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흑의 땅 북녘에서 보냅니다

2022.08.01 09:05:18

 

나의 감상문에서는 남한, 북한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겠다. 그리고 고발책을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는 여기에서 밝힐 수는 없다. 다만 책으로 만들어진 모습이 아니라 한장 한장 사진처럼 찍힌 것이라고만 이야기하겠다.

 

반디의 고발을 세번째로 읽어본다.  읽어볼수록 그 의미가 깊은 소설이라는게 안겨온다.

얼핏 보고나면 고발은 7편으로 된 내가 살고 있는 땅에서 일어나는 여러계층들의 단면적인 이야기를 담은 이야기로  북한 실상에 대한 고발로 느껴진다.

수령만을 위한 독재체제에 분노로 사람보다 먼저 소설을 탈북시킨 탈북 작품으로 보인다.

그러나 읽고 또 읽어 보노라면 소설에는 북한 실상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철학이 담겨져 있다.  반디의 소설을 북과 남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읽어보게 된다면 독자들의 생각은 각기 다를 것이라고 본다.

 

북한의 독자들인 경우 우리가 당하는 실상 그대로 담은 작품 . 목슴을 내건 탈북으로 출판된 항거의 소설로 인식될 것이다. 

 

남한의 독자들인 경우 “사람사는 세상에 이런데도 있는가?  소설로 북한 실상을 세부적으로 알게 되는 계기가 되였다.  자유의 땅 대한민국에서 태여난걸 다시한번 감사히 생각한다.”

반디의 소설은 남한 독자들에게는 수령독재에 신음하는 북한주민들에 대한 동정과 함께 안타까움을 느끼게 할 것이다. “왜 들고 일어나 싸우지 못하느냐?  3달째 배급을 못타고 굶주리면서도, 남편을 수용소에 보낸 안해도 어버이 수령님을 부르며 눈물을 흘리는 연기를 해야하는 그런 독재체제를 반대하여 왜 들고 일어나지 못하느냐?  왜 자유를 위해 투쟁하지 못하느냐?  북한에는 무지렁이들만 모여있단 말인가?...”   이것이 남한 독자들의 안타까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북한에 살고 있는 나도 늘 하는 것이다.

 

 반디의 소설을 곱씹어 읽어보면서 철학이 있다고 느끼는 것은 거대한 집단 최면술에 걸린 것과 같은 북한 2천만 주민을 꼼짝 못하게 묶어놓은 정신적 근원이 어디 있는가를 사실 그대로의 이야기를 통해 밝혀주고 있기 때문이다.

 오직 수령만을 위한 사회 그 속에서 신음하면서도 자기의 감성마저 죽은 수령을 위하여 억제당하는 독재체제는 처형과 수용소라는 공포통치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수령독재체제도 인민들의 정상적인 사고를 마비시키는 통치철학을 가지고 있고,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의 2천만 인민이 여기에 마취되였기 때문이다.

 

반디는 복마전에서 이렇게 말한다 ( 합치면 구천에도 차고 넘칠 그 고통의 아우성은 다 어디로 사라지고 밖에선 지금 저처럼 행복의 웃음 소리만이 누리에 울려가고 있는 것이냐?! 그것도 결국은 량쪽 손톱을 동시에 뽑히는듯한 고통을 당한 오씨를 선창자로 하는 행복의 웃음 소리가!  세상에 이런 일도 있을 수 있을가? ! 그 어떤 잔악한 마술의 힘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뭇 사람들의 고통의 울부짖음을 행복의 웃음으로 둔갑시킬 수가 있단 말인가? ! ) 

김일성 정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심어주는 철학이다.  

 

내가 살고 있는 이 나라는 김일성이 만들어 놓은 것이다.  지척만리의 주인공과 함께 분노로 주먹을 틀어쥐였던 려행증 제도도  김일성이 고안하여 만든 것이다.  홀 어머니 계시는 고향으로 가지 못하고 어머니의 림종마저 지켜드리지 못하게 만든 (방침제대 ) 무리배치도 김일성이 고안한 것이다. 무자비한 처형과 지옥의 수용소도 김일성이 착상하여 실천한 것이고, 1948년 9월 리씨 왕조와 같은 세습군주제를 다시는 되풀이 하지 않겠노라 인민들에게 약속하고, 권력의 자리에 올라 그 약속을 저버리고 권력세습의 기틀을 마련해 놓고 죽은 것도 김일성이다.

