훨씬 깊이 우리의 사회와 민족적 삶을 형성한다.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거룩한 정치 행위는 투표가 아니라 ‘예배’이다. 매 주일마다 우리는 민족들을 통치하시고 입법자·판사·대통령 모두를 당신 앞에 무릎 꿇게 하시는 만왕의 임금께 찬미와 간구를 드린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세속 정치의 권력 놀음에서 한 발 비껴 서 있다. 정치 지도자로 봉사하는 그리스도인조차도 다니엘처럼 하느님 나라를 섬기기 위해 다스려야 하며, 궁극적으로 자기 국가, 정당, 상관을 섬기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거룩한 국민으로서 그리스도인은 정치인과 정치적 행동을 비판적 거리에서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어느 정당이나 인물에 매여 있지 않다. 통치자가 하느님의 정의를 실현하면 환호하고, 그렇지 않으면 항거해야 한다. “볼과 스트라이크를 판정하라”는 야구의 표현처럼 말이다.
나는 지금 “트럼프 2.0”을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트럼프를 메시아처럼 신격화하거나, 반대로 맹목적 혐오에 빠져서도 안 된다. 트럼프가 행정명령을 내릴 때마다 “이것이 내가 투표한 것이다”라고 트윗할 필요도 없다. 볼과 스트라이크만을 판정하면 된다.
사실, 트럼프 혐오증(TDS)에 빠진 이들이 완전히 미친 것은 아니다. 트럼프의 과잉 노출은 건전한 공화정 체제에는 유익하지 않다. 정치적 드라마가 일상 전체를 지배해서는 안 된다. 어떤 지지자들은 트럼프가 무엇을 하든 무조건 찬성하고, 심지어 유능한 내각 인사들조차 기묘할 정도로 비굴한 태도를 보인다.
트럼프는 예측 불가능하다. 관세를 올렸다 내렸다 하며, 이민자를 단속하면서도 농업이나 서비스업의 노동자는 예외로 둔다. 중국을 견제하면서도 수십만 명의 중국 유학생을 받아들인다. 그는 사업가 시절부터 법의 경계를 시험하며 어디까지 용인될 수 있는지를 탐색해 왔는데, 지금 백악관에서도 똑같이 행동한다.
트럼프는 연방 권력의 균형을 바꾸고 있다. 그는 행정명령으로 통치하고, 의회는 주저하며 지켜보기만 한다. 무분별하게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친(親)트럼프 언론은 공포와 분노를 부추긴다. 정부는 거대 기업에 직접 지분을 넣으며 이를 “자본주의”라고 포장한다. 그는 민주당 도시에서 연방 차원의 치안 장악을 위협한다. 물론 도시를 정화해야 하지만,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인 노숙자와 중독자들은 그 후에 어디로 가는가?
트럼프 자신은 지난 10여 년 동안 국가 권력의 남용과 정치적 법률전(lawfare)의 피해자였다. 그러나 다시 권력을 잡자 그는 법무부를 정치적 보복의 도구로 활용한다. 트럼프는 일종의 “철거용 추”다. 부패한 것을 부수는 데 필요할지 모르지만, '철거용 추'는 엄청난 부수적 피해도 남긴다. 자유주의자들이 “트럼프 지지자들의 위선”을 지적하는 것도 일리가 있다. 바이든이 같은 정책을 내놓았다면 아마 “사회주의자” 혹은 그 이상으로 공격당했을 것이다.
트럼프 내각에는 진지한 그리스도인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국방장관 헤그세스는 펜타곤에서 개신교 예배를 주관하고, 부통령 밴스와 국무장관 루비오는 자주 가톨릭 사회 교리의 언어로 자신의 견해를 표현한다. 의료 연구 분야의 도덕적 문제를 드러내려는 노력도 보인다.
트럼프는 즉각적으로 성별 정체성 이데올로기의 광기를 거부했으며, 이는 “탈각성(anti-woke)” 분위기를 강화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는 낙태와 관련해 대법원을 세워 로 대 웨이드 판례를 전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도, 이제는 낙태 이슈가 사라지기를 원하며 오히려 시험관 수정(IVF)과 같은 反생명 기술을 지지한다. 또한 동성결혼을 합법화한 ‘오버게펠 판결’을 뒤집을 생각도 없다.
트럼프는 우크라이나 문제에서 “전쟁을 끝내는 것”을 최우선으로 보며, 설사 영토를 양보해야 하더라도 종전을 모색한다. 무역에서는 관세를 활용하여 협상을 이끌어 내지만, 관세는 결국 수입자가 부담하는 세금이다. 일부는 이를 통해 달러 약화와 부채 경감, 다극화 세계 질서 전환을 꾀한다고 보지만, 미국 경제에 이익이 될지는 의문이다.
이민 정책은 오랫동안 혼란스러웠다. 트럼프는 단순히 기존 법을 집행함으로써 일정한 정상성을 회복시켰다. 범죄를 저지른 이주민은 체포·재판·추방되어야 하고, 국가가 이민의 속도와 범위를 관리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민자는 “최악의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성경은 거듭 이방인을 사랑하고 보호하라고 명한다. 나는 이민세관단속국(ICE)이 사실상 “연방 경찰” 수준의 군사적 권한을 갖게 되는 장기적 위험이 걱정된다.
내가 지금까지 언급한 것은 논쟁의 여지가 많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결코 논쟁의 여지가 없는 사안도 있다. 낙태, 동성결혼, 성별 이데올로기, 무고한 생명의 보호, 죄인에 대한 정당한 처벌 등은 신앙의 본질에 속한다. 성경과 교회 신학은 모든 정치 문제에 직간접적으로 발언한다. 왜냐하면 정치적 판단의 모든 행위는 하느님·인간·공동선에 대한 관점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체적 사안에서는 그리스도인 사이에 선의의 의견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트럼프는 미국 교회에 충격적이고 분열적인 영향을 끼쳤다. 일정 부분에서는 교회를 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숨겨진 충성심이 드러나고 걸러졌다. 그러나 일부 그리스도인은 반(反)트럼프에 집착한 나머지, 낙태·성별 이데올로기·포르노 자유화를 지지하는 정당과 후보에게 표를 던졌다.
반대로, 트럼프 지지가 정통(orthodoxy)과 이단(heresy)을 가르는 시금석이 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첫째 되는 것(전례와 복음 선포)에 헌신하면서, 둘째 되는 것(정치적 사안)은 형제적 사랑 안에서 토론할 수 있는 장이 되어야 한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