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SA 가톨릭 49] 라틴아메리카 주교들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①
  • 클로도비스 M. 보프 is a theologian and a friar of the Servite Order.
    클로도비스 M. 보프 신부는 해방신학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이었으나, 이후 해방신학의 가장 날카로운 비평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떠올랐습니다. 아래에 이어지는 서한에서 그는 라틴아메리카 교회가 지난 50년 동안 방황해 왔으며, 그 결과 교회 역사상 최악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고 경고합니다.

  • 사랑하는 형제 주교님들께,

    지난 5월 말 리우데자네이루에서 개최된 제40차 CELAM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 총회 폐막에 즈음하여 발표하신 메시지를 읽었습니다. 그 안에서 복음적 기쁨의 소식을 찾을 수 있을까 기대했지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아무런 기쁜 소식을 찾지 못했습니다.

    라틴아메리카 및 카리브해 지역 주교회의(CELAM)의 주교님들께서는 지난 50여 년간 줄곧 같은 주제를 반복해오셨습니다. 바로 “사회문제, 사회문제, 사회문제”입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이 노래는 이제 지겹도록 들었습니다. 하느님과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에 대한 기쁜 소식은 언제 전하실 것입니까?

    은총과 구원, 내적 회심과 하느님 말씀의 묵상, 기도와 경배, 그리고 주님의 어머니에 대한 신심은 언제 말씀하실 것입니까? 한마디로, 신앙적이고 영적인 메시지는 언제 들려주실 것입니까?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시급히 필요한 것이 바로 이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오랜 시간 기다려왔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아들이 빵을 달라고 청하는데 돌을 주겠느냐?”(마태 7,9 참조) 세속사회조차 이제 세속성에 염증을 느끼며 영성을 갈망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교님들께서는 여전히 사회적 의제만을 반복하십니다. 마치 영적 차원은 부스러기처럼 간헐적으로만 주어지는 듯합니다. 세상이 가장 필요로 하는 보화를 주님께서 교회에 맡기셨는데, 교회는 오히려 그것을 감추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영혼은 초자연적인 것을 갈망하지만, 교회는 자연적인 것만을 제공합니다.

    이러한 모순은 본당에서도 쉽게 드러납니다. 평신도들은 기꺼이 십자가, 성모 메달, 성화가 새겨진 티셔츠 등으로 자신들의 가톨릭 정체성을 드러내는데, 사제들과 수도자들은 점점 더 이러한 외적 표징에서 멀어지고 있습니다. 소명의 흔적을 감추고 사는 모습이 낯설지 않습니다.

    주교님들께서는 “민중의 외침을 듣고 있으며, 시대의 도전에 민감하다”고 자주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 경청은 과연 얼마나 깊은 것입니까? 메시지에서 언급된 “외침”과 “도전” 목록을 보면, 그것은 저널리스트나 사회학자도 쉽게 언급할 수 있는 수준을 넘지 못합니다. 오늘날 세상의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하느님을 향한 외침, 심지어 세속 분석가들조차 감지하는 그 외침은 들리지 않으십니까? 교회와 그 목자들은 바로 이 외침에 응답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 아닙니까?

    사회적 외침에는 정부나 NGO가 있습니다. 물론 교회도 이러한 문제들에서 결코 무관심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그 분야의 주역이 아닙니다. 교회의 고유하고도 탁월한 사명 영역은 바로 하느님을 향한 갈망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주교님들께서 언론이나 여론으로부터 진보냐 보수냐, 좌냐 우냐의 압력을 받는다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이분법은 주교직에 합당한 것입니까? 주교란 무엇입니까? 하느님의 사람, 그리스도의 종 아닙니까? 성 바오로 사도께서는 이렇게 분명히 말합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며, 하느님의 신비를 맡은 관리인으로 여겨야 합니다”(1코린 4,1).

    교회는 무엇보다도 구원의 성사이며, 단순한 사회기관이 아닙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은총을 선포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중심 사명이자 영원한 소명입니다. 나머지는 부차적인 것입니다.

    형제들이시여, 이미 알고 계신 진리를 되풀이하는 것 같아 송구합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왜 CELAM의 메시지나 문서들에는 그 어떤 흔적도 나타나지 않습니까? 마치 교회의 우선 관심사가 그리스도와 그분의 구원이 아니라, 정의와 평화, 생태와 같은 사회적 이슈에 국한된 것처럼 보입니다.

