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SA 가톨릭 66]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성경의 열쇠이시다
  • 피터 J. 라이하트 is president of the Theopolis Institute, Birmingham, Alabama. He posts regularly at his Substack, Notes from Beth-Elim. 테오폴리스 연구소장

  •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두 제자에게 모세와 모든 예언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기록된 자기 자신에 관한 모든 말씀”을 풀어 주셨다(루카 24,27). 그런 다음 열한 제자에게도 같은 가르침을 반복하신다.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나를 두고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한다”(24,44). 예수님께서는 히브리 성경 전체가 당신의 수난과 영광을 예언하고 있다고 주장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그 말씀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다. “모든 것”이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정말로? 모든 것이? 에훗이 살찐 에글론 왕의 배에 칼을 꽂는 장면도? 야엘이 시세라의 머리를 말뚝으로 박살 내는 장면도? 다윗이 블레셋인의 포피 이백 개를 베어다 모으는 장면도? 예후가 아합의 아들들을 도륙하는 장면도? 우리는 이런 이야기들로부터 예수님을 보호하고자 뒤로 물러나고, 해석의 폭을 줄이려 한다.

    “모든 장면과 인물들이 예수님의 이야기로 이끈다”라고 말하면서 “하지만 모든 사건이 직접적으로 예수님을 지시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덧붙인다. 일면 타당한 말이지만, 때때로 이것은 책임 회피이기도 하며, 무엇보다 예수님의 영광의 높이와 깊이를 온전히 체득하지 못하게 만든다.

    옙타(Jephthah)는 이러한 해석의 시험대가 된다. 셰익스피어의 허구 인물인 햄릿조차도 이 이스라엘 판관에 대해 하나의 사실만은 알고 있다. 그가 하느님께 성급한 서원을 바쳤다는 것이다. “당신께서 암몬 자손을 제 손에 넘기시면, 제 집 문에서 저를 맞이하는 무엇이든지 주님께 바치고 번제물로 드리겠습니다”(판관 11,30-31).

    옙타는 승리하고, 그를 가장 먼저 맞이한 사람은 그의 외동딸이었다. 성경은 옙타가 “자기가 서원한 대로 그녀에게 행하였다”고 전한다. 그렇다면 그는 정말로 딸을 희생 제물로 바친 것인가? 그렇다면 그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예형이 될 수 있는가?

    우선 그의 딸 이야기로 돌아가기 전에 예타 이야기의 시작부터 살펴보자. 옙타는 창녀의 아들로 태어난다. 이 사실은 단죄받을 만한 것처럼 들리지만, 우리는 유다와 그 며느리 타마르의 관계를 떠올릴 수 있다. 다윗과 예수님으로 이어지는 족보는 그 사건에서 시작되었다.

    마리아의 잉태 역시 스캔들이었다. 그래서 “의로운 사람” 요셉은 조용히 그녀와의 약혼을 끊고자 했던 것이다. 당시 소문은 무성했고, 수년 후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조롱하며 말한다. “우리는 음행으로 태어난 자가 아니다.” 창녀의 아들은 어쩌면 마리아의 아들, 곧 하느님의 아들을 예표하는 것일 수도 있다.

    옙타의 이복형제들은 그를 미워하며 내쫓고 유산 상속권을 박탈한다. 형제 간의 갈등은 성경 전체에 걸쳐 반복되는 주제이다. 카인이 아벨을 죽이고, 에사우는 야곱을 죽이려 하며, 요셉의 형제들은 그를 노예로 팔아넘긴다. 이 모든 이야기들은 예수님의 수난을 예표한다. 나자렛에서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설교하실 때, 고향 사람들은 그분을 절벽에서 밀어 떨어뜨리려 했다. 또 어느 날,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은 그분이 정신이 나간 것이 아닐까 염려하며 강제로 데려가려 한다(마태 12,46-49).

    옙타 시대, 이스라엘은 암몬 사람들에게 동쪽에서, 블레셋 사람들에게 서쪽에서 압박을 받고 있었다. 이때 길앗 지방은 구원자를 필요로 하였고, 그의 형제들은 자신들이 내쫓았던 옙타에게 도움을 청한다. 이방 땅 ‘토브’에 거주하던 옙타에게 길앗의 원로들이 찾아와, 암몬과의 전쟁을 위해 그를 지휘관으로 세운다.