 

 

김일성이 없었다면 김정일도 없었을 것이고, 300만의 대아사도 없었을 것이다.

김일성이 없었다면 오늘의 3대세습도 없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내가 사는 이땅의 암흑은 장본인이 김일성이다.  하지만 지금도 북한주민의 90%는 이런 생각을 못가지고 있다 (김일성은 항일의 전설적 영웅이다,  락후했던 식민지 반봉건 국가였던 우리나라를 경제강국으로 올려세워 놓았던 위대한 수령이고, 자애로운 인민의 어버이였다.  우리나라의 경제가 이 꼴이 된 것은 김정일이 정치를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김정은의 정치를 기대해볼게 없지만 김일성이 만들어 놓은 이 제도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김일성처럼 정치를 잘 하면 이제라도 바로 잡힐 수 있다)

 

이런 인식이 있어 그렇듯 참혹한 인권유린속에 신음하면서도 순한 송아지 마냥 눈물만 흘릴뿐 (뿔질) 한번 없는 것이다.  이 인식을 바꾸어 놓지 않는다면 이 땅에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은 기대하기 어렵다.  김일성과 같은 (인민의 수령)이 다시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릴 뿐이다.  그래서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불길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반디는 소박하고 꾸밈새 없는 단편 이야기로 여기에 대한 철학적 해명을 하였다

반디는 유령의 도시에서 이렇게 썼다. (저 마르크스가 내놓은 모든 리론중에서 가장 위대한 리론이 뭔지 아오?  그건 자본론도 과학적 공산주의 건설 리론도 아닌 바로 프롤레타리아 독재 리론이요, 프롤레타리아 독재 리론!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기에 이 도시 사람들은 누구나 다 토영삼굴을 따르며 살고 있는 거요)

 

한 마디의 말이지만 한생에 걸쳐 깨달은 반디의 인식관이 집약되여 있다.

공산주의 리론은 모든 사람들이 착취와 압박이 없는 사회에서 살게 해주겠다는 약속으로 사람들의 정신을 후려잡고 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그것은 계급투쟁을 말한다.  계급투쟁에는 원쑤의 구분을 국가나 민족단위로 정하지 않는다.  재산과 지식의 유무나 사상이나 리념의 차이가 원쑤를 구분하는 기준점이다. 공산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은 같은 민족이라도 같은 마을 사람이라도 다 죽이겠다는 것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이다.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끝나는 시점이 공산주의라고 정의한다.  

 

결국 공산주의는 투쟁을 위하여 세상에 태여났다.  투쟁대상이 없어질 때까지 자기들끼리 싸워야 한다. 평양의 김일성광장에는 마르크스와 김일성의 초상화가 나란히 걸려있었다.

마르크스가 내놓은 리론을 김일성이 실현시켜 준다는 의미이다. 결국 김일성에게 순종하지 않으면 그 누구든 프롤레타리아 독재 대상이 되는 것이다. 반디는 유령의 도시라는 짧은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의 정신을 휘여잡는 악마의 통치철학에 대하여 까밝히고 있다.

 

반디는 단편집의 구성 마지막 부분 <빨간 버섯>에서  저 빨간 버섯을 뽑아 버리라고 절규한다.  반디의 고발은 북주민 대다수가 잘못 생각하는 것, 아니 북주민 대다수가 생각하려 하지않는 불행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를 소박한 이야기로 잘 깨우쳐 주었다.

