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지는 시편 83편에서 이 ‘고관들’은 이스라엘의 약속의 땅 진입을 반대한 미디안 귀족 오렙, 스엡, 살문나와 같은 운명을 지닌 자들로 묘사된다(시 83:11; 사사기 7~8장). 혹은 마리아가 훗날 그 몰락을 찬양하는 자들(누가복음 1:52), 혹은 거짓 영에게 속은 아합 왕과도 같은 자들이다.
천사나 불의한 통치자 모두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심판 앞에서 무자비한 파멸을 향해 달려간다. 그들은 결국 동일한 운명을 맞는다. 하늘은 마치 ‘비워지고’, 인간의 죽음만 늘어난다.
시편 82편은 “하느님이여, 일어나사 세상을 심판하소서”라는 간구로 끝난다. 하느님이 “열방을 유업으로 받으실” 때가 오기를 바라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이 마지막 장면을 메시아 왕국의 실현으로 본다. 세상의 악한 통치자들, 큰 짐승과 결탁한 자들을 물리친 후,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만왕의 왕, 만군의 주로 드러나는 것이다(요한계시록 17:14; 고린도전서 15:24 참조).
그러나 지금 당장은, 악한 통치자들이 번성한다. 이들은 천사들이 통제하지 못했던 불의한 인간 통치자들의 후계자들이다. 어쩌면 그 천사들의 자식들일 수도 있다. 그들 안에는 잊힌 위대함에 대한 희미한 기억이 남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분노, 탐욕, 정욕 속에 파묻혀 있다. 하느님은 천사들의 조작 없이 세상을 다스리신다. 그것이 더 낫든 못하든. 권력자들은 오르락내리락 반복하며, 겸손한 자들은 그 구주를 기다린다. 이는 하느님의 섭리적 통치이지만,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기묘한 일, 기묘한 역사”(이사야 28:21)다.
내가 시편 82편을 해석하는 방식이 다소 괴짜라는 점은 인정한다. 대부분의 기독교 주석가들은 이 시편의 대상이 지상의 인물이라고 보았다. 초기 교회에서 후기까지, 많은 해석자들이 시편 첫 구절의 ‘신들’과 ‘권세자들’을 이스라엘 자손, 즉 ‘유대인들’의 은유로 해석했다.
‘가난한 자 예수’를 학대했던 유대인의 잔혹함이 그들이 하느님의 축복에서 쫓겨난 이유라는
것이다. 전통적 해석에 따르면, 그 자리를 교회와 택함 받은 기독교인들이 대신한다.
그러나 이 전통적 해석은 혐오스럽다. 시편을 철저히 ‘세속적’으로 읽는다면 나는 오히려 유대 전통의 해석을 선호한다. 첫 구절의 ‘신들’은 첫 사람 아담을 가리키며, 그는 특권적 지위를 유지할 수도 있었으나, 죄로 인해 자신과 후손 모두에게 죽음을 가져왔다. 그러나 나는 내 해석이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보더라도, 솔직히 현실 세계와도 더 잘 들어맞는다고 본다.
우리는 아름다운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 천사들이 가난한 자를 악인의 손아귀에서 구해내는 일은 더 이상 없다. 사실, 그런 적도 없었던 것 같다. 그래야 했는데 말이다.
우리 삶에서 천사들이 사라진다는 것은 약간의 숨통을 틔워주는 일이다. 가난한 자, 고아, 고통받는 자들을 보호하는 일은 우리 몫으로 남겨졌다. 이는 철저한 사고, 논쟁, 책임이라는 기준에 따른 검증을 요구한다.
물론 사도 바울은 우리가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베소서 6:12)과 싸운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들은 우리의 정치 지도자가 아니다. 한때 열방을 다스렸던 권세자들은 쓰러졌고, 지금의 지도자들은 전적으로 유한한 인간이다. 그들은 우리처럼 오고 간다. 우리는 그들을 인간 또는 제도처럼 상대해야 한다.
우리의 공적 삶은 사람들로 구성된 질서 안에서 다뤄져야 한다. 그 모든 것이 시행착오일 수밖에 없다. 천사가 없는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인간의 고군분투다. 비탄에 찬 실패들 속에서도 가끔 의로운 빛이 스친다.
우리는 악마와 싸우고 있다. 그러나 바울이 강조하듯, 그 싸움은 내면의 죄악, 사탄의 유혹과 책략에 사로잡힌 마음과의 싸움이다. 그 해답은 믿음의 갑옷, 평화의 복음, 하느님의 말씀, 그리고 순종에서 비롯된 의로움 속에 있다고 그는 말한다. 어쩌면 마음이라는 마법적 내면 영역에서의 신적 변화가 이 세상에서 정의의 원인을 돕는 데 기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느님의 기묘한 섭리 속에서, 그분은 악인이 권세를 유지하고 심지어 권력을 더 키우도록 허용하시곤 한다. 그것이 바로 영적 변화를 위한 도가니를 달구기 위함이다. 이 내적 투쟁 또한,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골로새서 1:13)라는 더 거대한 왕국의 일부이다. 이 왕국은 우리의 세속 질서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전개되고 있다.
우리는 정의를 위한 투쟁 속에서 인간의 전략이 벌거벗은 채 드러나는 현실에 실망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이 땅의 정의를 위한 공동의 싸움에서 고립된 존재라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모든 일을 주관하신다.
나의 요지는 이렇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실패하거나 성공하는 권한은 바로 우리 자신의 몫이다. 그리고 이 권한은 오직 일시적 승리와 일시적 좌절만을 가능하게 한다. 지금과 같은 정치적 격변의 시대에 이는 경고이자 위안이 될 수 있다.
우리가 향하고 있는 모든 것의 마지막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그것은 야곱의 하느님께 속한 일이다. 여기에는 두렵고 떨림(빌립보서 2:12)에 충분할 정도의 무게가 있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