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종교와의 대화 : 성육신과 계시에 대한 신학적 응답
21세기 가톨릭 신학의 세 번째 과제는 비그리스도교 주요 종교 전통과의 진지한 대화에 있다. 특히 힌두교와 이슬람은 중요한 대화 상대이다. 오늘날 무슬림과 그리스도인의 수는 대등하며, 힌두교 인구도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두 종교 모두 역사적으로 방대한, 문화적으로 복합적인, 그리고 내부적으로 다원적인 전통이며, 모두 나름의 방식으로 기독교 진리에 대해 강한 신학적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
우선, 인도의 고전 종교 전통은 하느님의 역사 속 강생(성육신) 개념에 대해 본질적인 반대를 제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주류 베단타(힌두 중심 학파) 전통 안에서는, 하느님이 인간의 형상을 취하신다는 주장이 논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에 대한 거부감은 다른 데 있다. 즉, 하느님이 단 한 번, 오직 한 장소에서만, 그것도 인도 밖에서, 이스라엘이라는 특정 민족을 통해 구체적으로 강생하셨다는 주장—바로 기독교의 ‘구체성의 스캔들’이다. 힌두 전통은 하느님의 현존이 다양한 형태로, 다양한 시공간에서 일어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다양한 종교 전통과 의례, 수행법의 정당성을 인정한다.
반면, 이슬람은 거의 정반대의 입장을 취한다. 이들은 성육신과 삼위일체에 대해, 오히려 세속적 자유주의 회의론자들과 비슷한 관점을 취한다. 이슬람의 경전 코란은 이스라엘과 그리스도교 전통의 예언 문헌이 변질되었고 오류가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하느님은 세 위격이 아닌 절대적인 단일성이며, 성육신도 없었고, 속죄의 죽음과 부활도 없었다. 예수는 단지 예언자일 뿐이며, 진정한 중재자는 그리스도도, 성령도 아닌 바로 코란 그 자체다. 코란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재 수단이며, 그 외 모든 종교적 전통과 가르침은 폐기된 것으로 간주된다.
그렇다면 21세기 가톨릭 신학은 힌두교 및 이슬람과 어떻게 대화해야 하는가? 저자는 다음의 세 가지 접근법을 제시한다.
1. 인류학적 접근
가톨릭 교회는 종교적 로고스(언어)와 아가페(사랑)의 문화를 양성해야 한다.
* 이성에 기반한 대화
* 종교 자유의 옹호
* 생명과 시민질서에 대한 존중
* 공동선에 대한 연대’
이러한 기반 위에서 가톨릭 신학자는 힌두교와 이슬람을, 과거 계몽주의나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했던 것처럼 심도 있게 학습해야 한다. 즉, 타 종교와 대화하려면 먼저 그들의 믿음과 사유방식, 생활방식을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
2. 치유적 대화
힌두교와 이슬람은 세속 자유주의의 오류와 공허함을 치유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 두 종교 모두 하느님의 본성과 관상적 삶에 대한 형이상학적 깊이를 지니고 있다.
* 특히 수피즘(이슬람)이나 아드바이타 베단타(힌두교)는 신과의 합일을 지향하는 신비 전통을 지닌다.
이러한 전통 안에서 우리는 로고스와 아가페의 요소를 찾아낼 수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비교 신학적 우정과 연대를 발전시킬 수 있다.
3. 성육신의 신비로 다시 돌아가기
칼 라너는『신학적 탐구(Theological Investigations)』에서 계시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계시란 하느님 자신이 가장 완전한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 이 자기 계시는 자연 질서 안에서 가장 고귀한 존재인 인간 존재 안에서, 곧 하느님의 말씀 이 사람이 되심으로써 완성된다.
곧, 계시의 논리는 성육신의 논리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자기 자신을 온전히 알려주시고자 하신다면, 우리의 인간 본성을 취하시는 것보다 더 적합한 방식은 없다.
이 관점에서 가톨릭 신학은 타 종교 전통과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대화할 수 있다.
* 힌두교의 다중 현존 사상은 관대하고 포용적으로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모순되거나 상충 하는 진리 주장들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
* 이슬람의 절대 초월성 강조는 일관성이 있지만, 하느님의 인격적 자기 계시 가능성 자체를 부정한다.