우리가 김일성을 받들어 모신 것 자체가 잘못되였다.  2천만의 북주민들이 이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암흑의 땅에 민주화 투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김일성을 받들어 모시지만 않았어도 김정은의 채찍밑에서 노예의 삶을 강요당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분단된 내 나라가 벌써 통일되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반디의 소설이 우리에게 이것을 깨우쳐 주었다고 생각한다.  2천만 북주민들에게 김일성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심어주는 교과서로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작가나 시인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리유가 있다.  김일성이 이 나라와 인민앞에 무순공을 세웠길래 손자대에 이루기까지 이 나라 백성들이 떠 받들어 주어야 하나? 

언제부터 민족의 영웅이 되였나?  누가 먼저 민족의 령수로 떠 받들자고 선동했느냐? 

따지고 보면 이 나라의 작가들이고 시인들이다. 

 

반디의 소설은 북한의 수령전체주의 실상을 폭로하였다는데 가치가 있는 게 아니라, 김일성의 인자함의 본질을 세상사람들에게 알려주었다는데 그 가치가 있다고 본다

수령독재가 3대째 이어올 수 있은 것은 물론 무자비한 처형으로 인한 공포정치에도 있다.

그러나 기본은 김일성의 위대함과 인자함을 인민들의 머리속에 심어놓은 그 정신에 있다.

북주민들은 자기들이 겪고 있는 불행과 고통을 절대로 김일성과 결부시켜 생각하지 않는다.

 

북한이라는 나라의 정치제도는 모든 것이 김일성이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 정신적 기초가 지금까지도 인민들의 머리속에 자리잡고 있다. 어릴 때의 기억이 한가지 나는 것이 있는데 국어시간에 배웠던 조기천의 장편서사시 [백두산] 이다

북쪽땅에서 태여난 사람치고 이 시를 배우고 항일의 전설적 영웅 김일성에 대해 흠모하고 존경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었던가?  나 역시 김일성의 위대함에 완전히 넋을 빼앗겼댔다. 그 시를 지금도 기억한다

 

삼천만이여!  오늘은 나도 말하련다

백호의 소리없는 웃음에도 격파 솟아 구름을 삼킨다는

천지의 푸른 물줄기로 이 땅에 파몰아치던 살풍에

마르고 탄 가슴을 추기고 천년 이끼 오른 바위를 벼루돌 삼아

곰팽이 어렸던 이 붓끝을 육박의 창끝인 듯 고르며

이 땅의 이름없는 시인도 해방의 오늘 말하련다

 

첩첩 층암이 창공을 치뚫으고 절벽에 눈뿌리 아득 해지는 이곳

선녀들이 무지개 타고 내린다는 천지 안개도 오르기 저어하는 이 절경

세월의 류수에 추억의 배 거슬러 올리라

 

어느해 어느때 이 나라 빨찌산들 이곳에 올라

천심을 떠받들며 의분에 불질러

해방전의 마지막 봉화 일으켰느냐?

이제 항일의 의로운 전사들이 사선에 올랐던 이 나라에

재생의 백광 가져왔으니 해방사의 혁혁한 대로

두만강 물결을 넘어왔고  백두의 주름 주름 바로 꿔여

 민주조선에 줄곧 뻗치노니  또 장백의 곡곡에 얼룩진

 지난날의 싸움의 자취 력력하노니

 내 오늘 맘 놓고 여기에 올라  삼천리를 손금같이 굽어보노라

 

오 오 조상의 땅이여

오천년 흐르던 그대의 혈통이 일제의 칼에 맞아 끊어졌을때

떨어져 나간 그 토막 토막 얼마나 원한의 선혈로 딩굴었더냐?

조선의 운명이 칠성판에 올랐을 때 몇만의 지사 밤길 더듬어

백두의 밀림 찾아왔더냐?

 

가랑잎에 쪽잠도 그리웠고 사지를 문턱인듯 넘나든이 그 뉘냐?

산아 조종의 산아 말하라 뉘가 인민을 위해 싸우느냐?

뉘가 민전의 첫 머리에 섯느냐?

