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SA 가톨릭 70] 가톨릭 신학의 미래 ④
  • 토마스 조셉 화이트 O.P. is the Rector of the Angelicum in Rome.(로마 안젤리쿰 총장)

  • 성사 질서와 신비적 삶의 회복

    이제 나는 마지막 과제를 말하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가톨릭 신학이 성사적 질서와 교회의 관상적이고 신비적인 삶을 중심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 예술은 위대하고 고귀하다. 하지만 모든 예술이 인간의 산물만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정하신 일곱 성사, 곧 세례, 견진, 성품, 혼인, 고해, 병자성사, 그리고 그 중심인 성체성사는 하느님의 예술, 곧 신적 예술(divina ars)이라 불릴 수 있다. 성사는 그리스도의 실체적 현존을 드러내며, 은총을 전해주는 가시적 표징이다.

    특히 성체성사 안에서 하느님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 영혼과 신성을 완전히 우리에게 내어주신다. 이에 따라, 우리 역시 우리 자신 전체(몸과 영혼)를 하느님께 봉헌하도록 초대된다. 이처럼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비체로서, 그분 안에서 살고, 그분과 함께 살아간다.

    하느님께서 성사를 제정하신 것은 임의적이거나 장식적인 이유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 본성의 필요에 기인한 것이다.

    * 우리는 영적인 존재이지만, 동시에 육체와 감각을 지닌 동물적인 존재이다.
    * 우리는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고’, 의례와 반복을 통해 표현할 필요가 있다.

    성사는 이러한 인간의 조건에 맞추어,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의 내면을 점진적으로 완성하도록 하는 길이다.

    ‘성사는 육화된 영적 여정을 위한 통로이며, 그 작용은 우리가 아니라 하느님께 우선권이 있다.’

    역사 속의 모든 교회 쇄신의 신비가들
    ‘누르시아의 성 베네딕토’,‘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등.. 이들은 성사적 삶, 특히 성체 중심의 삶과 고백성사에 기반을 둔 영성에 철저히 의존하였다.

    은총은 내면에서 작용하지만, 그 시작은 외부에서 온다.
    ‘그리스도의 말씀과 표징을 통해 우리는 교회와 연결되고, 공동체와 일치하며, 하느님과 친교를 이룬다.’

    20세기 가톨릭 신학은 때때로 성사 제도에 대해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획일화에 대한 두려움, 교회 권위에 대한 경계심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성사의 질서는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온다.’
    ‘그것은 단지 제도적 구조가 아니라, 삼위일체와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위한 길이다.’ 따라서 신학의 쇄신은 반드시 성사적 삶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신학자는 우선적으로 성사의 깊이를 살아야만, 타인에게도 그 길을 보여줄 수 있다.

    “우리는 보지 못한 것을 사랑할 수 없다.”
    ‘그렇기에 신학은 설명하고 제시하는 학문으로서, 하느님의 현존을 가리키고, 우리의 마음이 올바른 열망을 품도록 도우며, 하느님의 자기 봉헌이 이 세속 세계 안에서 드러나도록 돕는다.’

    21세기의 신학은 언제나처럼, ‘성인들의 관상적 삶을 조명해야 하며, 그 삶은 무엇보다도 성체성사의 현존 안에서 드러난다’

    끝으로 한 가지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나는 남인도에서 선교 활동을 했던 한 신부를 알고 있다. 그는 수년간 에이즈 환자들을 위한 가톨릭 보호소에서 봉사했다. 그곳의 수도공동체는 매일, 성체를 감실에서 드러내어 길을 향해 문을 열어놓았다. 누구든 길을 지나가다 성체 앞에 들어와 기도할 수 있도록 말이다.

    몇 달 동안 그는 한 젊은 힌두교 청년을 눈여겨보았다. 그는 뇌졸중 후유증으로 반신불수였으며, 노숙자였다. 매일 그는 들어와 교회 뒤편에 서서, 제대 위의 성체를 응시했다.

    어느 날 신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매일 여기로 오십니까? 무엇을 찾고 계십니까?”

    그는 이렇게 답했다.
    “사람들이 말하길, 저것이 하느님이라고 합니다. 저는 그것을 믿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사명이다.
    ‘말하는 자가 되는 것, 요한 세례자처럼 손가락을 들어 하느님의 어린양을 가리키는 것.’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니…”

    우리의 세계는 영적으로 집을 잃고, 절반은 마비된 상태이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하느님을 보고자 하는 깊은 갈망이 있다.

    우리가 하느님이 현존하시는 곳을 그들에게 알려줄 수 있다면, 성령께서 나머지를 이루실 것이다.

    성령은 가톨릭 신학의 진정한 주역이시다. 그분의 활동은 역사 속에서, 수많은 목소리 안에서 드러난다. 그 목소리는 마치 성인들과 교회 박사들의 합창처럼 다성적으로 울려 퍼진다.

    21세기 신학은 이런 ‘살아있는 형태들’을 소망하고 준비해야 한다. 그 일치는 인간이 아닌 위로부터 오며, 모든 것이 상승할 때 결국 하나로 수렴된다는 테이야르 드 샤르댕의 말처럼,

    “정상의 꼭대기에서, 당신은 사방에서 같은 오름을 이룬 이들과 하나 되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올라가는 모든 것은 반드시 하나로 수렴되기 때문이다.”  <끝>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
  • 글쓴날 : [25-07-30 06:07]
    • 리베르타임즈 기자[libertimes.kr@gmail.com]
    • 다른기사보기 리베르타임즈 기자의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