이에 가톨릭은 단 하나의 유일한 성육신,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결된 하느님의 자기 계시를 선포한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삼위일체 하느님의 내밀한 생명을 알게 되며, 인간 본성 안에서 초월하신 하느님을 실질적으로 만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가톨릭 신앙의 대담한 주장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전능한 선하심과 자비로, 당신의 초월성을 숨기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초월성을 인간의 연약함 속에 현존하게 하신다. 바로 아기 예수의 탄생과 십자가 죽음 속에, 전능하신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난다.
예술과 인문학, 그리고 성사적 신비의 회복
이제 나는 네 번째 과제를 말하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예술과 인문학(humanities)의 옹호다. 성육신의 신비는 하느님께서 인성을 취하셨다는 것을 선언한다. 즉, 인간의 형상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형상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교 이전의 그리스·로마 문명은 인간의 육체미와 형상을 찬미하는 예술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 속에는 비극적 의식도 함께 존재했다. 가령 열두 살에 요절한 그리스 소년을 조각한 작품은, 그가 덧없고 사라질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일시적인 형상 안에 원초적이고 원인 없는 궁극의 아름다움에 대한 그리움과 영적 갈망을 담고 있다.
기독교는 이런 고대 문화의 초월에 대한 기억과 열망을 수용하면서도 근본적으로 변형시켰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사실은, 인간의 형상이 하느님의 현존을 담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십자가의 죽음 안에서도 우리는 하느님을 만난다. 인간의 죽음조차도 하느님의 생명을 상징할 수 있다.
이러한 신비는 인간 예술을 고귀하게 만들었다.
* 하느님보다 더 인간적인 존재는 없다.
* 그리고 기독교 예술보다 더 인간적인 예술은 없다. 시, 초상화, 음악, 조각, 건축—이 모든 예술은 하느님의 인성을 묘사하면서, 인간 본성과 창조의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미켈란젤로 같은 예술가가 추구했던 것은 바로 이 대담한 이상, 곧 인간의 형상을 통해 하느님의 현존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기독교 계시는 미학적 혁명을 일으켰다.
* 하느님의 아름다움이 인간의 형상 안에서 드러나며,
* 인간의 형상은 부활의 신비 안에서 영원히 살아 있게 된다.
이처럼 문학과 순수 예술은 철학·신학과 깊은 친화성을 지닌다. 그 방식은 다르지만, 개별성과 특수성을 통해 보편 진리를 드러낸다.
* 한 사람의 사랑을 노래한 시(sonnet)
* 피아노 소나타의 선율
* 아이의 초상화
* 성 다미아노의 십자가상
이런 예술은 인간 존재의 구체성과 개별성을 통해 보편적 인간 조건에 대한 인식을 자극한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엘리트 학교에서 예술과 인문학은 어떤 상황인가?
* STEM(과학, 기술, 공학, 수학) 교육에 밀려 점점 그림자에 가려지고 있다.
* 정치적 목적에 따라 수단화되고 왜곡되고 있다.
* 기술 자극에 대한 집착은 우리를 소진시키지만,
* 미학적·철학적 사유의 훈련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그럼에도 인간은 예술적 존재(artistic animal)다.
* 좋은 예술은 우리에게 우주가 인간을 위한 집이며,
* 우리의 몸으로 사는 이 삶이 궁극적인 아름다움을 향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진정한 지성은 외부 세계를 질서 있게 정리한다.
* 아름다움은 지성의 구조를 우리 자신에게 되비추며,
* 우리는 그 속에서 우리 본성의 고귀함과 초월적 소명을 깨닫게 된다.
지난 200년 동안 가톨릭 교회는 진리와 선의 영역에서는 위대한 투쟁을 이어왔다.
* 철학, 신학, 윤리 분야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 그러나 미(美)의 영역, 예술과 인문학에서는 그만큼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확신한다.
* 자유주의적 자유는 오히려 사랑과 관상의 자유로 전환될 수 있다.
* 진정한 아름다움의 광휘는 우리가 무엇을 사랑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준다.
* 우리는 우아하면서도 심오한 가톨릭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
21세기 가톨릭 신학은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신학이 되어야 한다.
* 우리가 물려받은 성스러운 것과 세속적인 아름다움의 유산을 반성하고,
* 그리스도의 권능과 인간 정신의 창조성 안에서 새로울 아름다움을 예언해야 한다. <계속>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