    교황 성하께서 CELAM에 보내신 전문 전보에서는, “교회를 보호하고 치유하시며 희망을 회복시키시는 분은 바로 부활하신 주님”이심을 강조하셨습니다. 교회의 고유한 사명은 “수많은 형제자매들을 찾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이라고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CELAM의 응답 서한에는 이러한 말씀에 대한 반향이 전혀 없습니다. 구원의 선포를 위한 도움을 요청하는 대신, “정의와 평화를 촉진하고 불의에 저항하는 투쟁”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셨습니다. 다시 반복되는 그 노래, “사회문제, 사회문제, 사회문제”입니다.

    “우리는 그런 진리들은 자명하다고 보고 반복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형제들이시여. 그 진리들은 매일 새롭게 선포되고 상기되어야 합니다. 반복이 없다면, 결국 잊혀질 것입니다. 교황 레오 성하께서 이를 상기시켜주신 것 자체가 그 증거입니다.

    사랑을 당연하게 여기는 남편이 아내의 사랑을 소홀히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이 진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신앙과 사랑에는 더욱 절대적으로 적용됩니다.

    주교님들의 메시지 안에는 분명 “하느님”, “그리스도”, “복음화”, “부활”, “하느님의 나라”, “사명”, “희망”과 같은 신앙 언어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추상적으로 나열될 뿐이며, 신학적 깊이나 영적 생명력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이라는 표현조차도 직설적으로 등장하지 않고, “하느님의 아드님”, “하느님의 백성”과 같은 익숙한 표현 속에 숨겨져 있습니다.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단 두 차례 언급되며, 그것도 지나가듯이 언급됩니다.

    니케아 공의회 1700주년을 기념하며 “그리스도 구세주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언급하셨지만, 이 고백은 메시지 전반에서 실질적인 무게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왜 이 깊은 교의적 기회를 활용하여, 그리스도 중심성의 원칙을 선포하지 않으셨는지 의문스럽습니다.

    주교님들께서는 교회를 “친교의 집이며 학교”, “자비로운 교회”, “시노드적이며 나아가는 교회”로 묘사하십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이상입니다. 하지만 그 안에 그리스도는 어디 계십니까? 그리스도를 본질로 삼지 않는 교회는 단지 “자선 NGO”에 불과하다는 것이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경고였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그 길을 걷고 있는 것 아닙니까?

    오늘날 비록 많은 신자들이 떠나고 있지만, 다행히 복음주의 교회로 가는 경우가 많아 신앙 자체를 완전히 잃는 경우는 드뭅니다. 하지만 교회는 분명히 “출혈” 중입니다. 텅 빈 성당, 텅 빈 신학교, 텅 빈 수도원. 라틴아메리카의 7~8개국은 더 이상 가톨릭 다수 국가가 아닙니다. 브라질조차 “세계 최대의 전(前)가톨릭 국가”가 될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이 현실이 주교님들께 전혀 염려가 되지 않으십니까?

    이러한 쇠퇴의 현실에 대해 메시지에서 단 한 줄도 언급되지 않았다는 것은 실로 충격적입니다. 세속 언론조차 이 문제를 교회보다 더 많이 다루고 있습니다. 왜 주교님들은 침묵하십니까? 성 그레고리오 대교황께서 침묵하는 목자들을 가리켜 “말 못하는 개들”(사 56,10)이라 하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물론 쇠퇴 속에서도 생명은 움트고 있습니다. 주교님들께서도 “희망과 부활의 씨앗”이 교회 안에 있다고 언급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씨앗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계획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본당의 영적 갱신과 새로운 교회운동, 즉 성령의 은총의 흐름 속에 있는 것입니다. 가장 활발한 모습으로는 가톨릭 카리스마 갱신이 있습니다. 이처럼 교회를 다시 채우고 있는 생생한 영성의 흐름은 주교님들의 메시지에서 단 한 줄도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의 영성운동은 젊은이들을 이끌고 있으며, 반면 사회문제를 중심에 둔 프로그램들은 주로 머리가 희끗한 세대에 의해 참여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의 미래를 어디서 찾아야 할지를 분명히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형제 주교님들께서는 반문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영성’에만 집중하자는 말인가? 가난한 이들, 도시의 폭력, 생태 위기와 같은 중대한 사회적 도전은 외면하자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는 반드시 이 세상의 고통에 함께해야 합니다. 다만 묻고자 합니다. 교회는 이 사명들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수행하고 있는가? 진정한 ‘그리스도 중심의 믿음’에서 출발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교회는 결국 NGO 이상의 역할을 할 수 없으며, 오히려 살아 있는 신앙 없이 펼쳐지는 사회운동은 결국 타락하게 됩니다. 해방신학의 초기 이론가들에게 1975년 교황 바오로 6세께서 「복음선포」(Evangelii Nuntiandi)에서 언급하셨던 그 경고가 여전히 유효합니다. 
    <계속>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
  • 글쓴날 : [25-07-08 22:00]
    • 리베르타임즈 기자[libertimes.k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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