 

쉬위  바위 우에 호랑이 나섰다 백두산 호랑이 나섰다

앞발을 거세게 내여뻗치고 남쪽 하늘 바라보다

<<따응>> 산골을 깨친다

 그 무엇 쳐부시련 듯 톱을 들어 <<따응>>

그리곤 휘파람 속에 감추인다

 바위 호올로 솟아 이끼에 바람만 스치여도

 호랑이는  그 바위에 서 있는듯  내 정신 가다듬어 듣노라

 다시금 휘파람 소리 들릴지  산천을 뒤집어 떨치는

 그 노호소리 다시금 들릴지!

 

바위! 바위!  내 알리 없어라  정녕코 그 바위일수도 있다

 빨찌산 초병이 원쑤를 노렸고  애국렬사 맹세의 칼 높이 들었던 그 바위

 빨찌산 용사 이 땅에 해방의 기호치던  장백에 솟은 이름모를 그 바위

 또 내 가슴속에 뿌리박고 솟았거니  지난날의 싸움의 자취 더듬으며

 가난한 시상을 모으고 엮어 백두의 주인공 삼가 그리며

 삼천만이여 그대에게 높아도 낮아도 제 목소리로

 가슴헤쳐 마음대로 말 하련다 .

 ....... ....

이 시의 감화력은 자못 크다.  조기천은 시에서 김일성을 우리민족을 구원한 빨찌산 대장,

민족의 영웅으로 칭송하였다.  우리민족을 이끌 위인으로 노래 하였다

거짓과 위선으로 이루어진 이 시가 2천만의 넋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이 시에 넋을 빼앗긴 사람은 석달째 배급을 못받고도  수령님 하고 눈물을 쏟게 된다.

이 시에 넋이 빼앗긴 사람은 이밥에 고기국에 비단옷이라는 거짓말에 한생을 속아 살면서도 거짓말을 한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다.

이 시에 넋이 빼앗긴 사람은 이 제도에 절대 반항하지 않는다.

이 시에 넋이 빼앗긴 사람은 독재에 신음하는 인민들을 처형하면서도 절대 죄의식을 느낄 줄 모르게 된다.

이 시에 넋이 빼앗긴 사람은 3대 세습을 응당한 것으로 여긴다.

이 시에 넋이 빼앗긴 사람은 온갖 허위 날조된 력사도 그대로 믿는다.

이 시에 넋이 빼앗긴 사람은 독재자를 위하여 동족상쟁에 뛰여들 각오에 넘쳐있게 된다.

 

조기천은 이 시를 1946년에 썼다. 그 전까지는 우리인민들이 김일성이 누구인지 잘 몰랐다. 김일성은 항일전의 공로가 아니라 이 시로 인하여 민족의 영웅으로 되었다.

 

독재자 가문이 3대에 결쳐 내려오면서 시인 조기천을 고마와하는 리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내가 시인 작가들을 혐오하는 리유가 여기에 있다. 아직도 이땅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삶의 권리와 자유를 빼앗은 장본인이 김일성이라는데 대해 생각하는 것을 죄스럽게 여기고 있다. 이 나라의 시인 작가들은 독재자의 매문 문필가로써 민족앞에 얼마나 큰 죄악을 저질렀는가를 반디선생의 분노의 작품앞에서 돌이켜 보아야 한다.

 

자기들이 이 나라 인민들의 정신을 마취시켰기에 손쉽게 3대 세습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래 독재의 칼날 밑에서 고통받는 인민들의 신음소리가 그대들의 귀전에는 들리지 않으며, 매문 문필가로써 자기들의 삶 또한 자유롭고 편안했던가? 

 

반디의 비판정신,  항거정신을 따라 배워야 한다

반디의 작품은 이 땅의 매문 문필가들의 심장을 찌를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투쟁 방향을 가르쳐 주고 있다.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하여 세습독재하에서 신음하는 2천만 인민들에게, 독재정권의 창시자이며 봉건 조선을 재건한 김일성의 실체를 바로 알려주는 투쟁의 시작을 말이다.

                                                                          암흑의 땅 북녘에서 刀盡(도진) 올림

 

 

  ※ 북한의 솔제니친, 반디선생의 '고발'을 읽고 보내온 북한 내부 혁명가의 감상문이다.

     대한민국 AGAIN 에서 다시 조명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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