    이 서사는 형제 간의 전형적인 갈등, 즉 카인과 아벨의 서사를 비튼다. 처음에는 옙타가 맏아들처럼 보이며 카인에 비견된다. 그러나 형제들이 그를 공격하면서, 그는 오히려 아벨처럼 보인다. 그가 도망간 ‘토브’는 카인이 유배당한 ‘놋’과도 유사하게 들리지만, ‘토브’는 히브리어로 “좋은”이라는 뜻을 가지므로 그는 방황하는 죄인은 아니다. 이후 형제들이 옙타에게 도움을 청하면서, 옙타는 죽임을 당한 아벨이 아니라 그들을 구원하는 아벨, 다시 말해 “새롭고 더 나은 아벨”로 제시된다. 이 모습은 또 다른 구세주를 연상케 한다.

    옙타는 주님의 영에 힘입어 싸우며, 이는 곧 예수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사탄과 악령, 질병, 부정, 죽음, 그리고 모든 악으로부터 이스라엘과 열방을 구하신 사역을 예표한다. 옙타는 전쟁에 앞서 요구 조건을 제시한다. “내가 너희를 구하면, 나를 너희의 머리로 세워라.” 등 떠밀리듯 그들은 동의하고, 내쫓긴 사생아는 수장이 되어 길앗의 유산을 받는다. 이는 동정녀 마리아의 아들, 곧 그리스도께서 만민의 유산을 상속하시는 모습과 겹친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전형적인 ‘예수 그리스도 서사’이다. 스캔들 속에 태어나 형제들의 거부를 받은 이가 그들을 구하고 마침내 머리로 군림하여 땅을 차지하는 것이다.

    이제 그가 바친 서원과 딸의 이야기를 다시 살펴보자. 그 서원이 하느님께 모욕이 되는 것이라면, 주님께서 암몬과의 전쟁에서 그에게 승리를 주시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필자는 옙타가 사람을 제물로 바칠 의도는 전혀 없었다고 본다. 양이나 염소가 집 문에서 그를 반기며 나올 리도 없고, 하느님께서는 인신 제사를 엄격히 금하셨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서원은 파스카의 논리에 따른 것이다.

    문간은 상징적으로 ‘출산’ 혹은 ‘탄생’을 의미하며(창세 18,1–10; 탈출 12,22–23), 문간에서 나오는 이는 ‘맏이’로 간주되어 주님께 봉헌된다(탈출 13,2; 13–15). 그 맏이는 실제로 옙타의 외동딸이며, 그는 딸을 번제로 불태워 죽인 것이 아니라 실로에 있는 성소에 봉헌하여 종신 동정녀로 살게 한 것이다(1사무 2,22 참조). 파스카의 밤에 주님의 맏아들이 피 묻은 문간을 통해 다시 태어난 것처럼, 옙타의 딸은 암몬의 억압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산으로 향하는 새로운 출애굽의 상징이 된다.

    옙타는 “자기에게 해가 되어도 맹세한 말을 바꾸지 않는 의로운 사람”(시편 15편)으로 드러난다. 놀랍게도 그의 딸은 그 아버지의 말에 기꺼이 순명하며, 마리아의 말처럼 “당신의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응답하는 듯하다.

    옙타의 어머니인 창녀는 바알을 따르며 음행한 이스라엘의 표상이지만, 그의 딸은 쇄신된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그녀는 온 이스라엘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수행하며, 자기 자신을 한평생 살아 있는 제물로 바쳐 신성한 신랑 되신 분께만 봉헌한다. 옙타의 딸은 음녀인 이스라엘을 기적적으로 동정녀로 변화시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예표한다.

    감히 말하건대, 예수님의 말씀이 옳았다. 그분은 참으로 모든 성경의 열쇠이시다. 우리가 성경 안에서 그분을 발견할 때, 그 말씀의 모든 보화가 우리에게 더해진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
  • 글쓴날 : [25-07-26 06:41]
    • 리베르타임즈 기자[libertimes.k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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